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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시아 각지의 관현악단 단원들이 헤쳐모여 식으로 만드는 비상설 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음반으로 접한 것은 폴리그램 한국 지사에서 1997년 쯤 나온 CD였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모은 음반은 주로 외국 연주자들의 녹음이 든 음반이었고, 지금처럼 한국 관현악단 음반들을 죽자살자 모으던 시절은 아니어서 별로 관심이 없을 뻔 했다. 다만 내가 흥미롭게 봤던 건 예술의 전당에서 녹음을 했다는 것이었다.
한국 공연장에서 녹음한 음반이 (비록 한정된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외국 메이저 레이블을 달고 나오니 꽤 '뽀대가 있어 보였고', 그래서 카세트 테이프로 구입해 들어봤다. 하지만 뭔가 루즈한 느낌이 지배적이라 들었을 때의 감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인 2001년 1월 20일에는 저 악단의 연주를 현장에서 들을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다만 본 공연은 아니었고, 공연 직전의 무대 리허설 참관이었다.
저 기회는 내가 아시아 필의 연주라는 것을 실제로 들어본, 현재까지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리고 정명훈의 지휘를 직접 본 것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본 공연도 못봤지만 이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편인데, 그게 음반으로까지 나왔을 줄은 몰랐다.
이 날 공연된 곡은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는데, 독창자는 나카무라 토모코(소프라노), 니시 아케미(알토), 이원준(테너), 이하라 히데토(베이스)였고 합창단은 인천과 수원, 안산의 시립합창단이 연합해 맡았다. 이 공연은 무대 리허설 때도 봤지만 MBC 스탭들이 촬영해 갔고, 이후 녹화방송 형식으로 방송된 바 있었다. 하지만 녹음이 이뤄졌는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저 CD는 아시아 스타 네트웍스(ASN)라는 공연 기획사가 제작 주체로 기재되어 있는데, 속지 뒷쪽의 소개글을 보면 이 공연의 무대 리허설을 애호가들과 학생들에게 개방하는 아이디어도 이 기획사가 낸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다만 이 회사가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는데, 속지 맨 뒷장에 기재된 홈페이지도 지금은 전혀 접속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들어봤는데, 이것 역시 생각했던 것 만큼의 흥이 나지 않았다. 특히 녹음이 상당히 듣기 피곤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나마 DG 스탭들이 서울까지 와서 직접 해간 1997년 녹음은 비교적 괜찮은 음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퇴보라고 해도 될 정도다. 포르테와 피아노의 구별이 별로 없는, 무대에 바짝 댄 마이크로 잡은 소리라는 것 만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명훈이 지휘한 베르디 레퀴엠 음반은 이외에도 일본의 킹레코드에서 NHK 교향악단 시리즈 앨범으로 낸 것이 또 있지만, 이건 일본 음반 전반이 그렇듯이 가격이 더럽게 비쌌던 데다가 절판 속도도 빨랐던 편이라 지금 한국에서 구하기는 상당히 힘들 걸로 보인다. 서울시향이 요즘 DG에서 내고 있는 음반 시리즈에 추가해 좀 더 공을 들여 새로 내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지만, 이미 녹음 레퍼토리와 음반 발매 계획은 얼추 잡혔으니 만약 시향이 DG와 재계약에 성공하면 어떨까.
위의 아시아 필 음반과 함께 뮤직앤시네마에서 구입한 또 다른 물건은 대전시향이 2000년 9월 2일에 충남대 정심화국제문화회관에서 개최한 100회 정기연주회 실황 음반이다. 당시 대전시향 상임 지휘자는 요 전에 KBS 교향악단과 불화 끝에 물러나며 자신의 이력에 흑역사를 추가한 함신익이었는데, 100회라는 상징성 때문인지 프로그램을 상당히 거창하게 짰다고 들었다. 그리고 또 그 상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인지, 이즘레코드에 위탁해 CD도 만든 것 같다.
이 공연은 서곡 등 짤막한 관현악곡이 아니라 브루흐의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스코틀랜드 환상곡(조인상 협연)으로 시작해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로 1부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소프라노 타냐 밀러, 테너 박광하, 바리톤 로버트 가드너, 합창 대전시립합창단+부산시립합창단, 어린이 합창 대전시립소년소녀합창단)로 2부를 구성했다. 카르미나 부라나 만으로 1시간은 채울 수 있을 정도여서, 각 부마다 CD 한 장씩을 할애한 더블 앨범으로 만들었다.
대전시향의 음반으로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고, 또 관현악을 동반한 합창곡 연주에 일가견이 있다는 함신익이 지휘한 것이라 이것도 기대를 하고 들었다. 다만 그 인상이 어땠냐고 하면...아시아 필 음반과 비슷했다. 물론 아시아 필 음반처럼 마이크를 무대에 꼴아박듯이 대놓고 녹음한 것 만큼 조야한 소리는 아니지만, 정심화국제문화회관 자체가 그다지 음향 조건이 좋은 곳은 아니라서 소리가 다소 산만하게 흩어진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나마 1부는 좀 무난했지만, 합창단까지 가세한 2부에서는 사운드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중간중간 녹음 기기의 문제로 보이는 기계적 잡음도 들어가 있어서 좀 신경이 쓰였다. 연주력 자체도 그다지 다듬어지지 않은 기색이 역력해서, 지금과 비교하면 꽤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다만 아예 못들어 줄 만한 것도 아니고, 또 이것 외의 대전시향 음반이 없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내 한국 관현악단 음반/음원 컬렉션에서 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취급하고 싶기도 하다.
이외에도 구글링을 통해 중고음반 사이트를 몇 군데 더 알아봤는데, 그 중 뮤직메이트에서 또 희귀한 음반 두 종류를 발견하고 주문했다.
