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라면 서울 코믹월드(이하 서코)는 5월 4~5일에, 케이크 스퀘어(이하 케스)는 6월 1일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코 직전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서코가 연기되는 바람에, 결국 서코와 케스는 거의 맞물린 상태로 열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서코와 동네 페스타가 같이 열린 두 차례의 사례(2012년 3월 31일~4월 1일과 12월 29~30일)에 이어 세 번째로 동시에 열리는 동종 행사에 모두 참가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게 서코 vs 동페가 아니라 서코 vs 케스의 구도가 되었을 뿐이었다.
사견을 좀 더 강경하게 달자면, 세월호 사고 후 모든 문화예술 행사를 마치 음주가무 파티인 양 취급했는지 공연이고 전시고 행사고 취소의 연속이었던 것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트위터에도 지껄였지만, 무슨 이슈만 터졌다 하면 전 국민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 한다는 식의 케케묵은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은 이제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려야 한다.
물론 수백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사고였으니 나라 분위기가 우울한 건 알겠지만, 그 공연이나 전시, 행사로 먹고 사는 이들에게 이렇다 할 해명이나 보상도 없이 일정을 줄줄이 취소하거나 취소하라고 권고-라고 쓰고 압력이라고 읽는다-하는 이들의 무책임이 더 우울할 지경이다. 그럼 적절한 금전적 보상이라도 해 주던가. 근데 그런 거 없었지? 명불허전 문화빈국 한국이올시다.
아무튼 엄숙과 경건을 최상최대의 미덕으로 삼는 문화체육관광부와 aT센터의 콧대 높으신 양반들의 권고는 관철되었고, 그 양반들의 대승적 권고 덕에 나는 이번 주말에 지옥도를 두 번 씩이나 경험하게 되었다.
서코든 케스든, 적어도 하나 씩은 살 물건들이 있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코는 토~일요일 양일 개최고 케스는 일요일 하루 개최였기 때문에 토요일 서코, 일요일 케스로 하루에 한 행사 씩 가볼 수 있었다는 거였다.
일단 행사 분위기를 먼저 종합해 보자면, 서코든 케스든 동시 개최로 인한 인파의 분산 효과는 거의 없었다. 두 개 층을 대관해 진행한 서코에서도, 두 개 관을 대관해 진행한 케스에서도 인파의 홍수는 거의 비슷했는데, 다만 더위와 피로도를 따지면 오히려 케스가 더 심한 편이었다.
디스플레이 구축이 대세라 가까이 가지 않아도 해당 부스의 판매 물품과 성향을 알 수 있는 서코와 달리, 케스는 아예 대형 부스로 지정해 놓은 곳을 제외하면 모두 디스플레이 설치를 금지하고 있어서 부스 가까이 가야 뭘 팔고 무슨 성향인 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인파를 뚫고 지나가기가 더 힘들었다. 게다가 날씨도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들어 한 낮의 온도가 30도를 넘는 상황이었으니, 행사장 안에 냉방 장치를 최대한 가동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망가진 르망이라는 작가는 요 몇 년 동안은 동인계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가 이번에 꽤 뜬금포 참가를 선언했는데, 그것도 토요일 하루만 참가한다고 했기 때문에 필히 구입해야 할 품목이 되었다.
2013~14년 동안 그린 개인 일러스트들을 모은 책인데, 다만 로리캐들이 헐벗은 채로 나온 그림이 상당수라 등급도 15금으로 책정했다. 등급이야 그렇다 쳐도 책 가격이 개인적 관점에서는 좀 세게 나와서 잠깐 망설였는데, 그래도 이 때 아니면 다시 구입하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사버렸다.
RR (2층 V29): 컬러 일러스트북 'Rainy Day' (4000\)
바로 위의 일러북과 자꾸 가격 비교를 하게 된 책. 영인 화백 작품이었는데, 이 작가의 일러북도 요새 관심이 뜸했다가 이번에도 부스에서 목격하고는 살까 말까 좀 고민하다가 구입했다. 일단 가격대가 괜찮은 편이었고, 한국 동인계에서는 꽤 드문 편인 스토리가 있는 일러스트북이라는 점도 구매욕을 자극했다.
마인츠덕 (2층 V32): 미쿠 세미 버전 카드택 (800\)
EBS 회심의 캐릭터라고까지 회자되고 있는 EBS 수학교실의 캐릭터 세미는 나온 지 얼마 안되어 넷상에서는 엄청난 화제인데, 나르닥 같은 존잘러들이 마치 뭐에 홀린 듯이 팬아트를 양산하고 일본 모 일러스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야짤까지 나오는 등 컬트적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다만 넷상의 인기가 동인계의 인기로 바로 치환되는 건 아닌데, 이번에도 세미를 내건 부스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미쿠에게 세미 옷을 입힌 이 카드택이 눈에 띄어서 구입했는데, 7월에는 좀 더 많은 양질의 물품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상 고인이 된 시유 지못미
cat or fish (2층 L19): 리그 오브 레전드 카드택 네 개 (공짜...)
