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는 동원집이라는 순대국/감자탕 전문 음식점을 갔다 왔는데, 이번에는 또 공교롭게도 이름에 '동원' 이 들어가는 해방촌 방면의 경양식집이 목표가 되었다. 다만 접근성이 그리 좋지는 않았고 또 가격 문제 때문에 돈을 좀 두둑히 만질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가 뒤늦게야 이것저것 처묵할 수 있었다.
사실 접근성이라는 것도 방금 그리 좋지 않다고 쓰긴 했지만, 6호선 녹사평역에서 2번 출구로 나와 계속 걷다가 왼쪽에서 갈라지는 신흥로라는 좁다란 2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되는 거라 딱히 나쁘지는 않다. 다만 걷는 거리가 좀 되고 신흥로라는 도로 자체가 보행자에게 매우 인색한 골목길 수준임에도 교통량이 꽤 많아서 다소 귀찮고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것은 9월 9일이 아니라 이틀 전인 9월 7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영업 시간이었음에도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뭔가 먹을 수 있던 건 9일이었다. 그나마 찾아간 시간대가 사진 찍어놓기 딱 좋았기 때문에 이렇게 사진은 박아두고 돌아왔다.
이틀 뒤에는 모처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을 때운다는 명분으로 방문했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7시 좀 넘은 시간이었는데, 의외로 해방촌 쪽에 살거나 그 근처의 펍 등지에서 온 것 같은 외국인들이 자주 보였다. 다만 가게가 그다지 넓지는 않기 때문인지, 배달을 시키거나 포장해서 싸가는 경우가 많았다.
벽 한 켠에는 이렇게 대표 메뉴들의 사진을 찍어서 인쇄한 현수막을 붙여놓고 있었다. 꽤 이것저것 있었고, 또 메뉴판을 보면 경양식집이라고 생각해도 상당히 다양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종이에 코팅해 급조한 듯한 모양새의 메뉴판. 1987년부터 영업했다고 하니 이제 열여섯 살 쯤 되는 가게로 보였다. 점심 때 쯤에 가게를 열고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스타일인데, 언제 쉬는 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다만 나중에 토요일에 갔을 때 헛걸음했다고 얘기를 하니, 부부가 조촐하게 꾸려가는 가게라서 식재료가 떨어지거나 여타 이유로 종종 영업 시간 중에도 가게를 비우는 경우가 있으니 연락을 하고 와달라는 말을 들었다.
메인디시 맨 위는 돈까스와 햄버그 스테이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메뉴 모두 내 주요 공략 대상이었으니 마다할 수 없었는데, 다만 가격대가 예상 외로 좀 셌다. 그나마 돈을 좀 만지게 된 시점에서 방문했으니 흔쾌히 시켜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망설여질 것 같다.
돈까스나 스테이크류 밑에는 카레라이스 종류가, 또 그 밑에는 또 하나의 선호 메뉴인 오무라이스를 필두로 볶음밥 종류가 쭉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좀 센 가격이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메인디시 외에도 이렇게 토스트와 샌드위치까지 갖춰놓고 있었는데, '삼단계샌드위치' 같은 좀 웃긴 이름의 메뉴도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만족도나 관심은 밥>국수>>>>>>(넘사벽)>>>>>>빵이라 우선 순위는 다소 뒤로 밀어놨다.
우선 개인적인 경양식 메뉴 중 1순위로 손꼽는 돈까스를 주문하기로 했다. 돈까스나 스테이크 종류는 주문하면 이렇게 크림수프가 먼저 나온다.
물론 그냥 상상할 수 있는 크림수프 맛인데, 여느 때처럼 후추를 뿌려서 먹어치웠다. 다만 음식 나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좀 느린 편이었는데, 이 때 주문이 많이 밀렸기 때문에 그랬나 생각했지만 한가한 때도 대체로 마찬가지여서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이 집의 규칙(???)인가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돈까스. 첫 인상은 다소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맛은 확실히 좋았는데, 고기가 일식 돈까스 정도는 아니어도 튀김옷과 일심동체가 되어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기 씹는 식감 외에도 너무 짜지도 시지도 않게 딱 맞춘 소스 맛도 입을 즐겁게 했다.
그렇게 기분좋은 첫 대면을 끝마쳤다. 다만 완식은 못했는데, 오른쪽 귀퉁이에 남긴 마카로니+감자샐러드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오이가 들어가서. 그래서 다음에 햄버그 스테이크 시킬 때는 그냥 저걸 빼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까먹고 말을 못했다.
그리고 교통체증 때문에 좀 더 늦게야 퇴근한 다음날에도 가게를 찾았다. 이번에 시킨 건 햄버그 스테이크. 품이 많이 드는 메뉴라 그런지, 돈까스보다 양은 좀 적어 보였다. 그 대신 밥은 좀 더 많이 담아주고 있었다.
