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에 쓴 곡이 목관 5중주와 금관 5중주였는데, 그 때문에 지금도 '관악 중독' 증세가 좀처럼 가시질 않고 있다. 그리고 개학 후에 쓸 곡 마저도 목관 6중주로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지금 그냥 듣는 곡들도 대부분 관악 관련 작품들이고.
어쨌든 이번에 소개할 곡은, 이 시리즈의 1편과 70편의 주인공들과 나름대로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70편에 소개한 인물은 후기 낭만 시대에도 초기 낭만 시대의 스타일을 유지하던 꼬장꼬장한 보수주의자 라인베르거였고, 1편에 소개했던 인물은 라인베르거의 제자였던 볼프-페라리였다.
이번 곡의 작곡자인 루드비히 투일레(Ludwig Thuille, 1861-1907)도 라인베르거의 제자였는데, 공교롭게도 라인베르거 편에서 소개한 곡과 똑같은 편성의 곡을 하나 작곡한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투일레는 남부 티롤 지방의 보첸(Bozen) 출신이었는데, 현재 저 땅은 이탈리아 영토가 되어 있고 이름도 '볼차노(Bolzano)' 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리즈 3편에 소개했던 실비오 라차리와 같은 동네 출신이다) 하지만 어릴 적에 양친을 모두 여읜 탓에 유년기를 주로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 살던 삼촌의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음악 교육도 그 곳에서 받게 되었는데, 한창 배우던 때인 1877년에는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뮌헨 출신의 소년을 알게 되었다. 그 소년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고, 이후 투일레는 죽을 때까지 슈트라우스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현악 작품들의 피아노 편곡을 해주는 등의 활동을 했다.
슈트라우스의 추천 혹은 권유가 있었는지, 투일레도 뮌헨으로 옮겨가 라인베르거의 문하생이 되어 작곡을 배우게 되었다. 학업을 마친 뒤에도 계속 뮌헨에 머물며 활동했는데, 작곡 외에도 스승처럼 교육자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라인베르거의 강한 영향 때문이었는지 투일레 자신도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했는데, 거기다가 스승과 마찬가지로 영어권 제자들도 받은 것까지 상당한 붕어빵이었다.
투일레가 길러낸 제자로는 지휘자로 유명했던 헤르만 아벤트로트를 비롯해 에르네스트 블로흐, 리하르트 베츠, 루디 슈테판, 발터 브라운펠스, 그리고 미국인인 헨리 킴벌 해들리 등이 있다. 그리고 이론서로는 루돌프 루이스와 공저한 '화성학 교본(Harmonielehre)' 이 있는데, 이 책은 한동안 한국 작곡학도들이 백병동 화성학 떼듯이 필수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투일레는 한창 활동할 시기였던 40대 중반에 심장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인스브루크 시절부터 친구였던 슈트라우스는 반대로 80대까지 장수했다. 그래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나 기타 문헌들을 보면 투일레의 이름이 1910년 이후로는 잘 언급되지 않고 있고.
활동 기간이 짧은 편이었던 탓에 남아있는 작품들도 많지 않은데, 초기에는 피아노 협주곡이나 교향곡 같은 관현악 작품들도 썼고 네 편의 오페라와 두 편의 극음악, 한 편의 무용극 등도 남아 있지만, 주로 열중한 장르는 실내악이었다. 그나마 가장 많이 연주되는 축에 속하는 작품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6중주(op.6)이다.
위에도 썼지만 라인베르거의 마지막 작품과 마찬가지로 목관 5중주에 피아노를 더한 편성의 작품인데, 다만 작곡 자체는 스승보다 11년 더 빠른 1888년에 완료되었다. 구조도 상당히 비슷한데, 라인베르거가 3악장에 미뉴에트를 쓴 것과 달리 가보트를 사용했다는 점 정도가 중요한 차이점일 뿐이다.
다만 화성의 취급에 있어서는 라인베르거보다 더 대담한 편인데, 특히 2악장에서는 슈트라우스에게 받은 영향도 나타나 있다. 하지만 동시대 인물들의 취향이나 자신의 주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볼프-페라리의 실내 교향곡에 비하면 훨씬 보수적인 성향의 작품이다.
투일레는 이외에도 현악 4중주와 두 곡의 피아노 5중주, 두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오르간 소나타 등을 작곡했는데, 관악기가 들어가는 실내악은 이 곡 하나 뿐이다. 하지만 현악 실내악에 비하면 레퍼토리가 적은 편인 관악계에서는 꽤 환영받는 레퍼토리인데, 심지어 한국 연주자들이 취입한 CD도 있다.
사실 듣기로는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 있던 음원을 먼저 들었는데, 카프리스라는 음반사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스웨덴의 순스발 목관 5중주단과 피아니스트 칼-악셀 도미니케의 연주였는데, 국내에 CD 출반은 안된 것 같아 다른 것을 찾아보고 있던 터였다.
ⓟ 1995 Korean Broadcasting System
KBS에서 출반된 '한국의 연주가' 시리즈에 포함되는 '실내악집 III' 의 마지막에 들어 있었는데, 서울 목관 5중주단과 피아니스트 조치호의 연주였다. 서울 목관 5중주단은 KBS 교향악단과 서울 시립 교향악단 단원 출신 연주가들이 결성한 단체인데, 녹음 당시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김대원(플루트. KBS 교향악단 수석 역임)
성필관(오보에. 서울 시립 교향악단 수석 역임)
김현곤(클라리넷. KBS 교향악단 수석 역임)
이광구(호른. 서울 시립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윤상원(바순. KBS 교향악단 수석)
국내에서 알아주는 악단들의 수석급 단원들이 모인 만큼 비교적 안정된 연주인데, 다만 1악장이 좀 느리게 들린다는 것은 라인베르거 때와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커다란 실수는 없지만 좀 사리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녹음도 볼륨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져서 그런 인상을 더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연주나 녹음보다 가장 문제인 것은, 이미 절판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회현동 중고음반상가에 중고품도 아닌 신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었는데, 가격도 불과 5000원이었다. 재고가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대략 한두 장 정도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저 시리즈의 초기 발매원이었던 해동물산 것이 아니라 U-reem Record라는 회사의 재발매판이었는데, 재발매판의 재킷 디자인도 꽤나 심심하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 연주자들의 음반이 몇몇 스타플레이어들을 빼고는 상업적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해야 겠지만, 솔직히 나같이 디자인이 구리건 간에 마음에 들면 산다는 주의의 사람이 아닌 이상 디자인빨이 살지 않는다면 구매욕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외에 투일레 작품의 다른 음반들은 1990년대부터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독일의 CPO에서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을 담은 음반과 피아노 5중주 두 곡을 담은 음반 두 종류가 출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영국의 ASV나 독일의 욈스(Oehms) 클래식스, 에체트라(Etchetra) 등 여타 마이너 레이블에서도 한두 장 정도가 나와 있는데, 아직 오페라나 극음악 등의 전곡 녹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이 곡은 꽤 여러 종류가 나와 있는데, 위에 썼던 순스발 5중주단 외에도 헥사곤 앙상블(에체트라), 콘코드(쿼츠), 바르샤바 목관 5중주단(아울로스), 류런스 목관 5중주단(서밋) 등이 CD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위의 음반들 모두 아직 국내에 정식 수입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 때문에 이번 발견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