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얼마나 아는 사람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녹음 활동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지휘자로 이스라엘 이논(Israel Yinon)이 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스라엘 출신인데, 내가 저 지휘자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영국 음반사 데카에서 1990년대에 한창 냈던 퇴폐음악(Entartete Musik) 시리즈 중 파벨 하스의 오페라 '돌팔이(Šarlatán)' 와 카롤 라트하우스(Karol Rathaus, 1895-1954)의 교향곡을 녹음한 음반이었다.
하지만 저 음반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페라 보다는 교향곡 음반이 궁금했지만 그것을 위해 지갑을 연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이 포스팅에서 언급한 회현지하상가의 중고음반 가게 '미스티레코드' 에서 다시 맞닥뜨렸는데, 데카의 교향곡 음반 외에도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음반사 CPO의 음반까지 합쳐서 2만원이라는 가격이었다. 물론 주저하지 않고 다른 음반들과 함께 사왔는데, 과연 이 잊혀진 작곡가의 교향곡들이 어떤 곡인지를 십수 년 만에 제대로 들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타르노폴에서 태어난 라트하우스는 빈 음악원에서 그 당시 꽤 도발적인 작풍의 소유자였던 프란츠 슈레커에게 작곡을 배웠다고 하는데, 아직 슈레커의 문하생이었던 1921년에 첫 교향곡을 쓰기 시작해 이듬해에 탈고했다. 그 때 라트하우스는 피아노 소나타의 초연이 성공을 거두어 빈의 유명 음악출판사인 우니베르잘과 10년 전속 계약을 맺었을 정도로 떠오르는 신예였지만, 정작 이 교향곡이 초연된 것은 그로 부터 4년 뒤인 1926년 1월 11일에 가서였다.
하지만 초연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그보다 전인 1924년 6월 15일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후속작인 교향곡 2번이 초연되었을 때도 보수적인 성향의 청중들과 평론가들에게 뭇매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 곡도 마찬가지로 야유와 소란 속에 연주되었다고 한다. 다만 라트하우스 자신은 우니베르잘에 보낸 편지에서 좀 다른 관점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소란을 아예 신경쓰지 않았는지 '초연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고 주장했다.
라트하우스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이 곡은 초연 후 수십 년 동안 재연되지 않은 채 잊혀졌다가 1993년에야 가까스로 총보가 발견되어 1996년에 이논 지휘의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 연주로 세계 최초 녹음이 이루어졌다.
ⓟ 1998 The Decca Record Company Limited
사실 이보다 더 충공깽스러운 작품이 차고 넘치는 지금 들어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날뛸 정도로 전위적이었나?'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쇤베르크나 베베른 류의 음악보다 듣기 '쉬운' 곡이었는데, 후기 낭만 시대의 영향도 느껴지지만 조성감은 많이 희석되어 있어서 마치 초기 힌데미트 류의 자유 무조 스타일이었다.
데카의 CD에는 이 교향곡 1번 외에도 1927년에 초연된 발레 '마지막 피에로(Der letzte Pierrot)' 가 수록되어 있다. 라트하우스 자신이 베를린 발레단의 단장이었던 막스 테르피스와 공동 구상한 각본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광대가 주인공인 것은 얼핏 보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와 비슷하지만 훨씬 근대적이고 또 초현실적인 내용이었다고 한다.
발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속지 내용을 보면 공장과 댄스홀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고 피에로가 콜롬빈을 짝사랑하고 있다가, 콜롬빈이 사실은 밀랍인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수상한 사람' 의 힘을 빌어 자신도 밀랍인형이 되어 버린다는 꽤 기괴한 취향의 스토리인 것 같다.
하지만 1차대전의 패배와 그 후유증으로 혼란한 시대 와중에 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는지, 1927년 5월 7일에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열린 초연 무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음악은 순음악인 교향곡과 달리 좀 더 '통속적' 혹은 고의적인 '키치' 를 곁들여서 쇼스타코비치 초기 오페라나 발레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라트하우스 자신도 이런 극작품에 적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후 영화음악이라는 블루 오션에 뛰어들기도 했다.
