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기는 하지만, 혼자 밥먹는 경우가 많은 내게 있어서 좀처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은게 족발과 보쌈, 치킨, 피자 네 가지다. 이들 메뉴는 아무리 소짜 혹은 반마리를 주문한다고 해도 금전 부담이 그리 녹녹치 않은데, 이번에도 그 부담이 그리 작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식사 메뉴라는 개념의 보쌈을 먹을 수 있었던 탓에 끄적여 본다.
방산분식이 있는 방산시장에서 큰길을 끼고 동쪽 편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단 부대 옆의 자그마한 식당인데, 예전부터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쌈 하면 떠오르는 그 가격과 혼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물론 보쌈백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다음에는 조금씩 가고 싶다는 '의지' 를 내기 시작했다.
가게 앞에는 이렇게 '원식당' 이라고 적힌 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게 가게 이름은 아니다.
장수보쌈이라고 간판에 씌여있는 것이 제대로 된 명칭 같은데, 저 상호의 식당이 꽤 많고 개중에는 프랜차이즈 영업까지 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근원 원(原)이나 으뜸 원(元)이라는 뜻의 원 자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 맨 왼쪽과 맨 오른쪽의 보쌈을 제외하면 그냥 일반 밥집 메뉴와 다를 바 없고,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만 1층 외에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는 2층도 식사 공간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입소문이 많이 난 집같아 보였다.
일단 4000~5000원대의 메뉴들이 많기는 했지만, 애초에 보쌈이라고 달아놓은 가게였던 만큼 가격 부담을 감수하고 보쌈백반(9500\)을 주문했다.
차려진 보쌈백반 한 상. 반찬 갯수가 좀 부족해 보이는데, 사실 오이소박이가 나왔지만 오이 못먹는다고 빼달라고 해서 하나가 빠진 것이다. 따라나온 국은 맑은 콩나물국. 하지만 반찬이나 국보다 중요한 것이 고기와 보쌈김치였는데, 이렇게 봐서는 모르겠지만...
보쌈김치. 사실 이렇게 덜 익거나 일부러 익히지 않는 겉절이 종류의 김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삶은 고기와 함께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돼지고기 편육. 짤방으로만 보기에는 얇고 양도 적어 보이지만, 여러 번 포개놓은 것이라 그렇게 적지는 않다. 따로 부탁하지 않으면 이렇게 살코기 부위와 비계 부위를 절반씩 담아 준다.
같이 나온 자그마한 덧접시에 보쌈김치와 돼지고기를 덜어서 한 입. 물론 새우젓도 같이 나오지만, 별로 필요없을 정도로 찰떡궁합이었다. 살코기라도 퍽퍽하거나 질기지 않았고, 보쌈김치도 보기에는 시뻘개서 엄청 매워 보였지만 그렇게 심하게 미각 고문을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덕분에 엄청난 기세로 고기와 김치, 밥, 국을 뚝딱 해치웠다.
이렇게 5월 중순의 첫 방문에서 삘이 꽂혀서, 6월 초순에 한 번 더 갔다왔다. 이 날은 저녁때 갔는데, 마침 2층에서는 근처 회사에선지 관공서에선지 회식을 와서 주방이 한결 더 분주한 느낌이었다. 1층에서도 보쌈을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꽤 돼서, 2층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는 벽붙이 상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이 때도 시킨 건 보쌈백반.
밑반찬이 조금씩 달라진 것을 빼면, 기본적으로 구색은 똑같다. 물론 미처 빼달라고 얘기하지 못한 가지나물에는 손도 못댔지만, 도토리묵과 숙주나물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싹 비웠다. 그리고 보쌈김치에는 굴도 하나 들어가 있었고.
옆으로 눕혀놓은 고기들. 이 정도면 혼자서도 꽤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게다가 구제역 여파로 대부분 수입산을 쓰고 있는 보쌈집들에 비하면, 국산으로 이 정도 가격에 보쌈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보쌈김치도 마찬가지로 통통한 모습이었다. 물론 남기지 않고 입에 들이부었고, 이번에는 식욕도 끝내줬던 탓에 밥도 한 공기 더 먹었다. 이 보쌈백반에 한한 것인지 다른 식사 메뉴에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기밥 값을 추가로 받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연로하신 할머니 분들이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털털한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단골 손님들이 오면 안부를 묻고 나 같이 처음 오는 뜨내기라도 뭐 부족한 건 없냐고 서글서글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시끌벅적한 '맛집' 이라기 보다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반집 분위기 그 자체였다. 다른 건 먹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보쌈 하나 만은 웬만한 유명 체인점 이상으로 맛있게 만드는 곳으로 여겨졌다.
다만 이렇게 호강하고 난 다음에는 물론 내 체질 때문에 설사라는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고추가 많이 들어간 매운 것을 전혀 못먹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땡길 때는 한국인 종특이 작용하는지 엄청나게 찾지만, 결국은 장에서 거부하는 현시창이 계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우유 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속을 길들이고 가야 할 것 같다.
더위도 한결 덜해지고 지금은 비까지 좍좍 퍼붓고 있어서 시원한 감까지 있는데, 4일 주기 포스팅 흐름도 슬슬 회복해야 할 것 같다. 다음에는 회기역 근처에 있는 어느 특이한 중국집 아니면 경원선 소요산 이북 구간 재개통 답사 둘 중 하나가 올라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