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간 이 동인 행사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대개 주목할 만한 신간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과 겹쳐 열리는 행사 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때문에 나도 이번 행사를 꽤 기대했는데, 다만 예전과 달리 행사 전 무슨 신간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에 대해 그렇게 성실하게 검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신간의 유무보다 더 걱정스러웠던 건, 좀처럼 비 다운 비를 구경하지 못하고 있는 중부 지방의 무더운 날씨였다. 주중에 늘 야외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지금 날씨가 그다지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고, 그나마 비가 온다고 해도 아주 깔짝 내리고 오히려 후폭풍으로 습기+땡볕에 더 심한 더위가 느껴지는 식이다.
이 때문에 행사장인 SETEC은 분명히 인파로 인해 찜통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정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온 건 꽤 많았다.
B.Rose (3관 L28&29): 러브라이브 토죠 노조미 흑백 일러스트북 'More Sweets' (3000\)
부농 화백 작품. 사실 현실 세계 아이돌도 관심이 없는 내게 아이돌 마스터니 러브라이브니 하는 것들 역시 그다지 관심이 가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D의 특성상 원작자가 약을 빨지 않는 이상(...) 캐릭터들이 늙을 일도 없고, 아무래도 '모에' 라는 측면에서 현실보다 훨씬 다양함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인기가 상당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공물 상납 대상 중 한 사람인 로리꾼 화백마저 8월 행사에 러브라이브 책을 들고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여성향 위주였던 코믹월드라는 행사에 남성향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러브라이브 전체, 혹은 그걸 중심으로 세운 부스가 꽤 많았고, 상대적으로 선발 주자인 아이돌 마스터는 그 세가 많이 약해져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걸 구입한 동기는 러브라이브나 거기 등장하는 토죠 노조미라는 캐릭터 때문이 아니라, 동인 행사 참가가 상당히 뜸한 편인 저 작가의 그림 자체였다. 비록 흑백이기는 했지만, 작가 나름대로의 주관을 갖고 그린 '육덕진 글래머' 캐릭터의 미감은 상당했다.
묘야 화백 작품. 이 작가는 코믹월드에서 상당히 자주 봤고 그림의 질도 매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 트위터에서 일러북을 낸다는 트윗을 접하고 선입금 예약까지 하는 근면함(??)을 발휘해 구입했다.
주로 TCG게임의 원화 외주 작업을 하는 작가로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러스트의 절대 다수가 상업 게임의 원화들이었다. 점점 눈은 높아지고 구매욕은 반비례해 줄고 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신선한 청량감을 주는 일러스트북이었는데, 구입 후 만족도를 따지자면 가장 좋았던 품목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구입한 최고가 품목. 클램프라는 창작 집단의 유명세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정작 나와 접점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고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고 있다. 개인적 취향을 떠나서도 사실 앤솔로지라는 물건은 복불복인데,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있다면 사게 되지만 나머지 그림들이 모두 그와 동일하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즐거움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경솔한 지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구입해 버렸다. 상술한 부농 화백을 비롯해 이 바닥에서 소위 '존잘러' 라고 불리는 이들이 대거 참가했기 때문에 그림의 질도 전반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는데, 일단 돈을 들인 게 아깝지 않다고 생각되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세 종류가 가기 전에 미리 알아보고 점찍은 것들이었는데, 행사장을 쭉 돌다 보니 예상 외의 복병들이 많았다.
이번 서코 최대 복병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까딱하면 잊고 지나칠 뻔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구매 대기줄이 늘어선 독립 부스는 지나가면서 단 0.5초라도 자동적으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발견 즉시 기다림의 고통을 무릅쓰고(?) 줄을 서서 구입했다.
문자 메시지 개그 위주였던 예전 것들과 달리 일반적인 4컷 개그 만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 있는데, 인터넷에 도는 문자 개그를 '주워먹는다는' 인식을 이 기회에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존재감 없는 여동생이 가진 의외의 능력(?)도 신선했는데, 과연 문자 개그북에서 일상물로 전환이 가능할 지 주목된다.
모브 화백과 쿠타타 화백의 합동 일러스트북. 모브라는 작가는 예전에 독일 체류 시절 드물게 AIR 팬북으로 인연을 맺은 이래 계속은 아니더라도 신간이 나오면 사고 있는데, 위에 언급한 연리 시리즈에도 자주 일러스트를 싣고 있다. 아직 얼굴 묘사가 평면적이라는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림 자체는 깔끔한 편이라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다른 작가와 트윈지로 참가했는데, 제목에서 얼추 생각할 수 있듯이 네코미미 미소녀를 소재로 한 일러스트북이었다.
문자남매에 이어 접한 또 하나의 복병. 분명히 2월 서코에서 구입한 기억이 있었는데도 다음 신간이 이 때쯤 나올 거라는 예상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덕분에 러프북 특전이 주어지는 선입금 예약 같은 것도 아예 생각을 못했고, 그냥 현장 구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만 좀 이상한 건, 2월에 구입한 회지가 분명히 1호였는데도 이번 신간에도 역시 1호라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해당 앤솔로지 홈페이지에 가봐도 구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데, 시리즈로 기획한 앤솔로지임에도 정보가 없다는 건 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이렇게 여러 물품들을 구입하면서 꽤 많은 돈을 들였는데, 그 외에도 전날 인천 차이나타운 가서 사들고 온 중국과자들을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존잘러들에게 뿌리는 이벤트(??)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Dessert Candy에서 꽤 큰 사이즈의 보컬로이드 부채를 얻을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게 없었다면 아마 행사장을 제정신으로 돌아보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부채가 동봉되는 트윈 일러스트북이 구입 목록에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1관은 이 부채를 받고 나서 돌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좀 뒤였다.)
아무리 냉방기를 풀가동한다고 해도 인파가 내뿜는 열기와 습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아무 방비책도 없이 3관 한 군데만 돌아다니는 데도 그야말로 사우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열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부채를 얻고 나서 더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과연 8월 서코에서 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뱀발: 여담으로 이 날 일정은 이게 끝이 아니어서, 단 하루 만에 상당히 다양한 이벤트를 경험했다. 순전히 본능적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돈까스 대치점에서 돈까스를 뚝딱 해치웠고,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올해 새로 부임한 임헌정이 지휘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봤다.
특히 후자가 중요했는데, 말러 교향곡 9번은 음반으로는 자주 들어봤지만 실제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화잡설에서 더 이상 자세히 쓰기는 힘들겠지만,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서코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의 감동을 안겨다준 공연이었다. 예술의 전당 유튜브 채널에서는 코리안 심포니의 공연 동영상을 상당히 자주 올리고 있는데, 이번 공연도 나중에 올라오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