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의 페루초 부소니(Ferruccio Busoni, 1866-1924)는 주로 리스트 이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동안 활약한 기교파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피아니스트 활동 못지 않게 작곡가로서 남긴 작품도 여럿 있고 음악미학 쪽에서도 신고전주의와 미래주의라는 두 가지 사조를 예견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등 상당한 마당발이었다.
부소니의 작품들 중에는 '파우스트 박사' 같은 오페라도 있고 관현악 작품도 있지만, 주로 연주되는 곡들은 피아노곡이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남긴 작품도 많은데, 다만 그 중에는 편곡인지 작곡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곡들도 많다. 물론 바흐의 샤콘을 최저음역 확장판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것들 같은 경우는 확실히 편곡물로 분류되지만, 그렇지 않은 애매한 성격의 곡들도 여럿 있는 게 문제다.
대선배 리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부소니는 선배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들로 즉흥 연주를 하거나 메들리 형태로 엮어내거나 하는 패러프레이즈의 명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악보화한 곡들도 많고, 만년에 피아니스트 육성용 교재를 출판할 때도 이렇게 자신이 마개조한 손을 본 선배 작곡가들의 곡을 예시로 넣기도 했다.
이렇게 부소니가 남긴 편곡 혹은 패러프레이즈들은 꽤 많은데, 다만 이런 곡들을 묶은 선집 음반의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일단 검색해본 결과로는 1980년대에 필립스가 조프리 더글러스 매지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더블 앨범을 낸 적이 있던 것이 좀 본격적인 선집이었는데, 매지에 이어 현존하는 부소니의 '편곡스러운' 흔적이 있는 모든 곡을 집대성한 것이 오스트리아 음반사 카프리치오에서 나온 네 장짜리 세트다.
앨범 커버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연주자는 내게 직접 이걸 건네준 그로쇼프다. 2000년과 2004년, 2007년, 2008년에 문화예술 전문 라디오 채널인 도이칠란트라디오 쿨투어와 공동으로 녹음한 네 종류의 CD를 세트로 묶어낸 것인데, 수록곡들 중 여덟 곡은 이 음반을 통해 처음으로 녹음되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최초 녹음 작품들은 대개 부소니가 미처 출판하지 못하고 자필보 상태로 방치했거나 미완성 상태인 것들이 대부분으로 보이는데, 가령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를 위한 아다지오와 푸가 C단조 K.546의 푸가 같은 경우는 후자에 속하고 그로쇼프 자신이 보완한 판본으로 녹음하고 있다.
수록곡들이 상당히 여러 가지 형태라 음원 추출 후 하드에 mp3로 옮길 때 태그 정리를 하면서 상당히 골치를 썩였는데, 일단 원곡의 본래 모습을 남겨두고 편곡한 것은 부소니 편곡으로 했고 원곡에서 상당한 수준의 창작력을 가해 변형시킨 것은 부소니 작곡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 분류에 개인적으로는 아직 완벽하게 만족을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애매함은 부소니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여전히 남겠지만, 이 선집은 그가 상당한 기교파 연주자였고 또 작곡과 편곡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선배나 동료 작곡가들의 작품을 자기 방식과 노선대로 뜯어고쳐가며 연주할 만큼의 능력도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 또 현재 활동 중인 아르카디 볼로도스나 파즐 사이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편곡물 혹은 패러프레이즈와 연속성을 생각하고 들어보면 꽤 재미있는 물건으로 보인다. 다만 부소니가 워낙 곡을 어렵게 뜯어고친 경우에는 열폭도 좀 하면서 들어야 하겠지만...
마지막 하나는 현대음악에 속하는 더블 CD인데, 이 음반을 통해 처음 이름을 접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우어줄라 맴록(Ursula Mamlok, 1923-)의 작품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베를린에서 우어줄라 마이어로 태어난 맴록은 두 살때 아버지가 죽고 레비 집안의 의붓딸로 자라면서 우어줄라 레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우며 음악가로 입신하려던 우어줄라는 열 살때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자 큰 벽에 부딪히게 됐다. 유대인이었던 우어줄라는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나 생계 유지를 위해 직업학교에서 침대와 가구 제작을 배워야 했는데,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되자 1939년에 결국 가족들과 함께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다만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유럽인들이 나치와 전쟁을 피해 망명해 오자 쿼터제를 적용했고, 여기에 들지 못한 레비 일가는 잠시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지내며 미국의 망명 허용을 기다려야 했다. 과야킬에서도 우어줄라는 그 곳 음악학교에 등록해 계속 배웠지만, 제대로 된 첫 음악 교육은 1941년에 뉴욕 매네스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면서 받을 수 있었다.
