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꼬박꼬박 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서울 시립 교향악단에서 해마다 개최하고 있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회 시리즈인 '아르스 노바' 는 작곡 전공자이고 그 분야의 최신 조류를 체크해야 하는 입장에서 꽤 솔깃한 공연이다. 이 공연을 통해 처음 들어본 작품도 많고, 개중에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줘서 음반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년(2011) 4월 22일에 스티븐 애즈버리의 지휘로 개최된 아르스 노바 관현악 연주회에서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Georg Friedrich Haas, 1953-)의 '토르소' 라는 4악장 짜리 교향곡풍 작품이 1부에서, 2010년에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작곡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Christophe Bertrand, 1981-2010)의 '마나' 와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이 2부에서 연주되었다.
이들 중 내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끈 작품이 하스의 곡이었는데, 슈베르트의 미완성 피아노 소나타 D.840을 가지고 관현악곡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했다. 하스는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소위 말하는 스펙트럴 뮤직(spectral music) 계통 작곡가라고 하는데, 음향의 파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작곡에 응용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특히 배음(harmonics)을 세심하게 계산해 작품에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수학에 젬병인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음악은 일단 귀로 들어서 익히는 것이라 어렵다는 편견을 버리려고 했다.
일단 완전히 오리지널 현대곡은 아니었고, 슈베르트 곡의 재창작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수학적이라는 작곡 기법에 대한 압박감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베리오의 '렌더링'과는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작에 접근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양자 간의 차이점을 비교해볼 수도 있었다.
원곡인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1825년에 작곡된 4악장짜리 작품이지만, 제대로 완성된 것은 전반 두 악장 뿐이고 후반 두 악장은 모두 쓰다가 도중에 그만둔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라도 3악장의 경우 그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 관계 조옮김-A플랫장조로 시작했다가 바로 A장조로 전조된다-을 구사하는 등 의논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덕분에 이 곡도 여타 미완성 작품들처럼 후대에 와서 여러 작곡가와 음악학자, 피아니스트들이 미완성 상태인 3~4악장을 완성시키려는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물론 죽은 사람 작품을 후대인들이 아무리 주물럭 해봤자 작곡가의 의도에 100% 부합하는 완성품을 만든다는 사례는 있을 수 없고, 그 때문에 전반 두 악장만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피아니스트들이 훨씬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르스 노바 공연 때 프로그램 노트를 샀는지 어쨌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스가 어떻게 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작품에 손을 대게 됐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작곡 경위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이 선배 작곡가의 '토르소' 를 하스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를 듣는 것이 중요했다.
관현악 편성은 다수의 타악기를 동원하고 소프라노/테너 색소폰 두 대씩(주자는 두 명)과 하프 두 대, 아코디언까지 포함하는 꽤 대편성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전통적으로 이런 편성에서 구사하는 두껍고 진한 음향 보다는 악기 사이의 다채로운 조합을 응용한다는 점에서는 살짝 말러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현악기군을 중심으로 원곡에는 없는 다양한 배음을 곳곳에 깔도록 해서 뭔가 낯설지만 독특한 음향을 가미하고 있고, 이 덕에 완성된 전반 두 악장에서는 마치 베베른과 메시앙, 리게티를 섞은 듯한 신기한 관현악 편곡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미완성된 후반 두 악장에서는 거기에 토르소 그 자체인 상태를 강조하는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고전적인 마무리는 주었던 베리오의 곡에 비하면 이 곡이 좀 더 '깨는' 모양새였는데, 도중에 끊긴 느낌을 강하게 주는 3악장 끄트머리라던가 하강 음형을 유달리 계속 반복해 마치 레코드판이 헛도는 듯한 모양새인 4악장 주제 제시부, 그리고 같은 악장의 대단원에서 남은 선율 가닥들을 점차 와해시키고 우드블록과 썰매종이 깔짝거리는 리듬만을 두고 조용하게 끝내는 것은 마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 2악장을 연상시켰다.
40분이 넘는 대규모 작품이었지만 듣는 내내 지루함은 느낄 수도 없었고, 음반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서핑을 통해 음반의 존재는 확인했지만, 2003년에 소니 클래시컬 독일 지사에서 로컬 발매한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재고가 별로 없는지 중고 음반만 60유로(!!!)나 되는 엄청난 고가에 팔리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체류 시절에도 선뜻 구입할 수 없었고, 귀국 후 어떤 용자가 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중고 매물로 내놓은 것을 운좋게 구입했다는 지인을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커버 짤방에서 볼 수 있듯이 하스의 토르소 외에 더 직접적인 의미의 '토르소' 인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 4악장 스케치가 커플링된 CD고, 연주는 올해 윤이상 콘서트에서 지휘자로 등장할 예정인 페터 히르슈(Peter Hirsch)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Rundfunk-Sinfonieorchester Berlin)이 맡았다.
스튜디오 녹음인 만큼 보정을 거쳤기 때문에 좀 더 완벽한 연주를 들을 수 있었고, 특히 브루크너의 스케치 같은 경우에는 이 형태로 나온 음반들 중에서는 유이한 것이라 그것 만으로도 레어템이었다. 스케치 그대로를 연주하는 시도는 이미 1985년에 요아브 탈미 지휘의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영국 음반사인 샨도스에서 행한 바 있었지만, 아직 단편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오렐판 부록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 뒤 1994년에 추가 자료 수집으로 모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악학자 존 앨런 필립스(John Alan Philips)가 안톤 브루크너 협회의 인증을 받아 공식 인쇄본으로 간행했고, 1999년에 그 사이 또 추가 발견된 자료들을 토대로 한 개정판도 출판되었다.
이 필립스 편집의 스케치는 2002년 8월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의 빈 필이 공개 강연회 형식으로 연주한 바 있고, 한달 여 뒤인 9월에는 이 음반에 수록된 연주가 스튜디오 녹음되었다. 물론 스케치 완전 그대로를 연주하기는 불가능하거나 가능해도 너무 어색하기 때문인지 대부분 지휘자가 살짝 '건드린' 형태로 연주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녹음도 필립스 편집의 스케치를 히르슈가 다듬어서 연주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편만 죽 늘어놓고 연주하는 것이라 아구가 안맞는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는데, 이건 감상용이기 보다는 이걸 가지고 만들어진 캐러건판이나 SMPC판, 조셉슨판 같은 연주회용 판본의 성립 과정을 유추해 보는 분석용으로 더 적합하다.
이렇게 브루크너의 스케치로 마무리한 음반을 갖고 장광설을 쏟았으니, 다음 포스팅 거리는 자연스럽게(???) 브루크너 작품이 든 음반 세 종류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