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제 음반 업계들이 전반적으로 소위 '표준 레퍼토리' 만으로는 시장성 확보가 힘든 상황이라, 완성도가 어떻고를 떠나 마이너 레이블들이 이런 곡들을 이곳저곳에서 이것저것 발굴해서 음반으로 내놓고 있다.
이탈리아 지휘자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a, 1892-1967)도 알게 모르게 몇 곡의 자작곡들을 남겼는데, 그 중 교향시 '유벤투스(Juventus)' 에 대한 포스팅은 거의 9년 전에 여기서 끄적인 적이 있었다. 저 글에서도 말미에 이 음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한 동안 잊고 있다가 회현지하상가의 중고음반점인 '미스티레코드' 에서 단돈 만 원에 팔고 있길래 당장 구입해와서 들어봤다.
작곡자의 사위가 지휘해 녹음한 음반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물론 그것 보다는 그 동안 음반이 없었던 다른 작품인 '플라톤의 밤(La notte di Plàton)' 과 '겟세마네(Gethsemane)' 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구입 동기였다. 물론 유벤투스 자체도 사바타가 남긴 열악한 음질의 SP 음반보다 훨씬 훌륭할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몫 했었고.
'플라톤의 밤' 은 꽤 구체적인 설명이 들어간 묘사 풍의 표제음악인데, 토론이 오가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한밤 중 축제를 상상해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중심이 되는 동기는 제목에 나온 것처럼 플라톤의 것이다. 동시대 신 빈 악파의 충공그깽스러운 전위파의 흐름에서는 한참 먼 보수적인 어법의 곡이지만, 오케스트레이션 솜씨는 상당히 출중한 편이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도 받았는지 섬세한 표현도 괜찮게 들렸다.
'겟세마네' 의 경우 성서에도 나오는 거의 모든 기독교 종파의 성지에서 제목을 취했는데, 다만 꽤 자세한 묘사에 치중한 '플라톤의 밤' 과 달리 이 곡에서는 성지를 답사하고 느낀 추상적인 감정을 표현했다고 하고 부제도 명상시(Poema contemplativo)라고 되어 있어서 한결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내내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주제 자체도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빌려왔다고 해서, 마치 비슷하게 교회 선법을 응용한 레스피기의 작품과도 엇비슷한 의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마지막 곡인 유벤투스의 경우 사바타의 자작자연에서는 녹음 기술의 한계 때문에 수없이 깎여나간 세부적인 음향이 그대로 나와서 한결 깨끗하게 들렸는데, 다만 체카토의 지휘는 전반적으로 빠른 템포를 취한 장인 어른보다는 좀 더 진중하고 점잖은 편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대역폭도 훨씬 넓고 다양한 색채감이나 박력 면에서는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 사위의 녹음도 충분한 장점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사바타 음반 외에도 같은 곳에서 네 종류의 음반을 더 구입했는데, 그 중에는 분명히 싸고 구하기도 쉬웠음에도 여지껏 안 샀던 것도 있었다. 말러 교향곡 10번의 조셉 휠러 보완판을 담은 낙소스의 CD였는데, 이 기회에 좀 들어보자 싶어서 같이 사왔다. 물론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라는 오아시스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CD 자체를 갖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허영심 때문에 그랬다.
지금까지 들어본 말러 10번의 보완판은 데릭 쿡의 1~3판과 루돌프 바르샤이판 두 종류였는데, 개인적인 구미에 가장 맞은 것은 쿡 최신판이었다. 아직 클린턴 카펜터판과 레모 마체티판, 니콜라 사말레+주세페 마추카판은 음반이 없거나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들어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렇게 해서 세 종류의 음원을 갖추게 되었다.
휠러 보완판은 여러 말러 전문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다소 마른 체형 같은 모습인데, 특히 중간의 두 스케르초에서 그런 인상이 강했다. 아무래도 말러의 뼈대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살을 붙여서 모양을 만드려고 한 다른 보완자들과 달리 가능한한 그 뼈대에서 손을 많이 안대려고 한 듯했는데, 학자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쳐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재미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판본 자체의 아쉬움은 차치하더라도, 이 판본을 되살리려고 직접 편집과 감수, 지휘까지 맡은 로버트 올슨의 노력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 같다. 올슨은 휠러의 악보가 잦은 복사로 손상되자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들과 파트 악보까지 대조해 가며 깔끔하게 다듬어 콜로라도 말러페스트 명의로 새 악보를 내놓았고, 앞으로 휠러판을 채택할 지휘자들은 모두 이 판본을 사용하게 될 것 같다.
남은 판본들 중에 관심이 있는 것이 카펜터판과 사말레+마추카판인데, 카펜터판은 다른 보완자들과 달리 말러가 남긴 뼈대에 상당히 손을 많이 대고 심지어 자신이 창작한 악구도 많이 넣어 보완자보다는 '재창조자' 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정도라고 하니 그렇다. 사말레+마추카판은 거의 20년 동안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의 4악장을 물고 늘어진 두 음악학자가 말러의 미완성작을 어떻게 손댔을 지가 궁금해서고.
