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이후 한 사람의 지휘자가 20년 넘게 관현악단의 수장 역할을 하는 것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 이런 기록을 세운 지휘자는 정말 드문데, 1989년 이래 2012년 현재까지 23년 동안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는 임헌정도 그 기록 보유자에 속한다.
20주년 때는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음악 감독 부임 15주년 때인 2004년에는 기념 음악회가 열리고 그 실황으로 CD까지 제작된 바 있었다. 다만 부천 필의 많은 CD들과 마찬가지로 그 물건도 비매품 한정판이었고, 시중 구매도 당연히 불가능했으니 결국은 중고음반점 등을 전전하며 이리저리 뒤적거려야 한두 장 나올까 말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발견한 곳은 세종대 관현악단 CD 포스팅 때 언급한 아름다운가게 헌책방 강남점이었는데,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여느 CD들과 마찬가지로 가격도 겨우 2000원이라 부담 없이 사올 수 있었다. 클래식은 아니지만, 예전에 테이프로만 샀던 드럭의 아워 네이션 2집도 1500원이라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고.
ⓟ 2004(?) Bucheon Philharmonic Orchestra
위에 쓴 대로 2004년 7월 27일에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음악 감독 부임 15주년 심포닉 콘서트의 실황을 담고 있는데,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17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슈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이 프로그램 구성은 1987년 5월 1일에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 연주로 개최된 베를린 시 750주년 기념 연주회와 완전히 똑같아서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부천 필의 비매품 CD로는 2002년에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의 실황을 담은 음반에 이어 두 번째로 입수한 CD였고, 그 때문에 꽤 기대를 하고 들었다. 물론 당일치기 실황 녹음의 특성상 연주가 매우 최상급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깔끔한 녹음 상태와 더불어 감상용으로는 그런 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다만 녹음 상태나 연주 상태에 비해 이 음반에서는 두 군데 옥의 티가 있어서 좀 아쉬웠다.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17번 K.334(320b)는 '디베르티멘토' 나 '세레나데' 같은 비교적 가벼운 느낌의 어감으로 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대규모인데, 여섯 개 악장 모두를 연주할 경우 연주 시간이 50분을 넘겨버린다. 이 때문에 이 곡을 연주할 때는 종종 5악장을 빼고 다섯 개 악장만 연주하곤 한다. 위에 언급한 카라얀의 연주회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연주되었는데, 부천필 CD 커버 뒷면에는 다섯 개 악장만 있는 것처럼 표기되어 있다.
그나마 김문경이 집필한 해설에는 이 생략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만, 기왕이면 트랙 리스트도 거기에 맞춰서 편집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고, 가장 큰 문제는 슈트라우스 교향시에서 드러났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는지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 모두 연주 전의 박수까지 삽입되어 있는 것은 그런대로 좋았지만, 슈트라우스의 경우 편집이 굉장히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박수 소리가 끝나자마자 음악이 시작되는데, 그것도 콘트라바순과 베이스드럼, 오르간 페달, 콘트라베이스만으로 조용하게 시작되는 첫 네 마디가 날아간 채로 트럼펫의 도입부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날 연주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저 네 마디를 빼먹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박수 소리가 나오는 중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고. 모차르트야 애교로 넘어가 준다고 해도, 이렇게 음악의 일부를 날려먹은 편집에 대해서는 확실히 까고 싶다. 아무리 비매품이라도 말이지.
슈트라우스의 발편집 때문에 흥이 깨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해서 비매품 음반 두 종류를 갖게 되었으니 나머지 부천필 비매품 음반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08년에 열린 부천필 창단 20주년 기념 음악회의 말러 교향곡 4번 연주를 담은 것과 1995년과 2002년에 발매된 두 종류의 관현악 소품집 세 종류의 CD에 관심이 있는데, 물론 이것도 부천필 사무국에서 여유분이 없다고 하면 결국은 중고음반점 뒤지기 밖에는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이외에 정식 출반물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한국의 두 원로 지휘자가 출연한 음악회의 실황을 담은 DVD 두 종류를 지인으로부터 입수해서 볼 수 있었다. 이것도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