지난 11월 11~12일 이틀 동안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현장에서 관람했다. 물론 돈이 궁한 터라 합창석에서 봤기 때문에 최상의 소리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한국 관현악단의 연주와 확연히 차별되는 정제된 음향과 개별 단원들의 넘사벽 수준 기량-특히 관악부-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순간이었다.
물론 이 공연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더해 나는 독일 체류 이후 오랫동안 제대로 구사할 기회를 갖지 못한 독일어를 신나게 떠벌거릴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베를린 필의 아시아 투어 프로그램 중 피에르 불레즈의 '노타시옹' 연주 때 객원 주자로 참가한 독일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Holger Groschopp)와 만나 국내 윤이상 관련 자료를 주고 받고 풍월당과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예술자료원을 방문했는데, 그로쇼프는 국제 윤이상 협회의 회장 대리도 맡고 있다.
내가 건넨 자료에 답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로쇼프는 내게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세 종류의 음반들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바로 올해 발매된 국제 윤이상 협회의 회원 전용 CD 9집이 있었다.
9집 (2013)
ⓟ 2013 Internationale Isang Yun Gesellschaft e.V.
그로쇼프와 직접 만난 것은 저 베를린 필 공연 때가 처음이었지만, 이미 그 전부터 메일로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고 자료도 발송했기 때문에 협회의 동향 같은 것도 직접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 동향은 대체로 좋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아직 협회에 베를린의 윤이상 자택 보존이라던가 더 안정적인 기금 마련 등의 현안이 쌓여 있지만 재정난으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 음반도 원래 순탄하게 진행되었다면 작년에 나왔어야 할 물건이라고 했지만, 음원 선택과 음반화 작업 등에 난항을 겪어서 올해에 와서야 수록곡이 대폭 교체된 형태로 선보였다고 한다. 원래 계획이라면 그 동안 음반으로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합창곡들이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는데, 사실 윤이상의 합창곡과 오페라 같은 경우에는 그 중요성에 비하면 음반이 전무한 실정이라 꽤 아쉬웠다.
물론 이 신보도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레어템인데, 수록된 순서 대로 써보려고 한다.
1. 플루트를 위한 다섯 개의 연습곡 (1974): 제1번
베른하르트 쿠리 (플루트)
국제 윤이상 협회에서는 이미 6집(4번)과 7집(3/5번)에서 저 연습곡들을 섞어 출반한 바 있었는데, 이 9집으로 전곡의 음원이 모두 갖춰지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나온 타라 헬렌 오코너(아카디아)와 이르멜라 놀테(토로폰)의 연주를 담은 전곡반이 있지만, 각 곡마다 다른 플루트 주자들의 연주를 한데 모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1번의 경우 흔히 산조대금으로 연주하는 국악 정악의 청성자진한잎(또는 청성곡)을 많이 참고해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국립예술자료원에는 이 곡을 플루트가 아닌 산조대금으로 연주한 음원도 존재한다.
같은 플루트를 사용한 5번과 달리 여기서는 정-동-정-(동) 식으로 곡의 흐름을 짜놓은 것으로 들리는데, 템포나 음의 움직임 변화보다는 주로 다양한 음역대에서 포르티시모 혹은 그 이상의 강한 음역을 연습하도록 하기 위한 곡으로 여겨진다. 또 마지막 대목에서는 극단적인 디미누엔도를 요구해 숨이 거의 사라진 후에도 계속 키를 조작하는 소리의 여음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고 있다.
연주를 맡은 쿠리는 오스트리아 트리벤 태생의 플루티스트로, 그라츠와 빈, 베를린에서 고트프리트 헤히틀과 볼프강 슐츠(빈 필 수석 역임), 로즈비타 슈테게에게 배웠다고 한다. 관현악단 플루티스트로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드레스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경험을 쌓아왔고, 현재는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수석대행 플루티스트 겸 드레스덴 음대 강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녹음은 수록곡 중 가장 최신의 것을 사용했는데, 2012년 10월 17일에 베를린 예술대학의 톤스튜디오 분데스알레에서 제작한 스튜디오 녹음이다.
