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샘밭막국수 본점 방문기에서는 춘천 시내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을 골랐다가 돌아올 때 버스편 때문에 개발리는 수모를 당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막국수 잘하는 곳이 또 있다고 해서 1월 중순 경춘선 열차에 한 번 더 몸을 실었다. 이번에도 어떻게 시간이 맞았는지 급행을 타고 갔다.
다만 이번엔 좀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내가 탔던 칸의 좌석들에는 보통 경춘선 전동차 안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어르신 분들이 아닌 전투복 차림의 병사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인솔자인 병장 빼고는 전부 더블백을 하나씩 지참한 부대 마크도 달지 않은 이등병들이라서, 아마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가거나 교육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으러 가는 신병들로 여겨졌다.
복선 전철 개통으로 경춘선에서 군 전세 객차로 대여할 수 있던 무궁화호가 사라지자 이렇게 전철 편으로 이동하게 된 것 같았는데, 병사들은 각각 퇴계원역과 춘천역에서 간부들의 인솔을 받으며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남춘천역에서 내렸지만, 아직 병사들 한 무리가 있었으니 나머지 인원들은 종착역인 춘천역에서 내렸겠지.
아무튼 남춘천역에서 찻길을 가로지른 육교로 연결된 3번출구로 나갔다. 가려던 가게는 거기서 서울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걸어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뛰어난 접근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전동차 안에서도 차창 밖으로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도중에 나오는 주유소를 지나서,
계속 걷다 보면 하얀 바탕에 빨간색으로 표기한 가게 간판을 볼 수 있다. 이 날 목표 지점인 '퇴계막국수' 다.
가게 건물에 붙어 있는 창고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제분소라고 간판이 걸려 있는데,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간판 설명이 맞다면 요리에 쓰이는 메밀가루를 만드는 곳이겠고.
가게 앞 모습. 간판에 원조니 뭐니 하는 수식어 없이 단순하게 가게 이름만 강조한 것으로 봐서는, 여기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막국수에 대해 긍지가 있는 집으로 여겨졌다.
어중간한 시간이었음에도 가게 안에서는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저마다 막국수며 메밀칼국수, 감자옹심이 등을 들고 있었다. 식사 공간은 무조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온돌마루로 되어 있었다.
메뉴는 이렇다. 샘밭막국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쟁반막국수가 있었고, 술 종류에 대한 가격 표기가 좀 더 자세했다. 다만 편육에 국내산 돼지고기를 쓴다고 하는 샘밭 쪽과 달리, 여기서는 단가 문제인지 칠레산을 쓰고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아무튼 나는 그냥 막국수 곱배기 한 그릇만 먹으러 온 뜨내기였으니 크게 신경쓸 일은 없었고.
기본적인 테이블 셋팅. 취향에 따라 막국수에 넣어먹을 수 있도록 설탕이나 식초, 겨자, 간장 등이 비치된 것은 여느 집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냅킨은 특이하게 도자기 그릇에 차곡차곡 넣어놓고 있었다.
주문하고 나서 물병에 이어 받은 육수통과 배추김치 종지.육수는 살얼음이 둥둥 떠 있어서 꽤 차가웠다. 김치는 그냥 평범했고.
막국수 곱배기. 샘밭 쪽보다는 500원 가량 비싼 편이었지만, 춘천역이나 남춘천역에서 따로 버스 등을 타고 이동할 때 생기는 추가 비용을 따져 보면 큰 단점은 아니었다. 메밀면 상태는 두 집이 비슷해 보였지만, 쓰는 양념장이나 꾸미 면에서는 꽤 차이가 많았다. 깨는 통깨를 쓰고, 살짝 절인 무김치가 같이 얹혀 있었다. 양념장은 잘게 썬 양파를 많이 넣는 샘밭과 달리, 송송 썬 파를 많이 넣었고 좀 더 물기가 있었다.
아무튼 꾸미에 오이가 없었으니 안심하고 비비기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육수도 국자로 떠서 자박하게 넣어주고. 육수는 샘밭 것보다 더 차가웠던거 빼면 큰 차이는 없었는데, 양념장은 확실히 다른 맛을 냈다. 특히 약간 달착지근한 양파가 아닌, 파와 고춧가루가 더 많이 사용되어 그런지 좀 더 매운 맛이었다.
메밀국수 삶은 물인 면수 주전자는 막국수와 함께 나왔다. 기호에 따라 잘라먹도록 가위도 내왔지만, 애초에 냉면처럼 질긴 국수도 아니거니와 냉면도 안잘라 먹는 터라 쓸 일이 없었지만. 면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꽤 뜨거워서, 국수를 다 먹고 그릇을 헹궈 입가심할 때 마셨다.
샘밭에서 느낀 온갖 맛의 적절한 조화라는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름대로 매운 맛이 식욕을 자극해 깔끔하게 비워냈다. 국수 그릇 위에 보이는 몇 쪽 남은 김치도 면수를 들이키며 모두 비웠고, 신발을 다시 신고 돈을 지불한 뒤 남춘천역으로 돌아갔다.
여느 음식도 마찬가지겠지만, 막국수도 어느 원조집에서 시작한게 아니라 땅이 거칠어 농사짓기 힘들었던 산간지역 주민들이 메밀로 이것저것 만들어 먹다가 자연스레 파생된 음식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음식점들이 저마다 면이나 양념장, 육수, 꾸미 등에 나름대로의 비법이나 개성을 부여하고 있고.
다만 전국에 광범위하게 보급되다 못해 과포화 상태라는 닭갈비 보다는, 산간지역 특유의 생산물인 메밀을 산지 근처에서 가공해 내는 막국수 쪽이 좀 더 춘천색 강한 음식으로 여겨진다. 물론 닭갈비도 어딘가에서는 미원 떡칠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특한 조리법을 발휘해 잘 만드는 곳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춘천에 언제 또 갈 일이 있을 지 모르겠다. 복선 전철 개통 후 교통비가 꽤 많이 싸졌지만, 아무래도 서울에서 멀기는 먼 편이고 전철 이외의 교통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아 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