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면전의 '환희' ?-듣고 나서.

정말 오래 걸렸다. 2004년 9월 27일에 일본 푸르트벵글러 매니아 중 한 사람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어 듣고 나서 포스팅을 하기는 했지만, 정작 문제의 CD는 오늘(2007년 3월 24일)에야 입수할 수 있었다.

코믹월드 때문에 일부러 일찍 집을 나선 뒤 이사 후 재개점한 풍월당에 들어선 것이 10시 20분 정도. 개점한 지 20분만에 들어간 셈인데, 들어가자마자 그 CD가 있냐고 물어본 뒤 값을 지불하고 후다닥 나와 다시 양재 aT센터로 향했다.

매표줄을 기다리는 동안 되도 안되는 영어 실력으로 마이클 태너(Michael Tanner)가 썼다는 CD 속지를 훑어보고 나니 벌써 입장이었다. 입장 직후 휴대용 CDP에 걸어서 재생시켰는데, 다 둘러보고 난 뒤에는 벌써 아나운서의 독일어 종료 멘트가 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음악 듣기에 정신이 팔려서 부스 관람을 소홀히 했을 지도 모르겠다.)

(↑ 기다리면서 찍은 '인증샷')
문제의 CD는, 예전 포스팅에서 썼던 바와 같이 2004년 10월에 아치펠(Archipel)에서 출시되었다. 원본은 자기 테이프로 남겨진 대부분의 푸르트벵글러 전시 녹음과는 달리, 12인치의 78회전 '디셀라이트(decelith. 독음이 맞는 지는 모르겠음)' 디스크 일곱 장에 양면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이 디스크 세트들이 빈(Wien)의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었고, 이를 독일의 트루 사운드 트랜스퍼즈에서 시제품 CD-R로 제작했다. 그 음원을 아치펠에서 넘겨받아 정식 시판 CD로 만든 것이 바로 이 물건이다. 리마스터링은 크리스티안 츠바르크(Christian Zwarg)라는 엔지니어가 담당했다는데, 아마 CD-R 제작본 거의 그대로를 쓴 것 같다.

박수까지 잘라버리는 대부분의 푸르트벵글러 실황녹음들과는 달리, 이 CD는 세계 최초 발매라는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디셀라이트 디스크를 생략 없이 몽창 담아놓고 있다. (때문에 전시 녹음에서는 굉장히 듣기 힘든 공연 전후의 박수 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고 후반에는 제국방송협회(Reichsrundfunkgesellschaft. 약칭 RRG)의 아나운서가 연주회의 개최 동기, 주최자-선전성 장관 괴벨스-, 연주자, 방송된 지역 등을 간략하게 설명한 독일어 멘트까지 들어가 있다.

일단 거기서 이어폰으로 들었던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집에 돌아와서 오디오로 걸어서 들어 보았다. 아래부터는 대략의 가십성 감상평;

1. 음질 개판

2004년에 글을 쓸 때도 음질에 대해 걱정을 좀 했는데, 들어보니까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11개의 베토벤 교향곡 9번 녹음 중 가장 안좋은 수준이다. (심지어 최초의 전곡 녹음인 1937년 것보다도 상태가 안좋다.)

디셀라이트라는 물건의 한계인지 녹음 기술자의 내공 부족인지는 몰라도, 관악기가 부각되는 부분은 여지없이 디스토션이나 오버로딩이 걸려서 무척이나 거슬리고 전체적인 볼륨도 낮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테이프로 남겨진 3월 실황보다 더 과격한 연주' 라는 일본 애호가들의 의견에도 시큰둥해지기 일쑤다.

개인적으로는 타라나 뮤직앤아츠, 테스타먼트, 오르페오, 듀턴 같은 전문 복각업체에서 손을 댔으면 조금이라도 음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 악장 간의 휴지가 오지게 길다.

연주 시작 전의 박수 갈채 후, 소란스러운 객석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텀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1악장과 2악장 사이, 2악장과 3악장 사이의 텀이 엄청나게 길다. 각각 1분을 넘는데, 요즘 청중들 같으면 왜 연주 안하냐고 뭐라고 할 것 같을 정도다.

