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2010) 이전까지 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벤트에 가본 적은 세 번이었는데, 2002년에 개막/폐막 연주회 보러간 것과 2004년에 윤이상의 오페라 '유령의 사랑' 의 아시아 초연 무대를 보러 간 정도였다. 그나마 그 때까지만 해도 사진 박는 취미는 없었던 터라, 글로만 기록해 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자금난 때문에 공연 하나만을 예매했을 뿐이었지만, 구리디 구린 화질의 폰카나마 지참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찍을 만한 것이 보이는 족족 찍어댔다. 올해 유학 예정인 나로서는 언제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글 외에도 분명히 남기고 싶은 기억이 물론 있었고.
서울고속터미널에서도 통영가는 버스는 물론 있었지만, 그 새 버스비가 꽤 껑충 뛰어올라 있어서 다른 터미널을 찾다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약 20~30분 정도 더 걸리기는 하지만 한결 싼 노선이 있어서 그걸로 왔다갔다 하기로 했다. (게다가 우등과 일반의 요금 차이도 전혀 없다!)
월요일과 수요일에 독일어학원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월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화요일 밤차로 돌아와 몇 시간만 눈붙이고 다시 학원에 간다는 꽤 하드코어한 일정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일단 네 번째이자 6년만에 다시 찾아가는 만큼 기대감이 훨씬 컸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찌푸둥하게 흐린 정도였는데, 양재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로 들어가서부터 꽤 거센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통영 쪽 일기예보를 체크했을 때도 월요일이고 화요일이고 종일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미리 가져가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날씨 좋을 때 가는 것이 좀 더 흥이 날 수밖에 없었던 지라.
중간 기착지로 고성을 잠시 거친 뒤, 예정 시간대로 오후 5시 40분에 통영종합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이 완전히 새로 지어진 모습이라 꽤 놀랐는데, 그 주변도 아직 한창 공사/개발중이었지만 이마트를 비롯한 대형 할인점과 20층 이상의 고층아파트들이 삐쭉삐쭉 솟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공연은 화요일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통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먹거리를 찾아 서호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하지만 그 시간대임에도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는데, 미리 찍어둔 두 군데는 이미 철시한 상태였다. 다음 날 오전에 가보기로 기약하고 그 때까지 열려있다는 한일김밥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배를 타본 적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해수욕장 가본 경험도 마찬가지지만 이상하게 바다를 보면 뭔가 야릇하고 달관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어선과 기타 선박들로 가득한 항구의 바다라는 점에서 지극히 인공적인 모양새지만, 비릿한 냄새와 함께 사람 사는 터전이라는 인상을 받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고.
통영국제음악제의 공연 대부분이 개최되는 통영시민문화회관이 건너편에 보인다. 물론 프린지 공연을 비롯한 소규모 공연도 도천동의 페스티벌 하우스에서 여전히 열리고 있었고, 그 근처에 새로 개장한 도천테마공원에서도 몇 차례의 공연이 기획되는 등 문화공간이 조금씩 확충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둣가의 도로를 따라 걷다가 어렵잖게 찾은 한일김밥 본점. 서호시장 쪽에서부터 충무김밥집이 쫙 늘어서 있었지만, 예전에 왔을 때 먹어보고 '삘 꽂힌' 곳은 여기였다. 하지만 여기도 앉아서 먹는 공간이 없었던 오래된 단층 건물을 쓰던 시절에서 이미 탈피한 모습이었다. 1층 뿐 아니라 2층에서도 먹을 수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오랫동안 죽치고 앉아있을 일은 없어서 1층의 카운터 맞은편 독대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김밥 1인분(4000\). 밥만 말아놓은 김밥, 젓갈 맛이 강하게 나는 숭덩숭덩 썰어놓은 무김치, 어묵이 섞인 오징어무침 삼위일체는 여전했다. 다만 점포에서 먹을 때만 맛볼 수 있다는 시락국(시래기국)은 처음 맛보는 품목이었다. 사실 얼핏 보면 그냥 아무 한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시래기 된장국과 다를 바 없지만, 시래기 외에 다른 푸성귀는 넣지 않고 멸치-사투리로는 '띠포리' 라고 함-로 우린 국물맛은 이 쪽만의 특징인 듯.
