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음악가라고 하면 흔히 유대인/유대계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그들을 탄압한 나치와 친했던 작곡가나 그들의 이념에 상당한 영향을 준 바그너 같은 경우에는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인다고 하는 편견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이논이라는 지휘자는 상당히 자유로운 것 같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CPO나 코흐 같은 소위 '마이너 레이블' 에서 주로 녹음을 하고 있지만, 이논이 지휘해 녹음한 곡의 스펙트럼은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다. 요제프 탈 같은 동향인 원로 작곡가의 교향곡 전집이나 지난 번 소개한 라트하우스 교향곡 전집 같이 '저 지휘자라면 분명히 다룰 만한' 작품들도 있지만, 반대로 극렬 파시스트였고 푸치니의 미완성 오페라 '투란도트' 를 보필한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프랑코 알파노라던가 이번에 소개할 나치 당원 경력이 있는 에두아르트 에어트만(Eduard Erdmann, 1896-1958)의 교향곡 전집까지 녹음했으니 말이다.
벤덴(현 라트비아 체시스)에서 발트 독일인의 후손으로 태어난 에어트만은 주로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거장 피아니스트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피아니스트 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했지만 작곡도 비슷한 비중으로 했고 그 당시 기준으로 전위파에 속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35년에 나치가 그를 소위 '문화 볼셰비키' 로 간주하고 쾰른 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직을 박탈하면서, 에어트만은 '사상 전향' 을 시작했다.
모든 나치 당원이 정치적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이며 입당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일종의 강제 혹은 반강제,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입당도 있었다는데, 에어트만은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나치에게 교수직까지 빼앗기고 연주 계약까지 팍 줄어버렸으니, 부양할 가족들도 있던 상황에서 그리 어거지스러운 변명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도 꽤 인지도가 있던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힌데미트처럼 망명 같은 다른 선택지를 택하지 않고 훗날 주홍글씨가 되는 나치 입당을 택했는 지 꽤 의문스러운데, 아무튼 에어트만은 1937년에 당원 번호 4.424.050을 부여받고 공식적인 나치 당원이 되었다. 물론 나치는 그 때까지 에어트만의 예술 노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일단 인종적으로 그가 뉘른베르크 순혈법에 따라 흠결 없는 '아리아인' 이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작곡해 화가 에밀 놀데에게 헌정한 현악 4중주를 끝으로 에어트만은 종전 때까지 작곡 활동을 접었고, 오로지 피아니스트로만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에어트만을 바라보던 나치의 시선은 놀라울 정도로 극적인 변화를 보여줬는데, 문화 볼셰비키로 찍혀 있던 이 '피아니스트' 는 게르만 민족의 높은 예술성을 입증하는 대가로 거듭났고 1944년 8월에는 히틀러의 직권으로 병역 면제 예술인들의 목록인 소위 '신의 은총을 받은 자들의 목록(Gottbegnadeten-Liste)에까지 올라갔다.
나치가 득세하기 전인 1920년과 1923년에 에어트만은 각각 알반 베르크와 에른스트 크셰네크에게 헌정한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바 있었는데, 모두 단악장 작품이었고 라트하우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작풍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곡들도 역시 1996~97년에 이논이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코흐에 녹음했지만, 음반사가 망한 상태인지 신품 입고가 거의 정체 상태고 중고 음반도 해외 사이트 외에는 잘 보이지 않아서 아직까지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
ⓟ 2001 KOCH Classics GmbH
에어트만이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종전 후였는데, 1947년에 쓴 교향곡 3번과 1951년에 쓴 교향곡 4번까지 두 곡을 추가로 더 썼다. 다른 음반사에서 두 곡을 이미 취입한 이논도 나머지 곡들을 마저 녹음하고 싶었는지, 2004~05년에 역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의 브란덴부르크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해 전집 녹음을 마친 뒤 CPO에서 출반했다.
후속 음반이 늦게 나온 것은 이 포스팅 마지막에도 쓰겠지만 악보 입수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 같은 지휘자가 두 음반사를 통해 내놓은 특이한 형태의 전집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PO 음반은 다행히 국내에서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신품을 구할 수 있어서, 알바로 돈이 꽤 들어오고 난 뒤 아이뮤직을 통해 주문할 수 있었다.