이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수원시향/박은성 콤비의 게누인 CD는 바그너와 베를리오즈 두 종류였는데, 그나마 시향 측에서도 이제 재고가 없어서 유료회원 가입 특전으로 줄 수 있는 건 베를리오즈 한 종류 뿐이라고 했기 때문에 결국 누가 중고 매물로 내놓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중에 브루크너 교향곡 4번 음반이 눈에 띄었다.
수원시향이 게누인 음반으로 내놓은 브루크너 교향곡은 4번과 6번, 8번 세 곡인데, 6번과 8번은 교향악축제 때의 실황이고 4번은 베를리오즈/바그너 음반과 마찬가지로 성남의 분당요한성당에서 2004년 7월 19-22일 나흘 동안 스튜디오 녹음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실수가 눈에 띄기 쉬운 당일치기 실황 보다는 스튜디오 녹음한 것이 더 안정성이 있어 보였는데, 그걸 마침내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은 그렇게 자주 연주되는 편은 아니었다. 주로 브루크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고 온 지휘자들이 종종 다루는 정도였는데, 그 지휘자들 중에는 물론 박은성도 있다. 게누인에서는 세 종류만 음반으로 제작했지만, 그 외에도 몇 곡을 더 공연했고 그 중 3번의 경우 교향악축제에서도 무대에 올렸기 때문에 KBS에서 녹화한 영상물도 방송사 측에 주문하면 DVD로 구입할 수도 있다.
이 음반도 다른 게누인 한국 지사 음반들과 마찬가지로 정남일이 제작했는데, 다른 수원시향 녹음들과 마찬가지로 음질이 약간 탁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게다가 박은성의 브루크너 스타일도 다소 무게감이 강하고 꼬장꼬장한 면이 강해서 좀 완고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브루크너 교향곡의 고정 관념인 '파이프오르간처럼 다채로운 음색의 강한 대비' 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제작 상의 실수였는 지는 몰라도, 3악장의 경우 바이올린의 여린 트레몰로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호른의 사냥나팔풍 악구가 나와야 되는데 트레몰로를 짤라먹고 바로 호른 연주로 시작하고 있어서 꽤 이상했다. 이런 탓에 베를리오즈나 바그너 음반보다 더 인상이 좋지 않게 들렸는데, 물론 이런 걸 관대하게 봐준다면 현재까지 유일하게 한국에서 제작된 브루크너 교향곡의 스튜디오 녹음이라는 가치는 충분히 높이 살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게누인 음반 세 종류를 갖추게 되었는데, 나머지 세 종류는 또 언제 구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수원시향은 김대진 부임 후 녹음 프로젝트에 꽤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현임 지휘자의 프로젝트도 중요하겠지만 전임 지휘자가 만들고 간 기록물의 재평가나 재발매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수원시향 음반과 함께 뮤직메이트에서 구입한 또 다른 것으로 민간 악단인 서울 클래시컬 플레이어즈의 더블 CD가 있다. 2003년에 창단된 저 악단은 박영민이 상임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다만 박영민이 원주시향 상임 지휘자가 된 뒤로는 별다른 공연 소식이나 동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악단은 주로 고전~초기 낭만 레퍼토리의 연주에 주력하는 소편성 악단이었는데, 가끔 객원 단원들을 충원해 그 이후 시기의 곡들도 종종 연주했던 모양이다. 2006년 3월 11일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했다는 공연도 그런 '일탈' 에 속하겠는데, 프로코피에프의 발레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 1~3번 중에서 18곡을 발췌해 셰익스피어 원작의 전개 순서에 맞춰 재배열한 상태로 공연했다.
이 공연은 드라마 콘서트라는 꽤 특이한 컨셉으로 진행된 것 같은데, 곡 사이사이에 연극 배우인 배상돈을 기용해 셰익스피어 원작의 스토리를 각색한 모노드라마를 낭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공연 이후 악단 측에서 자체 제작해 이듬해 아울로스 미디어를 통해 내놓은 이 실황 CD에도 모노드라마 부분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아이디어가 음반에까지 들어온 것이 별로 탐탁치 않다. 물론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베를린 필 재임기에 베토벤의 '에그몬트' 나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극음악을 올릴 때 그랬던 것처럼, 연극 상연의 반주 음악을 상정하고 작곡된 극음악의 공연에서 대사를 낭독하는 것은 그다지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이 곡의 원곡은 대사가 아니라 안무와 긴밀히 연관된 발레고, 그런 점에서 이미 대사가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성격이 강하다. 거기에 대사가 중간중간 삽입되니 오히려 동어반복/선행학습 혹은 사족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도 생겼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음반을 도무지 그대로 들을 수 없었고, 결국 대공사를 단행해야 했다. WAV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 모든 나레이션을 다 잘라버리고 음악만 남겨놓은 것으로 듣고 있는데, 이렇게 하니 CD 한 장 분량으로 줄어들었다. 실제 공연장에서 들었던 사람이라면 신선했겠지만, 음악만 기대하고 그것을 또 반복 청취하려고 음반을 산 내 입장에서는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연주 자체는 하룻 동안의 실황을 담은 것이기는 하지만 크게 빠지거나 하지는 않은 무난한 것이었다. 다만 녹음된 음량이 비교적 작다 보니, 조용한 대목에서는 좀 답답하기도 하다. 아울로스 미디어에서 배급을 맡은 것을 보니 뭔가 공식 시판할 계획도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그 동안 이 물건을 음반 매장이나 사이트에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결국 비매품으로만 풀린 것 같다.
이렇게 첫 네 장을 들어보고 뻘글을 싸제껴 봤는데, 이어서 나와 그다지 친숙하지는 않은 종교음악들을 담은 나머지 네 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