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4일은 내게 군바리 시절의 개폭설크리 악몽을 떠올리게 해준 날로 기억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용산역에서 급행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은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없었는데, 역 구내에서 계속 방송되는 안내와 사과 메시지가 좀 불길하기는 했다.
목적지인 송탄역은 급행 통과역이라서 오산역에 내려 완행 열차를 기다려야 했는데, 내리자마자 눈으로 엄청나게 미끌미끌해진 바닥을 딛는 순간 갑자기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중간 선로로 무서운 속도를 내며 통과하는 열차들도 지나갈 때마다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직 지붕이 있는 역 안에서는 눈이 오는 양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송탄역에서 내린 뒤 찍은 역 앞의 모습. 이쯤 되면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아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내려대는 눈은 그치기는 커녕 더 심하게 왔는데, 미리 봐둔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는 벌써 위와 같은 거리 풍경이 되어 있었다. 내리막은 꽤나 미끄러웠기 때문에, 옆으로 서서 게 마냥 걸어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1차 목표 지점인 영빈루에 가까스로 도착. 흔히들 '짬뽕으로 유명한 집' 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짬뽕이 많이 나가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가게 앞에서 옷과 가방에 수북히 쌓인 눈을 대충 털어내고 들어가서 짬뽕 한 그릇(2500\!!!)을 시켰다.
메뉴판. 곱아든 손을 풀고 눈이 묻은 폰카 렌즈를 손질할 새도 없이 찍은 거라 좀 흔들려 버렸다. 아무튼 맨 위의 짜장면과 짬뽕 가격만 해도 눈에서 감동의 육수를 자아내는데, 당장에는 곱배기로 먹고 싶었지만 일단 2차 목표가 있었으므로 그냥 보통으로 시켜봤다.
양은 일반 중국집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대부분의 중국집에서는 넣어주지 않는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 외에는 오징어와 채썬 배추, 양파, 당근 등 일반적인 짬뽕 건더기들이었는데, 재료를 볶아서 넣는지 돼지고기는 간간히 그을린 흔적도 보였다.
아무튼 고픈배 움켜잡고 눈사람이 돼가며 길을 걸어온 터라, 먹는 개념이 아닌 입에 때려넣는 개념으로 마구 들이부었다. 그나마 중간에 이성을 좀 되찾아 찍어본 사진. 면발이 굵다는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 관점에서는 일반 중국집의 면발 굵기와 다를 바 없었다.
야채들도 야들야들하게 푹 익힌 상태였고, 그리 심하게 맵지 않으면서도 진한 국물맛도 괜찮았다. 서울 촌놈이 송탄 사람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았는데, 이만한 가격대에서 이만한 짬뽕을 먹어볼 곳이 또 있으려나?
곁들이로 나온 단무지와 양파까지 다 비우고 값을 치른 뒤, 다시 눈보라 투성이인 밖으로 나와 2차 목표 지점이 있는 신장쇼핑몰로 향했다. 개점해 있던 가게들에서는 모든 상인들이 가게 앞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는데, 길 한켠에 수북히 쌓아놓은 눈더미들의 모습에서 웬만한 양의 폭설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신장쇼몰(...)' 정문. 네온사인도 네온사인이지만, 같이 찍힌 눈발이 더 흠많무.
또 다시 눈 투성이가 되고 미끄러운 길에서 수 차례 넘어질 뻔하면서 가까스로 2차 목표 지점인 '미스진 햄버거' 에 당도했다. 이미 예전에 한 번 갔다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와 달리 가게 앞의 메뉴판의 가격이 녹색 테이프로 다 가려져 있었다. 요동치는 환율과 물가 때문이었을까? 다만 간혹 있을지 모르는 미군 손님들을 위한 간략한 영어 메뉴와 가격은 그대로 기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갔을 때는 1주일 중 월요일에 쉰다고 했었는데, 불경기라 그런지 어쨌는지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을 휴일로 한다고 했다(수~일 5일만 영업하는 셈).
