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협주곡이라는 장르 자체는 그렇게 드물거나 생경한 것이 아님에도,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는 경우는 꽤 드문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딱 한 번 들은 것이 고작인데, 이번 교향악축제에서 제주도향이 라이네케의 하프 협주곡-이 시리즈 초반에 다룬 바 있음-을 공연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 중이다.
관현악과 협연시킬 때의 하프는 음량 면에서 항상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데, 대규모 관현악과 협주시킬 때는 관현악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하프 소리가 아예 묻혀 들리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인지 많은 하프 협주곡들의 관현악 편성은 2관편성이라는 표준 혹은 그보다 작은 실내 관현악이나 현악 합주 등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라인홀트 글리에르(Reinhold Glière, 1875-1956)의 경우에는 예전에 이 시리즈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이라는 꽤 생경스런 컨셉의 곡을 다룬 바 있었는데, 인성 외에도 호른이나 하프 등 협주곡 영역에서는 비교적 변방인 악기들을 독주로 사용해 많은 호르니스트들이나 하피스트들의 도전 과제로 자리잡고 있다.
글리에르의 하프 협주곡은 1938년에 작곡됐는데, 그가 남긴 협주곡 중 최초의 것이다. 흔히 자주 선택되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첼로가 아닌 하프를 택한 것이 꽤나 특이한데, 러시아/소련 작곡가들 중 하프 협주곡이라는 장르에서 곡을 남긴 이들이 거의 없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곡을 쓰면서 글리에르는 하피스트인 제냐 에르델(Xenia Erdel)에게 지속적으로 자문을 구했는데, 글리에르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단순한 조언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련 국립음악 출판사에서 악보를 출간할 때 공동 작곡가로 등록하려고 했지만, 에르델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저 '편집자' 로만 등록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초연은 작곡된 해의 11월 23일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되었고, 독주는 당연히 에르델이 맡았다. 이 곡은 2차대전 후 서방에도 소개되었고, 소위 '소련 3인방' 이라는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의 작품 만큼은 아니었지만 하피스트들의 인기를 얻은 작품이 되었다. 글리에르는 이후에도 에르델과 계속 친교를 나누었고, 1947년에는 '하프를 위한 즉흥곡' 이라는 독주곡을 써서 헌정하기도 했다.
실제 연주자와 의논하면서 쓴 곡인 만큼 독주 파트는 해당 악기에 가장 적합한 어법과 기교로 쓰였는데, 하프 주법의 백미라는 아르페지오나 글리산도 스케일이 무척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곡이 하피스트들에게 연주하기 쉬운 곡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글리에르의 협주곡들은 해당 독주 악기 혹은 독창자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기교나 체력을 요하는 것으로 악명높다.)
그리고 스스로를 러시아 낭만주의의 적자로 여긴 보수적인 인물의 작품인 만큼, 곡 자체는 후기 낭만 어법에서 거의 벗어나는 일이 없다. 다만 악장 구성으로 봤을 때 좀 특이한 컨셉을 취하고 있는데, 1악장은 보통 속도인 모데라토를 취해 그렇게 빠르지 않은 템포에 러시아 식의 서정성을 녹여내고 있다. (특히 악장 서두에서 관현악의 배경을 뒤로 하고 아르페지오 화음 연주로 당당하게 주제를 제시하는 하프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협주곡에서 대개 느리고 서정적인 역할을 하는 2악장의 경우에는 변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아마 피아노 협주곡 제 1번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던 글라주노프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 같다. 전 악장 중에서 가장 길고 또 '변덕이 죽끓듯 하는' 드라마틱한 대목인데, 그렇다고 해서 관현악이 하프를 잡아먹는 일은 없다.
통상적인 해피 엔딩 역할을 하는 3악장은 러시아 민속 춤곡의 경쾌한 냄새도 풍기면서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 가 요구하는 통속성과 낙관주의를 꽤 명확하게 제시하는데, 정권 입장에서는 모더니즘에 발을 담궈 속을 썩이던 인물들보다는 훨씬 더 받아들이기 쉬운 음악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소개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이 곡의 관현악 편성도 그리 크지 않게 짜여져 있다. 2관 편성의 목관에 금관악기는 부드러운 음색의 호른 세 대가 전부고, 타악기는 팀파니와 트라이앵글만 쓰고 있다. (트라이앵글의 중용은 라이네케의 곡에서도 보이는 아이디어다.)
워낙 통속적이고 낭만적인 곡이기는 하지만, 음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아직 구입한 것은 없고, 역시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의 음원 세 종류로 듣고 있다;
1. 카트리느 미셸(Catherine Michel)/룩셈부르크 방송 관현악단/루이 드 프로망(Louis de Froment) (복스. CD 번호 CD3X-3019)
2. 앨리스 질스(Alice Giles)/애들레이드 교향악단/데이비드 포셀라인(David Porcelijn) (ABC 클래식스. CD 번호 ABC454506-2)
3. 레이첼 마스터즈(Rachel Masters)/시티 오브 런던 신포니아/리처드 히콕스(Richard Hickox) (샨도스. CD 번호 CHAN9094)
세 가지 중 가장 즐겨듣는 음원은 마지막인 샨도스반인데, 하프 특유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좀 더 또렷하고 강인한 소리를 들려주는 독주가 호감이 간다. 좀 더 부드러운 연주를 원한다면 2번의 ABC(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협회) CD도 괜찮고. 1번의 경우 여타 복스 음원들과 마찬가지로 녹음 시기가 좀 된 음원이라 음질이 약간 흐릿한 편인데, CD 세 장 박스가 음원이라 웬만한 하프 협주곡들과 독주곡들이 듬뿍 커플링되어 있다는 장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