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현악단 음원 사냥에 여념이 없는 나로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던 소식이 올해 초에 들려온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1~6번 음반 발매였다. 비매품이든 상업반이든 서울 주변의 수도권 악단들 중 자신의 연주를 담은 음반 제작에 적극적인 두 악단이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수원시향인데, 그것도 이번에는 상업반으로 낸다는 것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현재 수원시향 상임 지휘자인 김대진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나 견해는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다. 음악적으로는 작년에 열린 악단 신년음악회에서 그토록 밋밋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연주는 없었다고 싶을 정도로 실망했었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친일 음악인에 대한 옹호 여론을 조성하는 모습 때문에도 꽤 적대감이 있는 상황이다.
다만 까놓고 어떤 이가 정치/사회적으로는 내가 용인하기 힘든 부류라고 해도, 그가 자신을 정치꾼으로 규정짓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영역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발자국을 남긴 이라면 적어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사심을 최대한 배제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게 요즘 내가 취하고 있는 '수정주의' 적인 태도다.
내가 아는 바로는, 수원시향의 첫 음반은 1990년대 중반에 금난새가 상임으로 재직할 때 이런저런 소품들을 모아 서울음반에서 녹음한 것이다. 다만 상업반으로는 너무 제한적으로만 풀렸고, 지금은 중고 시장에서 체이스컬트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제일모직의 비매품 음반으로 찍은 것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이후 금난새가 불명예 퇴진한 뒤 자리를 이어받은 박은성은 금난새 식의 대중 지향적인 자세를 벗어나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을 주로 연주하면서 악단의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또 음반 녹음도 비록 비매품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적극적으로 시작했는데, 차이콥스키와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관현악곡집과 브루크너 교향곡 4번, 6번, 8번의 연주를 담은 여섯 장의 CD가 게누인 한국 지사에서 출반되었다.
박은성의 뒤를 이어 현재까지 부임 중인 김대진은 여기서 한 발 더 딛고 공식적인 상업반 제작을 시작했는데, 원래대로라면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의 실황을 낼 예정이었다지만 이 계획은 음반 프로듀서이자 악단의 공동 악장이었던 정남일의 급작스러운 사고사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대신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교향곡 5번과 2번 두 곡을 골라 스튜디오 녹음을 해 2012년 2월에 악단 창단 30주년 기념으로 소니 뮤직 한국 지사에서 발매했는데, 이게 이 악단의 두 번째 상업반이 되었다.
이 음반은 비록 연주 스타일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나와 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고 있어서 많이 듣지 않기는 하지만, 이 포스팅에서 미리 썼던 대로 이 바닥에서 꽤 실력자들로 통하는 사운드미러 코리아와 황병준이 녹음했기 때문에 음질 면에서는 상당히 준수한 물건이다.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음반에 이어 김대진이 매스컴에 두 번째 음반 계획으로 밝힌 것이 차이콥스키의 번호 붙은 교향곡 여섯 곡 전곡이었다. 그것도 스튜디오 녹음으로 제작된 베토벤과 달리 악단의 연속 공연을 실황으로 녹음한다는 게 인터뷰의 골자였는데, 쇼스타코비치 연주를 듣고 실망했던 경험 때문에 '과연 비슷한 러시아 계열 작곡가 작품을 또 그렇게 연주하려나' 는 생각에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악단과는 관계도 없는 일개 감상자일 뿐인 내 기대같은 것과 상관 없이 차이콥스키 연속 공연은 예정대로 수원 경기도 문화의 전당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되었고, 실황과 공연 직전의 무대 리허설을 편집한 CD 다섯 장 짜리 세트가 베토벤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2014년) 2월에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을 달고 소니 뮤직 한국 지사에서 발매되었다.
ⓟ 2014 Suwon Philharmonic Orchestra & Seoul Arts Center
다만 이 음반은 일단 소니 측으로부터는 라이선스 계약만 땄고, 제작 주체는 악단과 이 공연의 서울 연주를 기획한 예술의 전당 공동 명의로 되어 있다. 악단 뿐 아니라 요즘 자체 공연 기획을 여럿 내놓고 있는 예술의 전당 측의 의중까지 반영된 것인데, 향후 임헌정 지휘의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진행할 예정이라는 브루크너 교향곡 연속 연주회 같은 것도 이렇게 발매되지 않을 까 기대하게 되는 대목이다.
물론 음반이 공식적으로 시중에 풀린 시점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단 기록물 수집 차원에서는 구입할 계획이 있기는 했고 다섯 장 세트임에도 가격은 3만원 대라는 저렴함 때문에 결국 인터넷을 통해 구입했다.
예술의 전당 기획의 2013년 차이콥스키 연주회 시리즈는 교향곡 기준으로 5번(2월 20일)-1번(3월 23일)-2번(6월 28일)-3번(9월 26일)-4번(10월 23일)-6번(11월 14일)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공연에서는 교향곡 외에 다른 관현악 작품들과 협주곡도 연주되었지만 음반으로는 교향곡만 추린 것이 제작되었다. 1번과 2번은 한 장에 모았고, 나머지는 각기 한 장씩의 CD에 수록했다.
이 음반 구입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차이콥스키의 후기 교향곡들인 4~6번의 경우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반/음원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음반화한 1~3번 초기 교향곡들의 연주/녹음에 관심이 갔다. 국내외를 따지지 않는다면 저 곡들은 이미 카라얀 재임기의 베를린 필이 녹음한 도이체 그라모폰 음반을 갖고 있지만, 카라얀 특유의 질척대는 스타일 연주가 별로 끌리지 않아서 제대로 들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들어본 뒤, 적어도 이 음반에 한해서는 내가 악단과 지휘자에 대해 갖고 있던 실망감이나 적대감이 상당히 누그러지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 연주 때 보여준 애매함과 밋밋함은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러시아 현지 악단들처럼 독특한 음색으로 포효하는 금관이나 찰지게 연주되는 현악의 레가토 같은 면모는 거의 없는 일종의 절충적 연주였다.
다만 절충적이라고는 해도 맺고 끊는 면은 확실했고, 기복이 심한 차이콥스키 음악의 특성상 어설프게 연주하면 끊어지거나 어색해지는 프레이징이나 감정선 조절도 꽤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또 일정 수준에 오른 한국 악단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악의 연주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인지, 특별히 러시아 토속색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즐길 만한 연주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베토벤 녹음 때 호흡을 맞춘 사운드미러 코리아와 황병준이 재차 녹음 제작과 편집을 맡았는데, 리허설까지 녹음한 것을 합친 것이라 당일치기 실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연주나 녹음 상의 실수 등을 상당 부분 보정해 마지막 악장의 종료 직후 나오는 박수 소리-1번의 경우에는 박수 소리도 편집되었다-만 제외하면 객석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아 듣기도 편하다.
음반 속지의 해설은 러시아에서 수학한 바 있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인 김주영이 작성했는데, 대중적인 클래식 도서도 발간한 바 있어서인지 딱딱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담긴 논문 식이 아닌 그냥 가볍게 적은 경수필 풍의 분위기라 입문자 용으로는 적당한 것 같다.
비록 번호 외의 만프레드 교향곡이 공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음반으로도 만날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번호 붙은 교향곡 여섯 곡의 전곡을 한국 관현악단 최초로 녹음했고 그 결과물도 양질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물건이다. 개인적으로도 베토벤과 브람스(강남 심포니), 브루크너(제주도립교향악단)에 이어 네 번째로 갖추게 된 특정 작곡가의 교향곡 전집이라서 꽤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후 악단 측에서 만약 계획이 있다면 또 뭘 녹음할 지 매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