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소개한 정재동의 SKC CD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천의 모 중고음반 사이트를 통해 입수한 것이 이번에 소개할 CD인데, 공교롭게도 이 CD는 그 동안 서울시립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악단이 서울시 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체질 개선을 시도하던 시기의 녹음을 담고 있다.
1999년 당시 서울시향은 3년 전 퇴임한 원경수 이래로 계속 상임 지휘자가 공석인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IMF로 인한 구조조정에는 서울시향이 상주하던 세종문화회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 회관 측은 서울시 측의 재정 지원이 급감하자 재단법인화를 시도했고, 산하 시립 예술단도 대부분 시립에서 '립' 자를 떼버리고 개편 준비를 진행했다.
하지만 서울시향의 경우 일단 상임 지휘자 혹은 그에 준하는 직책의 지휘자가 있어야 제대로 재편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회관 측에서는 정치용을 단장 대행 겸 지휘자라는 직책으로 초빙했다. 당초 정치용의 계약은 1999년 12월 까지로 불과 4개월의 단기 계약이었지만, 이후 일이 잘 풀렸는지 계약을 연장하고 직책도 단장 대행에서 단장으로 한 단계 올라갔다.
이듬해에는 상임 지휘자로 창단 이래 처음 외국인인 러시아 출신의 마르크 에름레르를 초빙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일은 잘 풀리나 싶었다. 하지만 법인화 이래로 악단은 계속 만성적인 적자와 단원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정치용은 기존 단원에 대한 재임용 오디션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오디션 소식이 큰 화근이 되었다.
이 당시 정치용과 악단, 세종문화회관 사이의 갈등 양상에 대해서 이상하게 주류 언론은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던 탓에 정확한 정황을 알기 힘들지만, 이런저런 음악잡지나 예술잡지의 당시 기사와 칼럼 등을 보면 분명히 이 오디션을 통해 그 동안 간신히 억눌러온 서로의 갈등이 폭발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정치용은 2001년에 단장 직책을 내놓고 물러났는데, 사실상 불명예 퇴진이었다.
물론 지금도 정치용의 프로필에는 1999~2001년 동안 서울시향의 단장 겸 지휘자를 역임했다고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뒤로 정치용이 서울시향을 객원으로 지휘했다는 소식은 전혀 들어본 바가 없다. 분명 둘 사이에 뭔가 아직 안좋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양측 모두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듯 해서 진실은 저 너머에.
정치용 퇴임 이후에도 이듬해 마르크 에름레르의 돌연사, 후임으로 들어온 곽승과 세종문화회관 사이의 갈등 등 악단에 위기 상황을 불러오는 여러 악재가 이어졌다. 그나마 정명훈을 불러오고 세종문화회관 측으로부터 악단이 독립하면서 기존 명칭인 서울시립교향악단을 되찾고 나서야 혼란이 진정될 수 있었다.
서울시 교향악단 시절 악단은 부족한 재정 지원을 충당하기 위해 대중적인 형태의 공연을 많이 개최했는데, 그 중에는 예술의 전당의 기획으로 유명 독주자들을 초빙해 협주곡만을 연주하는 컨셉의 공연들도 있었다. 이 공연에는 서울시향 외에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다른 악단도 참가했는데, 특이하게 이 공연은 예술의 전당 측에서 직접 실황의 일부를 CD로 제작해 입장권을 소지한 관람객들이 희망하면 배포하는 식으로 홍보를 진행했다.
물론 상업용 시판품도 아니고 찍어낸 양도 한계가 있던 만큼 이 CD들을 지금 와서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CD도 구글링하다가 우연히 찾아서 귀국 직후 지른 것이었고, 김대진이 박은성 지휘의 코리안 심포니와 같은 공연 시리즈에서 협연한 CD도 등재는 되어 있었지만 품절된 상태였다.
정치용 지휘로 열린 공연은 2001년 9월 28일에 있었는데,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이 차례로 연주되었다. 협연은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과 첼리스트 송영훈이 맡았고, 일반 공연과 달리 협주곡 사이사이에 쉬는 시간을 넣어 독주자들의 빠른 피로 회복을 꾀했다고 한다. (이 공연에 대한 웹상의 홍보 페이지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보려면 클릭)
ⓟ 2001 Seoul Arts Center
공연 후 12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만든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위 CD에는 수록 시간 문제로 브루흐와 드보르자크 협주곡 두 곡만 실렸는데, 물론 공연 당일의 실황만으로 제작한 만큼 이런저런 실수와 어긋남이 곳곳에 눈에 띈다. 녹음도 전체적으로는 깨끗한 편이지만, KBS 1FM의 실황 중계 때도 느끼는 것처럼 마이크를 너무 악단과 독주자에게 가까이 들이대고 녹음해 잔향이 팍 죽어버린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렇기는 해도 드물디 드문 당시 한국 관현악단들의 연주 음원 중 하나를 챙겼다는 점에서는 만족했고, CD 시장이 사양길을 향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도 앞으로 이러한 기획이 있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값어치는 할 듯 보인다.
이외에도 귀국 후 수소문해 구한 한국 관현악단 연주의 CD와 LP가 몇 종류 더 있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주절대고 싶다. 특히 LP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도 레어템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