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윤이상의 동상. 시내에서 반대 시위를 하는 것이 목격되기는 했지만, 아직 관련 명소들에서 대놓고 반달리즘이 저질러질 만큼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기념공원 내의 전시실은 규모만 따지면 별로 크지 않았고, 윤씨 가문의 족보나 생가의 가구, 윤이상 가족이 쓰던 요강(...) 같은 뭔가 핀트가 안맞는 물품까지 전시되어 있어서 괴상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홍보 부족인지 내가 갔을 때는 관람객이 나 혼자 뿐일 정도로 한산했는데, 다만 관람을 끝내고 나와 보니 인근 여고 혹은 여중에서 단체 관람을 왔는지 갑자기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몇몇 전시물이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전시실 구성 자체는 꽤 괜찮았다. 윤이상이 생전에 썼다는 바이올린과 첼로, 자필 악보와 곡에 대한 한국어/독일어 자필 설명, 에세이 원고, 윤이상 작품이 연주된 세계 각지 음악회의 프로그램 노트, 한국/독일 여권과 유학 당시 지니고 있었다는 한국 돈과 태극기, 이후 독일에 정주하면서 사용한 녹음기와 사진기, 양복과 모자, 지팡이 등의 개인 소지품, 괴테 메달과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등 각종 상훈과 데드마스크, 그리고 생전에 사용하던 작업실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물론 전시물 훼손의 염려도 있고 해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전시품은 없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프로그램 노트를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좀 아쉬웠다. 당시 전시실 내에는 관리하는 직원도 없었고 사진 찍지 말라는 경고문도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알 수 없어서 결국 내부에서 찍어온 것은 없었다.
전시실 바깥에도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시물이 추가되어 있었다. 특히 기념공원 건물과 사무국 사이의 자그마한 창고 모양의 건물에 차 한대가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좀 오래되어 보이는 연식의 벤츠 승용차였는데, 붙어 있는 설명을 보니 윤이상이 1982년 10월 부터 타계 직전까지 사용한 승용차라고 되어 있었다. 같이 붙어 있는 사진들에 나온 다른 차량들도 벤츠였던 것을 보면 윤이상은 생전에 벤츠 애호가였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런저런 전시물들을 돌아본 뒤 1층 로비로 가봤는데, 음악제 10주년을 맞아 나온 달력과 청소년용 윤이상 전기 등의 책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달력이나 책은 아무래도 좋았고, 특히 책을 사면 같이 준다는 CD에 갑자기 눈길이 갔다.
CD들은 경남국제음악콩쿨(2009년부터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쿨로 개칭)과 통영국제음악제 관련 실황을 담고 있는 비매품들이었는데, 특히 콩쿨 관련 CD 두 종류는 이전 포스팅에서 했던 내 추측이 빗나갔음을 입증하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청소년일 나이는 한참 지났고 그보다 훨씬 전문적인 비평서까지 갖고 있는 데다가, 종이 달력도 별로 쓰지 않는 입장에서는 굳이 저것들을 구입하느니 차라리 같은 돈을 내고 CD만 가져가는게 나아 보였다.
그래서 판매 담당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면서 CD만 사갈 수 없는지 물어봤는데, '달력은 그다지 무겁지 않고 선물용으로도 쓸 수 있으니 달력을 구입하고 CD를 받아가는게 좋을 것 같다' 는 희망적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달력 세 종류를 사고 CD 세 종류를 같이 받아왔다.
1. 현을 위한 융단 (현악 합주 연주)
앙상블 TIMF/최우정
2006.8.26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에서 만나는 2006 통영국제음악제 'TIMF앙상블 아카데미' 공연 중에서)
2. 환상적 단편 (플루트+바이올린+첼로 3중주 연주)
이지영(플루트)/정호진(바이올린)/오주은(첼로)
2005.12.28 서울 영산아트홀 ('TIMF앙상블 한국 작곡가의 밤' 공연 중에서)
3.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
허철(첼로)/정선인(피아노)
2005.11.12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TIMF앙상블 윤이상 10주기 음악회' 중에서)
4. 클라리넷, 바순, 호른과 현악5중주를 위한 8중주
앙상블 TIMF/최우정
('노래' 와 동일)
수록 시간이 44분 조금 넘는 정도고 수록곡 중에 세 곡의 음원을 이미 갖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노래' 의 경우 음반으로는 처음 접하는 곡이라 소장 가치가 충분했다. 저 곡에는 나름대로 기구한 사연이 있는데, 1964년에 박정희의 방독 때 축하연에서 연주하게 곡을 써달라는 위촉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급히 작곡되었다고 한다.
윤이상 자신은 별로 내키지 않은 자리를 위해 억지로 쓴 곡이라 이후 파기하려고 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한국으로 납치되면서 결국 악보는 독일 집에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이를 발견한 독일 연주자들이 윤이상이 한국에서 억류중일 때 계속 연주하는 바람에, 결국 작품 목록에 공식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각기 다른 공연에서 실황으로 녹음한 탓에 음질이 고르지 못하고, 당연히 무편집이라 약간 어색한 대목도 없지는 않지만 아직 발전 가능성이 있는 단체고 이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음반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물건이다.