ⓟ 2005 Classic Produktion Osnabrück
교향곡 3번은 자신의 아내에게 헌정했는데, 단악장 혹은 그에 준하는 형식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외형 상으로는 고전적인 4악장제 교향곡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보수적인 어법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조상의 보수화와 다르게 곡상은 일시적으로 절필하기 이전의 곡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에어트만 자신의 설명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무조 어법에 온음 음계와 삼전음(tritone) 등을 가미했다고 되어 있다.
이 곡은 1951년 9월 23일에 구스타프 쾨니히가 지휘한 에센 시립 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뒤에도 몇 차례 재연되었다고 하는데, 1957년 6월 11일에는 에어트만의 작곡 스승이었던 하인츠 티센의 추천을 받아 리하르트 크라우스가 지휘한 베를린 필이 연주했다. 이 때 청중들 중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에어트만이 두 번째 교향곡을 헌정한 크셰네크도 있었다. 크셰네크는 공연 후 티센에게 '2악장 아다지오는 20세기에 작곡된 것들 중 가장 아름답다' 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하는데, 다만 그 후 이 곡의 존재는 공기화되었고 출판도 여지껏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 2006 Classic Produktion Osnabrück
에어트만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 4번은 자신이 생애 후반에 함부르크 음대에서 피아노 교수로 일하면서 친해진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창단자 겸 상임 지휘자 한스-슈미트 이세르슈테트에게 헌정되었고, 초연도 1954년 5월 30일에 같은 지휘자와 악단이 했다. 이 곡도 비교적 고전적인 다악장 교향곡의 틀에 들어가지만, 특이하게 2악장을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의 병치 형태로 짜넣어 프랑크의 교향곡과 비슷한 구조로 만들었다.
이 곡도 형식만 조금 다를 뿐이고 전반적인 곡의 성향은 이전 교향곡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번 쓴 라트하우스와 달리 과거 회귀의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독특한 케이스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어트만이 비슷한 시기 등장한 슈톡하우젠이나 노노, 불레즈, 메시앙과 같은 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는 없었고, 이 교향곡도 초연 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한 번도 재연이나 출판이 없이 방치되었다.
에어트만이 결국 작곡가보다 피아니스트로 주로 기억되는 것도, 나치 입당이라는 정치적 오점으로 인한 괘씸죄 보다는 이러한 예술 사조의 격렬한 변화 과정에서 잊혀져버린 게 아닌가 싶다. 20세기 초반 까지만 해도 전위적인 축에 속했던 작곡가가 2차대전 후 '격동하는 음악의 조류' 속에서 오히려 구시대 인물로 간주되어 듣보잡이 되는 경우는 꽤 많았으니까.
그래도 같은 나치 당원 이력이 있었던 막스 트라프라던가 칼 횔러 같은 작곡가들이 '레알 구식' 인 낭만주의 혹은 신고전주의 기법을 고수하며 소위 '순수 음악' 을 추구하던 것과 달리, 에어트만은 시대에 뒤처질 지언정 자기 색깔을 계속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치 시대 독일에 남아 있던 다른 작곡가들보다 좀 튀게 보이는 것 같다.
교향곡 두 곡과 '관현악을 위한 론도' 를 커플링한 코흐의 음반과 마찬가지로 CPO 음반에도 교향곡 외에 카프리치, 독백, 세레나데 같은 관현악곡이 추가로 들어 있다. 이 곡들 중 세레나데는 나치 집권 이전인 1930년의 곡이고, 카프리치와 독백은 각각 1952년과 1955년에 쓰여졌다. 특히 독백은 에어트만이 남긴 최후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사실 에어트만은 그 이후로도 약 4년을 더 살았지만 1954년에 심장발작을 겪고 죽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후 피아니스트 활동도 중단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이논의 음반 외에 또 에어트만의 작품을 담은 음반이 언제 나올 지는 기약이 없는데, 일단 후기 작품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리스 운트 에얼러 음악출판사가 아직 정식 출판본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런 경우 연주자나 관현악단, 지휘자가 상당히 비싼 돈을 지불하고 자필보 혹은 임시 정서본의 카피 악보를 빌려 써야 하는데, 클래식도 시장주의 논리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악보를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은 꽤 큰 문제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주문한 세트 음반 두 종류와 미국에서 주문한 두 장의 CD가 더 있는데, 이건 상황 봐가면서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일본 음반의 경우 다소 냉소적으로 쓸 예정이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