이 메뉴도 양이 좀 적어서 그렇지, 돈까스와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의 내공을 유지하고 있어 보였다. 흔히 저가형 햄버그에서 나타나는 질척한 식감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고기의 식감을 유지하고 있는 게 직접 만들어 요리한다는 신뢰를 주었다. 소스는 돈까스와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그 통한의(???) 샐러드만 남겨놓고 먹어치웠다. 메뉴판 밑에는 또 햄스테이크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이건 뭘까 하는 호기심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오무라이스가 더 땡겨서 다음날에 갔을 때 주문했다.
그나마 이 곳 식사 메뉴 중 싼 축에 속하는 오무라이스였는데, 일단 오무라이스만 딱 담겨져 나온 기본적인 모양새는 괜찮아 보였다.
달걀옷을 찢고 속의 밥을 봤는데, 케첩라이스에 고명은 당근과 양파, 피망으로 매우 간소했다. 좀 더 동물성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래도 밥의 상태와 소스 맛의 적절함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다.
곁들임이 없었기 때문에 이 메뉴는 다행히 남길 것 없이 먹어치웠다. 그러면 이제 또 뭘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만 다음날은 신던 신발이 완전히 망가지고 비도 장마 수준으로 꽤 세게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나가질 못했다.
하루 거르고 갔을 때, 마침내 용기를 내서(????) 주문한 베이컨에그토스트. 아침도 점심도 아닌 저녁 때 이런 걸 주문했다는 점에서 용기가 아닌 똘끼가 작용한 것 같지만, 식사 시간의 합당함을 떠나 '미국식 아침식사라는 걸 한 번 해보자' 는 생각에 시켜봤다.
우선 용사의 집 양식당에서도 빵을 시키면 내오는 가공버터를 토스트에 골고루 바르고,
감자튀김에는 토마토 케첩을 좀스럽게 뿌렸다. 그리고 처묵처묵.
두 개를 한 번에 부쳐내는 달걀프라이는 주문할 때 따로 익히는 법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노른자가 반숙이 되도록 부쳐왔다. 소위 '오버 이지(over easy)' 스타일인 것 같은데, 베이컨과 감자튀김이 간간해서 그런지 달걀프라이에는 따로 간이 되지 않았다.
물론 올클리어. 다만 섬유질 하나 없는 고칼로리 식사다 보니 집에 와서 좀 부대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 언제 내가 야채나 과일을 그렇게 자주 먹었나 하지만. 다만 적어도 김치 같은 채소 밑반찬이 곁들여진 다른 메뉴와 달리 이건 미대륙의 기상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메뉴였던 탓에, 느끼한 걸 잘 먹기는 해도 좀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을 위한 마지막 방문 때는 카레 메뉴 중 하나를 주문하기로 했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현수막에도 나와 있는 치킨카레를 주문했다. 사실 고기가 들어가는 카레는 흔하니 오징어카레나 새우카레를 주문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다고 해물이 들어가는 카레도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어서 그냥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다.
치킨카레 한 상. 뭔가 다른 카레들과는 모양새가 좀 다른 편이었다.
깨를 잔뜩 뿌려놓은 것이 깨를 상당히 좋아하는 외갓집 취향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보다 야채들이 내 취향보다 좀 살짝 익힌 것 같아서 약간의 위기감이 들었다. 흔히 감자, 양파, 당근 정도만 쓰는 게 기본적이지만, 여기서는 감자를 빼고 부추와 적양파, 홍피망과 청피망, 버섯 등을 추가했다.
우선 비벼본 뒤. 감자가 쓰이지 않아서 그런지 카레 소스는 좀 묽은 편이었고, 예상대로 야채는 씹히는 맛이 꽤 살아 있었다. 물론 취향 차가 있겠지만, 항상 푹 익힌 야채가 든 카레를 먹어온 내게는 좀 익숙치 않은 식감이었다. 특히 덜 익힌 당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했는데, 일단 내 취향에는 좀 벗어나 있던 메뉴였다.
그래도 완전히 못먹을 정도로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고, 싹 비웠다. 다만 재방문하게 되면 아마 카레 종류는 다소 순위가 뒤로 밀릴 것 같다.
일단 이렇게 해서 이 음식점의 대표 메뉴로 생각되는 것들을 먹어 봤다. 물론 이걸로 내 식탐이 끝난 건 아니지만, 다른 곳도 있으니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기면 이곳저곳 돌아다녀 볼 생각이다.
특히 차기 목록에는 한창 찌던 여름에 못먹어 본 삼계탕 같이 개인적으로는 '사치품' 으로 여겨지는 것도 들어 있고, 양산형 맥주가 아닌 정통 제조법에 기반한 하우스 맥주 (또는 크래프트 맥주)를 파는 바가 이태원 쪽에 몇 군데 있다니 거기서도 제대로 된 맥주를 들이키고 싶다는 욕구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음반덕질이라던가 하는 것과 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곳들을 한 번에 다 돌아다녀볼 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