CD들을 입수할 때 직원에게 '콩쿨 때마다 계속 이렇게 CD가 나오는가' 라고 물어봤는데, 일단 예선부터 결선까지 계속 실황이 녹음되고 있고 거기서 선별해 계속 발매가 되고 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연주자나 관계자에게 선물 형식으로 증정하는 비매품이라 물량이 충분치 못하고, 지금 이렇게 비매품으로 증정할 수 있는 것도 두 종류 뿐이라고 했다.
2010년에 치러진 피아노 부문 콩쿨 때 만들어진 음반인데, 다만 녹음은 2010년 콩쿨이 아닌 2년 전인 2008년에 마찬가지로 피아노 부문 콩쿨이 열렸을 때 결선에 진출한 다섯 명의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 실황을 담고 있다. 등수 순으로 해서 CD 세 장에 수록된 곡들을 늘어놓아 보면 이렇다.
CD 1
1위: 소피아 굴랴크 (Sofya Gulyak, 러시아)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2위: 스타니슬라프 흐리스텐코(Stanislav Khristenko, 러시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
CD 2
3위: 마리안젤라 바카텔로 (Mariangela Vacatello, 이탈리아)
피아노 협주곡 3번 (프로코피에프)
4위: 윤홍천 (한국)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CD 3
5위: 크리스토퍼 구스만 (Christopher Guzman, 미국)
피아노 협주곡 1번 (브람스)
모든 곡들이 생략 없이 다 담겨 있고, 특히 브람스 협주곡은 세 명이 결선에서 선택한 덕에 국내 관현악단이 협연한 같은 곡의 연주가 세 개나 되는 또 다른 희귀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관현악은 앙상블 TIMF가 맡았는데, 앙상블 모데른이나 클랑포룸 빈 같은 악단 처럼 연주곡에 따라 인원을 자유롭게 가감해 편성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휘는 피아노 콩쿨이라 그랬는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대욱이 맡았다고 되어 있다.
CD 속지에 따르면 녹음 일자가 2008년 11월 8일 하루로 되어 있는데, 이게 맞다면 무려 세 시간 넘게 진행된 '공연' 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케스트라도 몇몇 곡에서는 연주 후반인지 좀 지쳤는지 합주력이 흐트러지는 기색도 보이고 피아니스트들의 미스터치 등도 종종 들리고 있다. 편하게 듣기에는 좀 무리겠지만, 결선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다.
두 장짜리 CD로 되어 있는 이 음반도 2011년에 있었던 바이올린 부문 콩쿨에 즈음해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보다 4년 전인 2007년에 열린 콩쿨의 실황을 담고 있다. 다만 결선의 협주 작품 연주에 몰빵한 2003년과 2008년 음반과 달리, 이 음반은 결선 외의 실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분명히 2007년 11월 3일에 열린 결선에서 연주되었을 협주곡 한 곡을 빼면 어느 곡이 예선이나 본선에서 연주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일단 수록 순서대로 보면 이렇다.
CD 1
1위: 하이크 카자지안 (Haik Kazazyan, 아르메니아)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콥스키)
3위: 김재영 (한국)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브람스)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비' 중 첫 번째 곡 (윤이상)
4위: 서민정 (한국)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비' 중 두 번째 곡 (윤이상)
CD 2
2위: 솔렌 파이다시 (Solenne Païdassi, 프랑스)
바이올린 소나타 6번 (베토벤)
4위: 서민정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중 아다지오와 푸가 (바흐)
5위: 안드레이 바라노프 (Andrey Baranov, 러시아)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 (바흐)
2위: 솔렌 파이다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기상곡 중 마지막 곡 (파가니니)
5위: 안드레이 바라노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 '리나가 정원에서' 중 마지막 곡 '작은 새' (윤이상)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무반주로 연주된 곡들은 예선에서, 피아노 반주가 붙은 소나타의 연주는 본선에서 녹음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피아노와 협연하는 연주곡들은 누가 피아노를 맡았는지 표기되지 않았고, 결선 협주곡만 김홍재가 지휘한 앙상블 TIMF가 협연했다고 나와 있다.
반주자 표기가 없는 것 외에도, 협주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녹음에 문제가 있었는지 음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 고음역이나 강음에서 여지없이 찌그러지거나 메마르고 건조한 소리의 연속이라 그냥 듣기도 좀 힘들 정도.
이래저래 아쉽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유일하게 국제콩쿨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이 경연의 실황 음반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사무국에도 재고가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중고로 내놓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이 체류 기간 동안에는 여관에서 묵는 호강(!)을 누린 것 외에 나름대로 이 곳에서 유명하다는 별미들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꿀빵이나 시락국, 우짜, 빼떼기죽 같이 예전에 먹은 것도 있지만, 처음 맛본 것도 있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