그나마 다행인건, 가게 안의 메뉴판은 가격이 제대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빈루의 짬뽕으로 어느 정도 추위와 허기는 가신 상태였는데, 이왕 눈 속을 뚫고 온 김에 뽕을 뽑자는 쓸데없는 근성이 생겨서 칠리버거(3000\)와 칠리핫도그(3000\)를 주문했다.
...한 번 믿어보죠. 정말이죠?...
가게 앞의 포장마차 지붕이 눈의 무게 때문에 주저앉을까 걱정하는 모녀의 넋두리를 듣고 있자니 주문한 음식이 나와 있었다. 음료수는 예전처럼 캘리포니아 레모네이드로 정했고. 다만 '피클은 빼고 주세요' 라는 요구는 한 절반 정도만 받아들여졌는데, 덕분에 피클을 분리해내느라 손가락에 칠리를 묻혀가며 잠깐 고생해야 했다.
한 입씩 베어문 칠리버거와 칠리핫도그. 칠리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대충 찾아보기로는 고기 간 것과 콩에 미국 남부와 멕시코풍의 매운 소스와 향신료를 가해 만드는 요리라고 했다. 그래서 남부 출신 흑인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음식이라는데, 포장을 열자 마자 미국 요리에 익숙치 않은 이들이 소위 '겨드랑이 냄새' 라고 부르는 류의 향취가 코를 찔렀다.
다만 냄새에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는데, 문제는 진짜 입에 넣었을 때였다. 맵싸한 맛을 기대했지만 별로 맵지는 않고 오히려 꽤 강한 짠맛이 혀를 맹타했다. 대충 묘사해 보면 덜 매운 고추장에 간장을 더한 약간 괴이한 짠맛 정도? 아무튼 레모네이드의 신맛으로 입을 가셔가며 먹어도 좀 힘들었다.
칠리 메뉴에는 달걀이 일체 들어가지 않고, 칠리와 패티/소시지에 머스터드 양념한 양파가 들어가는 구성이었다. 아무튼 꽤나 강렬한 맛이었는데, 익숙해지기는 좀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일반적인 햄버거나 핫도그 메뉴가 한국인 입맛에 맞을 것 같고.
마찬가지로 피클 빼면 깔끔히 비우고 값을 치렀는데,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움직이기가 좀 귀찮아졌다. 하지만 운동삼아 가게 앞의 포장마차 지붕에 수북히 쌓인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 에 잠깐 동참했는데, 포장마차는 알고 보니 저 미스진 햄버거의 분점 격인 노점이라고 했다. 눈이 많이 와서 포장마차 대신 건물 점포만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고.
눈이 계속 쌓이면서 그 무게에 얼어버렸는지 깨끗하게 치워지지를 않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올지 모를 상태였다. 아무튼 대충 눈더미를 떨궈낸 뒤 다시 송탄역으로 향했다.
쌓인 눈의 두께는 어디에서든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무료정보지 가판대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집어넣으니 아랫팔뚝의 절반이 쑥 들어갈 정도였는데, 송탄에서 이 정도로 눈이 심하게 내린 적은 없었다고 운을 떼는 주민들이나 상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송탄역에서 올라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꽤나 지루했는데, 원래 배차 간격이 뜸한 곳인 데다가 폭설 때문에 전동열차의 운행이 계속 지연크리를 먹는 것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역무원이나 환경미화원들도 교대로 플랫폼에 나와 눈을 치우고 있었는데, 눈을 치워도 아래 짤방처럼 중간 선로로 고속주행하는 열차들이 날려대는 엄청난 눈발에 허사가 되는 일이 많았다.
열차들의 지연은 눈보라로 인한 서행 운전 보다는 출입문 고장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는데, 내가 탄 열차도 마찬가지였다.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부터 세 번째 칸 전동차의 두 번째 출입문이 고장이 나서 열리지 않고 있었는데, 수 차례 역무원과 차장이 점검을 하고 비상 조치를 취해도 여전한 상태여서 각 역에 정차할 때마다 계속 안내 방송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 명절마저 폭설과 한파로 뒤덮이는 상황과 현재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황이 괜히 오버랩되고 있었는데, 2009년도 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는 자연의 준엄한 계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