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1963)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바이올린), 안드레아스 케르스텐 (피아노)
7집에 수록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과 함께 초기 이력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2중주 곡인데, 역시 12음 기법을 주된 소재로 삼되 특정 음을 중심으로 다양한 셈여림과 주법, 음색을 시험하는 주요음 기법을 함께 도입했다는 점에서 초기의 실험 노선을 대표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베른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는 근현대음악을 위주로 상당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주자인데, 1926년생으로 올해 87세라는 고령의 나이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고 한다. 프랑크 마르탱의 바이올린 협주곡(1952)과 버르토크 벨러의 미발표작이었던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58)을 세계 초연한 경력도 있고, 딱히 근현대에 한정짓지 않더라도 칼 리히터가 지휘한 뮌헨 바흐 관현악단과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을 같이 녹음한 음반도 있다.
그리고 이 '가사' 는 음반에서 두 번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이 원판이고 한 곡 건너 수록된 것은 굉장히 이색적인 버전이다. 이 원판 녹음은 1999년 11월 3일에 슈투트가르트 음대의 콘체르트잘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의 협회반 실황들과 마찬가지로 박수 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3. 플루트를 위한 다섯 개의 연습곡 (1974): 제2번 리암 말렛 (알토플루트)
알토플루트를 악기로 택한 연습곡 시리즈의 두 번째 곡인데, 상당히 격렬하고 강한 음색의 훈련을 위해 작곡된 1번에 비하면 이 곡은 매우 섬세한 피아니시모 혹은 그 이하의 셈여림 숙달을 위해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악기 자체의 음역도 낮은 편이고 동적인 면모도 1번이나 3번, 5번 등 홀수 곡보다는 덜한 편인데, 물론 곳곳에 멀티포닉스라던가 숨과 소리의 비율을 딱딱 맞춰 연주해야 하는 대목이 속출하는 등 손보다는 숨 조절이 매우 까다로운 곡으로 생각된다.
연주자인 말렛은 뉴질랜드 왕가레이 태생으로, 오클랜드와 프라이부르크, 베를린에서 각각 우베 그로트와 펠릭스 렝글리, 로즈비타 슈테게에게 배웠다고 되어 있다. 관현악 활동은 스웨덴의 예테보리 교향악단과 베를린 코믹 오페라(코미셰오퍼) 관현악단, 베를린 필에서 객원으로 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웰링턴의 뉴질랜드 교향악단 객원 단원 겸 독주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수록 음원은 2011년 4월 19일에 1번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예대의 톤스튜디오 분데스알레에서 제작한 스튜디오 녹음이다.
4. 바이올린, 피아노(와 첼레스타), 심발롬과 타악기를 위한 '가사'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편곡판 2008)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바이올린), 홀거 그로쇼프 (피아노/첼레스타), 마티아스 뷔르슈 (심발롬/타악기)
이 음반에서 가장 이색적인 수록곡인데, 사실 편곡이라는 작업은 주로 현대음악 이전의 레퍼토리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작곡자가 매우 꼼꼼하게 자기 주장을 투영하는 현대음악 쪽에서는 그다지 흔치가 않다. 또 편곡을 하더라도 대개 작곡자가 직접 하기 마련이고-불레즈의 노타시옹도 원래 피아노곡 모음이었지만, 현재 그 중 다섯 곡을 작곡자가 직접 편곡했다-, 타인의 편곡이더라도 작곡자의 승인을 거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윤이상은 1995년에 타계했고, 그 이후에 나오는 편곡들은 물론 작곡자의 승인을 받을 래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편곡의 진정성 같은 것이 의심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단 협회를 통해 음반이 나올 정도라면 작곡자의 의지를 계승한 협회에서 승인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6집에 실린 소양음의 피아노판도 비슷하게 사후 편곡된 사례다.
슈네베르거는 이 곡을 상당히 자주 연주한 연주자로서 곡을 꼼꼼하게 분석했고, 곡에서 피아노 파트가 단순히 반주 역할에 그치지 않고 고유의 소리층을 중첩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편곡으로 재구성한 것이 이 판본인데, 바이올린 파트는 거의 그대로지만 피아노 파트의 경우 피아노 외에 첼레스타를 같이 넣고 한국의 양금과 비슷한 헝가리의 타악기 심발롬, 공과 탐탐, 차이니즈 심벌, 마림바, 트라이앵글, 박 같은 타악기를 같이 넣어 상당히 다양한 음색을 선보이고 있다.