차려진 음식들을 깔끔히 비우고도 아직 잘 시간은 몇 시간 더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별 목적도 없이 이곳저곳 걸어다녔다. 외곽으로 꾸준히 확장되고 있는 도시지만, 항구 쪽은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특별히 지도나 버스편을 이용하지 않고도 아무 곳이나 걸어다녀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어두웠던 만큼, 사진을 찍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특별히 밝은 곳이 아니면 찍지도 않았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이번에도 왔다갔다 해본 해저터널 내부. 양쪽 입구를 2색 네온등으로 치장해 놓아서 오래된 구조물에 나름대로 사이킥한(???) 효과를 더한 모습이었는데, 다만 점멸식이라 등이 다 꺼지면 너무 어두워서 자칫하면 마주오던 사람과 부딪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터널 구조는 들어가는 부분과 나오는 부분이 내리막/오르막으로 된 V자 형태인데, 가장 많이 내려간 부분에는 이렇게 관광객들을 위한 자료들이 인쇄된 홍보물을 쭉 배치하고 있다. 제일 주의깊게 본 것은 첫 번째 짤방의 공사 당시 사진들. 물론 통영 출신 예술인들이나 통영국제음악제에 대한 홍보도 하고 있었는데, '토지' 의 작가 박경리도 통영 출신이라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요즘은 원체 소설을 안읽으니...OTL
미륵도 쪽을 잠시 돌아본 뒤 다시 터널로 건너와서 소위 '윤이상 거리' 를 거닐다가 도천테마공원을 발견했다. 프린지 공연도 없고 통영 시내 학생들이 피아노를 치며 놀고 있는 한적한 모습이었는데,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 상태는 매우 깨끗했다. 공연 등 행사용 공간과 전시용/사무용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짤방은 들어가서 본 전시 공간. 윤이상의 작품이 담긴 음반들과 관련 서적 몇 가지가 유리 진열장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진열품 중에 가장 눈여겨본 것은 칸타타 '사선에서' 와 '현자', 그리고 오보에 독주곡인 '피리' 세 곡이 수록된 LP였다. 칸타타 두 곡은 한 동안 이 LP 외에는 음반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 LP의 실물 커버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당 LP를 복각한 국제 윤이상 협회의 CD에 대한 포스팅은 여기)
그렇게 걸어다니고도 시간이 좀 더 남아서 PC방에서 잠깐 죽치고 있다가 숙박 장소로 예정했던 모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요금은 8000원이었는데, 다만 어르신들의 코골이와 이갈이 합주가 꽤 심한 편이었다(...). 그리고 한켠에는 마치 만화방 마냥 온갖 만화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꽂이도 눈에 띄었는데, 정 잠 못자겠으면 만화 삼매경에나 빠질까 했을 정도.
물론 푹 자둬야 내일 일정을 차질없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했고, 이리저리 잘 곳을 찾아다니다가 6층의 수면실로 올라갔다. 난방이 거의 안되는 탓에 나밖에 없었지만, 이불을 몇 겹이고 뒤집어쓰고 자면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어서 잠자리로 삼았다.
하지만 새벽 4시 17분에 갑자기 오한을 느껴서 퍼뜩 깨버렸는데, 그 뒤로는 추워서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4층으로 내려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던 황토방과 남자 수면실을 전전하며 새우잠을 자야 했다. 숙면과는 한참 거리가 먼 셈이었는데, 귀마개라도 준비해 갔다면 한결 나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아무튼 예정대로 여덟 시에 일어나 찜질방을 빠져나왔고, 다음 일정들을 차례대로 진행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