조지 셀과 존 케이지, 로저 세션즈, 에른스트 크레네크, 에두아르트 슈토이어만 등을 거치면서 계속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던 우어줄라는 1945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1947년에는 시인인 제라드 드와이트 맴록과 결혼하면서 성을 다시 맴록으로 바꾸었다. 이후에도 맨해튼 음악원의 비토리오 잔니니 밑에서 배우면서 1957년에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전업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맴록은 쇤베르크 등 신 빈악파와 힌데미트, 또 같은 망명자였던 슈테판 볼페 등의 영향을 골고루 받기는 했지만, 특별히 자신을 어느 사조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현대적인 기법이나 스타일을 받아들이면서도 색채적인 음향이나 간소한 양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중도 노선을 걷는 작곡가로 보인다.
맴록은 남편이 2006년에 별세하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와서 활동하고 있다는데, 작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았고 바로 오늘(2월 1일) 91번째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맴록의 작품이 들어간 음반이 얼마 되지 않아서 작품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낯설었는데, 그로쇼프가 선물해준 저 음반으로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음반사 브리지 레코드에서는 2009년부터 맴록의 작품 선집 제작에 적극 앞장서고 있는데, 1~3집까지는 한 장씩을 할애하다가 2013년에 내놓은 4집 음반은 더블 앨범으로 구성했다. 이 앨범도 주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주자들의 녹음을 싣고 있는데, 독일 녹음의 경우 위의 부소니 선집과 마찬가지로 도이칠란트라디오 쿨투어와 공동 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4집 수록곡은 실내악과 독주곡이 대부분인데, 아직 학생 시절이었던 1944년에 작곡한 3성 푸가 A단조부터 2011년작인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회전(Rotations)' 까지 광범위한 시기의 작품들을 아우르고 있다. 피아노 독주곡들은 모두 그로쇼프가 연주했고, 이외에도 콜랴 레싱(바이올린)이나 찰스 나이디히(클라리넷), 베르고를 통해 자신들의 앨범 시리즈를 내기도 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거점의 현대음악 전문 실내악단인 무지크파브리크(MusikFabrik)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작이든 최신작이든 일단 음향적인 과격함 보다는 독특한 음향미와 부드러운 흐름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피아노 모음곡 '메뚜기(Grasshoppers)' 와 두 대의 클라리넷을 위한 소나타 같은 1950년대 작품에서는 무조성 기반이지만 독특한 서정미와 유머가 느껴진다. '넷을 위한 콘서트 피스' 나 첼로를 위한 작품, 플루트, 첼로와 타악기를 위한 디베르티멘토 등이 작곡된 1960년대로 넘어가면 좀 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면이 강해지는 인상이다.
물론 새로운 음향이나 해프닝, 무대 연출과 음악의 강한 연관성 등 여러 면에서 파격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재 신음악계의 동향에 비춰보면 '충격적인' 면은 다소 덜한 편이다. 하지만 극적 구성을 띄는 곡에서도 일단 너무 모나거나 거칠지 않게 튀어나오는 소리들의 모양새라던가 하는 자기 주관은 확고한 편이고, 그런 점에서 무조성 속의 감수성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이 4집 덕에 브리지에서 나온 나머지 맴록 선집들에도 구미가 당기고 있는데, 다만 아직까지 브리지의 음반들이 한국에 수입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상태고 거기에 현대음악이라면 점점 좁아지고 있는 한국 클래식 음반 시장에서 공식 수입 루트를 탄다는 게 점점 희박해질 것 같다. 결국 해외 구매가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 같은데, 외국에 나가게 되면 좀 더 적극적으로 구입을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진귀한 선물을 건네준 그로쇼프와는 베를린 필 아시아 투어 후에도 계속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 풍월당을 같이 방문하면서 나눈 여러 이야기가 인연이 되어 내게 보내준 소포를 통해서도 진귀한 음반 세 종류를 또 입수할 수 있었다. 해당 음반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