이 편곡판은 2008년 11월 15일에 베를린 예대의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열린 공연에서 초연되었고, 여기 수록된 녹음도 그 때의 실황이다. 심발롬과 타악기를 맡은 뷔르슈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타악 주자로, 고향과 파리에서 수학한 뒤 바젤 음악원에서 타악 강사로 활동하면서 언어와 신체 표현까지 아우르는 실험극 같은 작업에도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타악기 전반 외에도 이 녹음에서 연주한 심발롬이나 글라스하모니카 같은 이색적인 악기의 연주에도 능통하다고 되어 있는데, 슈네베르거와는 쿠르탁 죄르지의 작품을 연주할 때 만나서 편곡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타악과 심발롬 파트의 취급에 관해서도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줬다고 나와 있다.
5. 플루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5중주 (1986) 로즈비타 슈테게 (플루트), 괴츠 뤼스티크 (제1바이올린), 괴츠 하르트만 (제2바이올린), 카탈리나 맥도널드 (비올라), 클라우디아 림페르크 (첼로)
라디오 프랑스의 위촉으로 작곡된 곡으로, 수록곡 중에는 가장 후반기의 작품이다. 그 동안의 중주곡들과 달리 모데라토-아다지오-알레그로 3악장인 다악장 형식을 취하고 있고, 당시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와 중기의 실험과 전위성이 다소 후퇴한 대신 좀 더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음향의 작품으로 마무리되었다. 발터-볼프강 슈파러가 작성한 속지 해설에 따르면, 어릴 적 통영에서 자라며 자주 접했던 어부들의 노동요와 항일운동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힘든 기억들을 떠올리며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윤이상 플루트 작품의 단골 연주자인 슈테게와 협연한 현악 4중주 연주자들은 모두 당시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2007년에 카이저슬라우테른 남서독일 방송 관현악단과 통합되어 자르브뤼켄 카이저슬라우테른 독일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개칭되었다-단원들이었다.
뤼스티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으로 1965~68년 동안 베를린 필 단원으로 재직하다가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이반 갈라미언과 오스카 셤스키에게 배웠고, 1977~2011년 동안 자르브뤼켄 방송향/독일 방송 필의 악장을 역임했다.
베를린 출신인 하르트만은 귄터 케어와 이고르 오짐에게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배웠고, 1979년에 자르브뤼켄 방송향에 제2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해 1989년에 제2바이올린 수석으로 승급했다. 2013년 현재도 계속 직책을 유지하면서 아르투스 4중주단 단원, 독주자 겸 지휘자로 다양하게 활동 중이라고 한다.
비올리스트 맥도널드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캐나다인 연주자로, 몬트리올과 토론토에서 각각 오토 요아힘과 로랑 페니브에게 비올라를 배우고 체코와 독일에서 유학한 뒤 밤베르크 교향악단과 헤센 방송 교향악단을 거쳐 1985년에 자르브뤼켄 방송향에 입단했고, 현재도 계속 재직 중이다.
첼리스트 림페르크는 데트몰트와 하노버에서 각각 이레네 귀델과 프리드리히-유르겐 젤하임에게 배웠고, 1985~87년에 괴팅엔 교향악단에서 수석 첼리스트로 재직했다가 1987년에 자르브뤼켄 방송향의 첼로 단원으로 옮겨가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수록 음원은 1987년 12월 14일에 자르브뤼켄 방송국에서 방송녹음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적어도 이 곡의 상업반은 이전까지 음반 목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게 아마 세계 최초 음반 발매가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이 음반을 그로쇼프와 만나기 전에도 이미 협회에서 부쳐온 것으로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건 지인에게 건네줬고 이것으로 내 꺼 한 장, 또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배에게 선물로 줄 한 장을 더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배는 처음으로 찾아간 하우스 콘서트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 공연은 상당히 유니크한 무대였기 때문에 따로 감상평을 남기려고 한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