라트하우스의 나머지 교향곡 두 곡을 담은 음반이 왜 데카가 아닌 CPO에서 나왔는지 의문스러운 이들도 있을 텐데, 아마 데카에서 저 퇴폐음악 시리즈가 너무 방대해질 까봐 작곡가 별로 한 두 종류의 음반을 할애한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라트하우스가 망명 중 분실한 악보의 소재 파악 같은 음악학적인 연구 과정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데카 음반의 '후속작' 인 CPO 음반은 2002년에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의 브란덴부르크 국립 관현악단을 같은 지휘자가 지휘해 만든 녹음으로 2년 뒤인 2004년에야 나올 수 있었다.
ⓟ 2004 Classic Produktion Osnabrück
1번보다 먼저 초연된 2번의 경우에는 작곡한 시기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1번과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데, 다만 2악장제였던 이전 작품과 달리 이 곡은 4악장 형태이면서도 첫 두 악장과 끝 두 악장을 서로 잇고 있어서 마치 생상의 교향곡 3번과 비슷한 구조였다. 오히려 작품 성향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것이 3번인데, 2번을 완성한 지 거의 20년 만에 미국에서 작곡된 것이라 시간차 부터 상당한 편이다.
논쟁적인 작곡가로 독일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라트하우스는 이미 자신의 음악을 싫어하는 이들 중에 음악보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퍼부은 이들도 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이제 나치라는 정당으로 거듭나며 그 수장이었던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기 직전이었던 1932년 말에 가족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이주했다.
하지만 프랑스도 나치 집권 후 독일에서 망명/이주해오는 이들의 수가 부쩍 늘자 외국 노동자의 직업 활동을 매우 깐깐하게 제한하기 시작했고, 1934년에 다시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여기서도 자신의 주 수입원이었던 영화음악 의뢰가 별로 많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최종적으로 1938년에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에서 라트하우스는 뉴욕 퀸스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부임했고,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계속 뉴욕 근교 플러싱에서 반은둔 상태로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 미국 생활 중에는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곡에 몰두하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물론 교수 일이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라트하우스 자신의 창작 의욕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라트하우스의 생애 후반기 창작 활동이 정체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많은 유대인들이 느낀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라트하우스가 야샤 호렌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작곡가로서는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취급된다고 자조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미국에서 라트하우스의 이미지는 작곡과 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대서양과 태평양 건너편에서 처참한 전쟁이 한창이던 1942~43년에 라트하우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교향곡을 작곡했다. 자신이 직접 '대부분 전통적인 기법과 틀 안에서 쓰여진 곡' 이라고 평한 곡인데, 실제로도 무조적인 전작들보다는 좀 더 조성감이나 견고한 형식이 느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정 장단조 조성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아니고, 말러나 닐센의 후기 교향곡처럼 조성감은 있되, 어느 조성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펜데레츠키처럼 탄탄한 지위에 오른 대가 작곡가들이 대체로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인 어법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라트하우스의 경우에는 오히려 '작곡가로 인정받지 못한 현실' 과 어느 정도 타협하기 위해 이러한 '소극적인 과거 회귀' 를 택한 것 같다. 하지만 전후의 현대음악계는 라트하우스 자신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총렬주의를 비롯한 더욱 더 전위적인 흐름을 탄 신예 작곡가들이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득세하고 있었다.
라트하우스의 교향곡 3번은 작곡자 사후 4년 뒤인 1958년에 베를린에서 연주되었지만, 1번과 2번처럼 떠들썩한 반응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곡가도 작품도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가, 레퍼토리의 고갈로 인한 음반사들의 '숨겨진 곡 찾기' 와 나치의 득세로 잊혀진 작곡가를 발굴하는 작업을 통해 가까스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다.
CPO의 음반에는 곡 자체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또 하나의 사연이 있는데, 브란덴부르크 국립 관현악단의 음반 대부분을 제작해온 프로듀서 호르스트 괴벨(Horst Göbel)이 마지막으로 작업한 녹음이라는 것이다. 괴벨은 아주 예전에 라인베르거의 6중주를 거론했을 때 그 음반에서 피아니스트로 참여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카라얀이 만든 베를린 필의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서 실내악 지도 강사로 일하기도 했고 생애 후반기에는 녹음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애석하게도 괴벨은 이 CD가 나오기 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에 별세했고, 속지에는 괴벨에 대한 추도사가 같이 기재되어 있다. 이논은 이 음반 작업이 끝난 뒤 2003년 봄에 또 다른 녹음을 괴벨과 같이 하기로 했지만, 결국 그 녹음은 다른 스탭진을 초빙해 제작해야 했다. 그 녹음이 든 음반에 대해서는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