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문제의 CD를 회현지하상가의 한 중고음반점에서 기적적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시향의 정명훈 이전 시기 음반 중 적어도 세 종류를 보유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는데, 음질이나 연주에 상관없이 잊혀져 있던 물건들을 사들이는데 제대로 맛을 들여버렸다.
ⓟ 1989 SKC Ltd.
1987년에 서울음반에서 순수 관현악 레퍼토리로 첫 음반을 제작한 지 1년 4개월 만인 1989년 2월에 제작된 녹음인데, 녹음 전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서울음반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악단 상주 공연장이었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세션이 진행되었다. 지휘는 마찬가지로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정재동이 맡았고, 녹음한 곡목은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협주곡에서는 당시 중앙대 음대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피아니스트 이혜경이 협연했다고 되어 있다.
제작된 지 20년을 훌쩍 넘긴 CD라 '과연 아직도 상태가 괜찮으려나' 싶었는데, 일단 들어보니 하자는 없었다. 다만 뭔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촛점이 불분명한 녹음 상태가 걸렸는데, 아무래도 리모델링 전에 최악의 음향 상태를 자랑했던 세종문화회관이 세션 장소다 보니 그런게 아니었나 싶다.
첫 수록곡인 프랑크의 교향곡은 전체적으로 중후한 연주였는데, 다만 1악장 초반에서는 템포를 렌토가 아니라 라르고 정도로 심하게 떨어뜨린다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늘어지기로 악명높은 푸르트벵글러의 1953년 스튜디오 녹음보다 1분 가량이 더 느릴 정도. 재현부에서 연주되는 제2주제에서도 현과 관 사이에 조율 미비로 인한 맥놀이 현상이 일부 느껴지는 등 기능적인 면에서도 아쉬움을 주었다. 다만 2악장과 3악장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는데, 1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팀파니의 음향이 약간 튀게 느껴지고 금관의 볼륨이 작게 느껴지는 점은 여전했다.
두 번째 수록곡인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흐릿한 음향 상태 때문에 프랑크 교향곡보다 상대적으로 더 손해를 본 편인데, 1악장의 우울한 첫 주제 부분 등은 무난하게 지나갔지만 전개부 이후로는 극적인 대비감이 많이 약화되는 등 다소 밋밋한 연주로 들렸다. 게다가 이 협주곡 녹음에서는 유독 투티 부분에서 음이 약하게 찌그러지는 등 제작 상의 난점이 드러나고 있기도 했다.
나름대로 공을 들여 제작한 서울음반 LP의 속지에 비하면 이 CD의 속지는 당시의 여타 SKC 클래식 CD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양새였다. 연주 곡목과 곡 해설, 지휘자와 독주자, 악단 프로필이 전부인데, 물론 일본 로컬반처럼 우리 악단 킹왕짱 우리 녹음 캐본좌 식으로 신나게 자랑질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덜 부담스러웠다. 속지에 대한 불만이나 아쉬움 보다 녹음이나 연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지만.
정재동 지휘로 만든 두 장의 음반 외에 또 다른 한 장은 시판용으로 제작된 물건이 아닌데, 이것도 서울시향이 진통을 겪던 전환점에서 만들어진 녹음이라 나름대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물건에 대한 잡설은 다음 번에.
뱀다리: 이번에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한미 FTA 덕에, 지난 번 소개한 서울음반 LP 복각 음원은 금년 12월을 끝으로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한다. 기존 저작권법에서는 보호 대상이 아니었던 저작인접권이 FTA에 따라 부활하고 저작권 연한도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나는 미국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 셈인데, 덕분에 그 클래식 사이트는 꽤 울상인 것 같다. 팔고 있던 수많은 음원들 중 저작인접권 부활로 인해 절반 혹은 그 이상의 음원들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니까.
개인적으로 미국식 저작권법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라 이번 FTA 건에 대해서도 결코 좋게 보고 있지 않고, 그 사이트에서도 헌법 소원을 준비 중이라고 하지만 그리 쉽게 진행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을 떠나 디지털 음원으로도 도서관 자료로도 구할 수 없는 이런 음반의 경우에는 나처럼 발아프게 중고음반점 돌아다니며 구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들어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방면에서 어떻게든 음원 판매가 계속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저작권자와의 협의나 음반/음원 확보 등에 대한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