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요리는 내게 아직 미지의 세계다. 청양고추 '따위는' 비교도 못하게 매운 쥐똥고추라던가, 음식에서 비누 혹은 세제 냄새를 배게 한다는 향신료인 고수 같은 존재가 저 쪽에 발을 들이기 꺼려지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정통 베트남식' 인지 뭔지를 떠나 그 쪽 스타일로 조리하는 쌀국수를 비교적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사실 지난 번 노량진 허수아비 포스팅 말미에 미리 언급한 바 있던 가게였는데, 일단 아예 생판 모르는 음식이었으므로 맛에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폴로식당 좀 못가서 있는 곳인데, 겉보기에는 별로 커보이지 않는 그냥 이 바닥의 평범한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보인다. 다만 안으로 들어가면 허수아비와 마찬가지로 벽을 마주보는 식사 공간에 붙박이 의자가 주루룩 붙어 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공간도 그런 식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많게는 서른 명 정도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식당이었다.
가게 앞에 붙은 메뉴 사진. 다만 허수아비와 달리 이게 전부일 정도로 단촐하지는 않았다. 스프링 롤이라던가 쌀국수를 맵게 만든 변종까지 합치면 대략 열두 가지 메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쇠고기쌀국수와 닭고기(치킨)쌀국수를 차례로 먹어 보기로 했다. 원산지 표시는 쇠고기가 호주산, 닭고기는 국산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아예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있는 이 식권 자판기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계산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일식 대중 식당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시스템이라지만, 노량진에서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곳은 처음 접했다.
음식을 고르고 돈을 넣으면 이렇게 자그마한 쪽지가 나오고, 일련 번호를 부르면 주방에서 음식을 받아가게 되어 있다. 허수아비와 마찬가지로 연월일시분초 단위로 주문 시간이 정확하게 찍히고, 영수증 용도로 쓰려면 굳이 주방에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벽붙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끼워넣은 수저통. 위로 솟은 검은 것은 젓가락, 오른쪽으로 튀어나온 것은 숟가락이다.
그리고 기호에 따라 뿌려먹도록 비치한 두 소스통도 허수아비의 그것과 비슷했다. 붉은 것은 칠리소스고, 검은 것은 해선장이라는 소스라고 했는데, 다만 칠리소스는 엄청나게 맵다고 했고 해선장도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어서 섣불리 시도할 엄두를 못냈다.
수저통에 붙은 안내문. 스프링 롤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디선가 내가 독극물 수준으로 싫어하는 오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포기했다. 그리고 일단 저기 나온 '지침' 대로 아무 것도 치지 않고 먹기로 했다.
주방에서 15번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받아온 쇠고기쌀국수(퍼보). 바깥에 붙은 메뉴 사진과 꽤 괴리감이 있는 모양새인데, 원래 가지런하게 담아서 나오지만 폰카 꺼내는 걸 잊어먹고 저어주다가 뒤늦게 찍어서 많이 흐트러져 있다. 같이 나온 밑반찬은 양파 초절임인데, 단무지도 비치되어 있어서 취향에 따라 먹을 수 있지만 이게 특이해 보여서 따로 담아오지는 않았다.
구성은 매우 단순했다. 쇠고기 육수에 쌀국수와 숙주나물, 송송 썬 파, 양파, 잘게 찢은 양지 부위와 레몬즙이었는데, 레몬즙 때문인지 육수 맛이 약간 시큼하게 느껴졌다. 신맛은 과일이나 식초 빼면 뭔가 음식이 맛이 갔을 때 나는 맛이라는 선입관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소 꺼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고수나 여타 '더 꺼려지는' 것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확실해서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 처음 먹을 때는 담백하고 괜찮은 편이었지만, 중간 쯤 가면 좀 싱겁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옆자리의 손님들은 칠리소스나 해선장을 조금씩 쳐가며 먹고 있었는데, 나도 한 번 해볼까 했다가 결국은 그냥 그런 채로 계속 먹었다. 먹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라 감히 객기를 부리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국수와 숙주나물의 비율이 거의 비슷비슷해서 내가 국수를 먹고 있는 건지 나물을 먹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되는 것이 더 미묘했다.
어쨌든 역하거나 심하게 생경한 맛은 아니어서, 밑반찬과 국수는 모두 비웠다. 그리고 이어서 닭고기쌀국수(퍼가)를 먹게 된 건 이틀 뒤인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닭고기쌀국수도 마찬가지로 4500원이었는데, 첨언하자면 국수 메뉴에는 먹는 양이 많지 않은 소식가들을 위해 소짜도 포함되어 있다. 소짜는 대략 기본 메뉴에서 500원을 뺀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번호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식판에 받아온 모습. 이번에는 국수 그릇에 손대지 않고 바로 사진을 박았다. 쇠고기 대신 잘게 찢은 닭고기가 들어 있고, 국물은 좀 뿌연 색이었다.
풀어헤친 뒤. 쇠고기는 그래도 색이 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존재감이 있지만, 닭고기의 경우 하얗기 때문에 더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사실 쇠고기쌀국수도 마찬가지지만, 이 가격 대에서는 푸짐한 고기 고명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닭고기쌀국수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넣지 않고 그냥 먹었는데, 이것도 좀 짜고 자극적으로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많이 싱겁게 느껴질 수 있는 맛이었다. 달리 보면 이렇게 담백한 맛 덕에 베트남 요리가 일종의 건강식 취급받는 걸로 여길 수 있을 테고, 또 이들 요리의 기원을 따져볼 때 합당한(???) 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도 깨끗하게 비웠다. 이렇게 두 대표 메뉴를 먹어봤는데, 결론만 말해 보자면 허수아비에서 느낀 것 만큼의 포만감이나 미각의 즐거움을 누리기는 힘들었다. 아무래도 군 복무 시절 먹었던 질겨터지고 조미료맛 엄청 나던 보급품이나 '쌀↗국↘수↗ 뚝↑배↓기' 같은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 아닌 생판 처음 접한 이국적인 쌀국수였으니, 그 만큼 심리적인 불안감이나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었다. 물론 밍밍한 맛을 그대로 감수한다는 미련함을 고수했으니 자업자득이기도 했지만.
예전에 어느 책을 보니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 닭육수에 말아먹는 쌀국수라고 했는데, 실제로 베트남 쌀국수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을 때 프랑스인 '주인님' 들이 쇠고기나 닭고기로 스튜를 만들어 먹고 남긴 육수에 '하인' 들이었던 베트남인들이 국수를 말아먹은 것이라는 참담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고기도 야채도 별로 없는, 매우 비참하게 단순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한국의 부대찌개와 비슷한데, 아이러니하게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이 곳에서 처음 접한 쌀국수도 (물론 그 당시의 암담한 상황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그 때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는 포호아나 여타 본격 베트남 요리점이 내놓는다는 '호화로운' 토핑의 쌀국수가 아니고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쌀국수인 만큼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다만 이렇게 맛이 어떤 지 혀에 기억은 시켜놨으니,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칠리소스나 해선장을 조금이라도 쳐서 먹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지를 시험해 보고 싶다. 이제 노량진에서 안가본 이 계열 셀프 식당은 국밥현 한 곳인데, 여기도 짬이 나면 한두 번 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