요새 고향 문화원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바쁘다지만, 어쨌든 다시 꾸준히 참가 중인 로리꾼 화백도 소소하지만 카드택 몇 개를 새로 뽑아서 참가했다. 다만 크기 조절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그렇고 7월 행사에서 뜬금포로 러브라이브 트윈지를 낸다고 해서 솔깃했다. 물론 아이마스든 러브라이브든 현실 세계의 아이돌도 안빠는 상황에서는 관심이나 애정도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일단 무슨 결과물이 나올 지 기대하고 있다.
구입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두 개 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 꽤 피곤했기 때문에 일요일 케스는 좀 더 사람이 없기를 바랬다. 하지만 위에 미리 쓴 대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케스에서도 구입한 품목은 숫적으로 별로 없지만, 액수는 오히려 서코를 뛰어넘어 버렸다.
~당신 앞에 무릎 꿇고~ (3관 F-23br): 엠마 19금 회지 'In Ginocchio Da Te' (5000\)
3회 케스 때도 본 타팬이라는 작가는 이번에도 모리 카오루의 엠마를 가지고 19금 회지를 내놓았다. 엠마와 윌리엄 개객기의 결혼 후 모습을 그렸다고 하는데, 다만 이번에도 개인적 기준으로 봤을 때 성 묘사 수위가 너무 '약하다' 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꾸준히 19금만 가지고 참가하는 것 같은데, 다음엔 뭐가 나오려나.
수상한 그녀 (3관 A-08b): 창작 회지 '수수꽃다리' (3000\)
케스 홈페이지의 홍보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회지. 통팥이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원래 창작물, 그것도 1970년대 한국이 배경인 창작물이라 꽤 주저했다. 요즘 복고가 유행이라지만, 그것도 자칫하면 그 시대에 대한 모든 것의 미화로 흘러가면서 오히려 그 당시의 부조리와 악습마저 은연 중에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넘어가는 위험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일단 부스에서 대충 넘겨 보니 다행히 내 노파심을 건드린 대목은 없었고, 뭔가 투박한 그림체에 찰진 경상도 사투리로 점철된 대사가 굉장히 개성적으로 보여서 구입했다.
이렇게 두 회지는 수량 조사에도 참가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구입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외에도 뭐가 있을까 하고 계속 돌아다녔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몇 가지를 더 샀다.
LUGNASAD (3관 I-22): EP 2집 'Salvation for your Emily'+EP 2.5집 '하계소녀 OST Collection「Garden of Flower」' (각 10000\)
사실 개인적으로 한국이든 일본이든 동인음악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소 닭 보듯 하고 있고, 한 때 인기를 풍미햿던 사운드 호라이즌 같은 경우에는 극성 팬들이 하도 진상 짓을 많이 하고 다녀서 '빠가 까를 만든다' 는 법칙에 따라 오히려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기도 하다. 아마추어리즘이 중2병이나 허세와 결합했을 때의 부작용이 만만찮게 크기 때문에 이 쪽에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면도 있는 것 같고.
그럼에도 이것들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일단 엄밀히 따지면 충동구매이기도 했고 또 일종의 친목질이기도 했다. 해당 팀의 기타리스트인 티고(TIGO)가 트위터 타임라인에 자주 등장하면서 호기심을 유발한 게 컸는데,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가 음반까지 구입하기에는 그 동기가 너무 약했다. 게다가 20대 시절에는 모습만 보고도 경기를 일으켰었던 비주얼계라니.
다만 몇 곡의 샘플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많이 허술한 것 같지는 않았고, 텔레비전에서 깝죽대는 보이 밴드마냥 흐물대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한 장만 구입할까 하고 지갑을 꺼내드니 저 티고라는 양반이 '두 장 다 사면 라이브 할인권 줍니다' 면서 바람잡이 스킬을 발휘하는 바람에 거의 낚이다시피 해서 진짜 두 장을 사버렸다. 라이브에 진짜 갈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들의 라이브 공연은 어떠려나.
이렇게 해서 이틀 동안 꿀같은 휴식을 반납하다시피 한 채 인파의 홍수 속에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는, 통용되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의 '덕통사고' 를 당한 채로 다시 월요일을 맞이하게 됐다. 여느 때처럼 힘든 일과가 기다리고 있는데, 앞으로는 제발 국가적 재난을 빌미로 국가 주최도 아닌 일개 기업이나 개인의 행사마저 열라 마라 하는 작태가 없기를 바란다...라지만 과연 그게 말처럼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