며칠 뒤에 또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또 하나의 월척을 건질 수 있었다. 브루크너의 미완성 교향곡 9번을 연주회용으로 보필한 판본 중 캐나다 음악학자 윌리엄 캐러건의 최신 보완판을 녹음한 음반인데, 이 음반은 특유의 상술 때문에 좀 짜증이 나서 구입 목록에서 한참 멀리 떼어놓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브루크너 9번의 4악장 보완판 중 음반으로 나온 것은 세 종류인데, 니콜라 사말레+주세페 마추카+존 앨런 필립스+벤야민-구나르 코어스가 공동 보완한 약칭 SMPC판, 캐러건판, 그리고 벨기에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학자 세바스티앙 르토카르가 보완한 르토카르판이다. 이 중에서 가장 논의가 많이 되는 것이 SMPC판과 캐러건판인데, 두 판의 방향성은 꽤 다른 편이다.
SMPC판의 경우 일단 9번 4악장의 현존하는 모든 자필 자료를 집대성해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공식 스케치 버전으로 정서한 필립스가 멤버였던 이점도 있어서 자료 수집과 해석/보완의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다. 말러 10번의 쿡 2판과 3판을 차례로 녹음한 사이먼 래틀도 이걸 감안했는지 2012년에 베를린 필을 이끌고 감행한 자신의 첫 브루크너 9번 '4악장판' 연주 때 SMPC판을 선택했고, 또 그 실황으로 EMI에 음반을 내놓은 것 같다.
SMPC판과 달리, 캐러건은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브루크너의 스타일을 참고한 '작곡' 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 목록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 위베르 수당 지휘의 위트레흐트 교향악단 연주 음원에서도 뼈대에 최소한의 살만 붙인다는 취지의 SMPC판과는 상당히 상이한 진행이 많았는데, 그 동안 새로 발견된 단편들이 얼마나 반영되었는 지가 궁금했다.
2013년 현재 캐러건의 최신 개정판은 2010년에 나온 것인데, 이 개정판의 첫 녹음은 필하르모니 페스티바라는 굉장히 생소한 이름의 악단이 게르트 샬러의 지휘로 맡았다. 처음에는 저가 마이너 레이블에서 저작권료 안내려고 엉터리로 급조한 스타일의 악단 명이라서 신뢰가 가지 않았는데, 찾아 보니 공연 비시즌기인 여름마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 세 악단의 멤버들을 모아 만드는 페스티벌 악단이라고 했다. 또 이 아이디어의 근원이 칼 리히터의 뮌헨 바흐 관현악단으로 바로 맞닿는다고 하니 '야매' 악단은 아닌 것 같았다.
샬러도 미지의 지휘자이기는 했는데, 브루크너 교향곡을 연이어 저 악단과 공연하고 음반을 내놓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브루크너 음악에 대해 확고한 주관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주관을 체험하기 위한 음반의 경우가 내놓는 방식이 좀 이상하다. 필하르모니아 페스티바/샬러의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은 세 곡을 묶은 CD 3~4장 세트 형식으로 출반되고 있는데, 9번 4악장의 캐러건 최신 개정판이 포함된 음반은 4번과 7번도 같이 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딱히 보기 드문 판본을 선택한 것도 아닌 4번과 7번 보다는 브루크너 9번에 관심이 집중된 탓에 '왜 굳이 교향곡 한 곡씩을 내놓지 않고 세트로 내놔서 불필요한 지출을 감수하게 만드는 거냐' 는 불만이 있었다. 심지어 유료 다운로드의 경우에도 9번 4악장을 온전히 들으려면 앨범 전체를 다 구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이 때문에 '누가 중고 싸게 내놓으면 그걸로 사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교향악축제에서 부산시향이 이 9번의 코어스판 공연을 했던 날 두 번째로 미스티레코드를 방문했을 때 저 4,7,9번 세 장을 담은 세트가 30000원이라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뒤집혔다. 해외 구매는 둘째 치고 국내에서도 신품으로 입수하려면 40000원 가까운 돈, 혹은 그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 정도 값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온' 뒤 4번과 7번은 다 제끼고 9번부터 들어봤다. 2010년 8월에 바이에른의 소도시 에브라흐의 수도원 성당에서 공연한 실황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당 공연임에도 (혹은 그것을 의식했는지) 잔향이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샬러의 템포 설정은 좀 진중한 편이었고, 2악장에서도 다른 지휘자들보다 약간 더 느린 듯하게 악단을 이끌고 있었다. 다만 1~3악장 연주에도 최신 개정판인 코어스판을 쓴 래틀에 비해 기존 노바크판을 택한 것은 약간 의문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4악장. 확실히 새로운 자료가 나올 때마다 개정을 거친 탓인지, SMPC판과 마찬가지로 초기 보완판과 비교하면 세부적인 차이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작곡 영역에 좀 더 치중한 캐러건 특유의 성향 자체는 변하지 않아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 판본이라는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물론 아예 4악장의 완성 작업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떤 완성 시도든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러 10번의 휠러 혹은 쿡 스타일인 SMPC판과 카펜터 스타일인 캐러건판 중 개인적으로는 아직 SMPC 쪽에 좀 더 호감이 간다. 절대 캐러건 저 양반이 훨씬 자료가 빈약한 슈베르트 교향곡 8(7)번을 완성하는 변태짓을 해서가 아니다.하지만 캐러건판 외에 좀 더 '작곡' 에 가깝게 보완한 것이 르토카르판이라고 해서, 이것도 조만간 구입해서 들어보고 비교해 봐야 할 것 같다. 상술한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 목록 사이트에서 CD와 유료 다운로드 음원을 모두 팔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돈도 아낄 겸 온라인 음원을 구입할 생각이다.
그 외에 미스티레코드에서 구입한 나머지 두 음반과, 또 그게 계기가 되어 다른 경로로 구입한 나머지 음반들에 관한 썰도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