당시 청중들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평소에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할 때 이렇게 긴 휴지를 주었다고 하는데, 다만 3악장에서 4악장은 거의 쉼없이 곧장 이어서 연주했다고 한다. 이 연주도 마찬가지로 몇 초간의 정적 뒤에 곧장 4악장으로 들어간다.

3. 군인들의 정체?

소리만으로는 확인 불가능이지만, 4악장 종반부를 녹화한 영상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CD 속지에 8개 가량의 스틸 컷이 실려 있다. 특히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끄는데, 합창단의 남성부 단원들 중에 군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세 명 정도 보인다.

아마 연주회의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성악가 출신 군인들을 충원한 것 같은데, 실제로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도 친위대 군악대원들이나 합창단원들이 상부의 명령으로 공연에 동원되거나 자발적으로 휴가를 얻어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 연습 부족 테너의 안습

위의 사진에는 독창자들인 에르나 베르거(Erna Berger. 소프라노), 게르트루데 피칭어(Gertrude Pitzinger. 알토), 헬게 로스벵에(Helge Roswaenge. 테너)와 루돌프 바츠케(Rudolf Watzke. 베이스)의 모습도 같이 찍혀 있는데, 유독 로스벵에만 악보를 들고 노래하고 있다.

아마 로스벵에가 이 교향곡에서 독창을 맡은 적이 당시로서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악보를 보고 노래하는데도 중간부의 터키 행진곡풍 부분에서 가사를 틀리기도 하는 등 꽤나 불안불안한 모습이었다. 전설적인 독일 테너의 명성이 무색해지는 안습의 순간.

5. 뒤늦게 뻘쭘히 터지는 박수

4악장 코다에서 푸르트벵글러는 여느 때처럼 '말달리자' 분위기로 미친듯이 질주하면서 끝맺었는데, 요즘 같으면 청중석에서 환호성이든 뭐든 간에 완전 난장판이 될 기세다. 하지만 청중석에서는 상당히 오랫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겨우 박수가 나온다. 연주가 너무 황당할 정도로 난폭해서 얼어붙은 것인지, 아니면 히틀러 생일 기념이라는 엄숙함을 신경쓴 탓인지 궁금하다.

6. 마지막의 독일어 멘트

이 녹음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2004년의 글을 다음 카페 'societas musici(참고로 여기에도 '외부 링크' 로 연결해 놓았음)' 에 재탕했을 때, 카페 주인장이었던 (베를린 훔볼트대에서 음악사회학을 전공 중인) 송병욱씨가 '사적으로 만들어진 녹음(private recording)같지는 않다' 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송병욱씨는 댓글로 독일어 멘트를 대충 해석해 주었는데, 멘트가 실황중계 당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했었다 같은 '과거 시제' 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녹음이 사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상당히 근거가 있는 지적이었는데, 실제로 박수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기면서 멘트가 시작되는 것도 의심쩍다.

일본의 애호가들은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이 공연의 실황이 우선은 마그네토폰으로 녹음되었고, 이를 제국방송협회 관계자가 나치 수뇌나 기타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디셀라이트로 재녹음하고 거기에 멘트를 더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테이프' 의 소재가 또 의문시 되는데, 사실 3월 연주회가 이미 녹음되었기 때문에 테이프가 지워졌다고 주장하면 끝이다. 하지만 내가 관계자 같았으면 연주회가 갖는 정치적인 의미 때문에라도 차라리 3월 테이프를 지우던가 아니면 4월 테이프도 같이 남기던가 했을 텐데.

아무튼 이 녹음은 매우 역사적인 자료지만, 일반 음악 애호가들에게 권할 성질의 것은 절대 아니다. 차라리 3월의 실황이 테이프로 좀 더 '싱싱하게' 보존되어 있고, 해석에 있어서도 큰 차이점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히틀러와 나치에게 베토벤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용되었는지, 푸르트벵글러가 이 교향곡에 왜 이렇게 광포함에 가까운 해석을 가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겨지고 있다. 지도자의 생일을 맞아 환희의 감정이 극에 달해서였는지, 아니면 전쟁의 참화가 복받혀 터져 나와서였는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CD를 구하고 싶으신 분은 풍월당에 문의해 보시면 재고 유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값은 (기억이 맞으면) 11400원 정도로 그리 비싸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