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글루스의 음식 밸리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정광수의 돈까스가게'. 돈까스매니아인 나로서는 지나칠 수 없는 소식이었지만, 막상 첫 발을 디디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게다가 요즘에는 폭염 때문에 식욕부진 상태라서, 갈 엄두가 더 나지 않았고. 하지만 돈이 있을 때 가두는게 돈없을 때 후회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가보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관현악 리허설을 끝내고,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2호선을 타고 합정역에서 다시 6호선을 갈아탔다. 마포구청역의 나가는 곳은 크게 두 갈래였는데, 잘못 나가면 꽤 고생하는 구조였다. 아무튼 망원초등학교 근처라는 것을 기억해내서 6번 출구로 나갔다. 출구에서 나온 뒤에는 별로 고민할 이유도 없었는데, 나오자마자 갈 수 있는 방향인 오른쪽으로 일단 쭉 걸어가면 됐다.
그러다가 길 왼편에 '진선미 탑건' 이라는 흠좀무 이름의 아파트 101동이 나타나면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두 블럭 정도 걷다 보면 왼편에 망원초등학교가 나타난다. 간 날이 교육감 선거일이었는데, 어차피 망원동 주민도 아니었고 투표는 리허설 가기 전에 좀 일찍 나와서 집 근처 초등학교 투표소에서 했으므로 별 상관은 없었고.
돈까스가게는 초등학교 정문에서 대각선으로 오른쪽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생각보다 작아 보였는데, 실제로 들어갔을 때도 결코 큰 규모는 아니었고. 처음에는 그냥 주방과 재료 놓아두는 곳밖에 없어서 '설마 테이크아웃 점포로 바뀌었나' 고 생각했는데, 주방을 지나 계단을 내려오니 반지하 공간에 마련한 테이블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미 갔다온 많은 사람들이 찍어 올렸던 '기운 시계'. 아무래도 좁은 공간에 낸 점포다 보니, 내려가는 계단 옆에도 커피메이커나 콜라, 사이다 등 음료수 페트병, 소스병 담은 상자 등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갔을 때가 애매하게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라 손님은 나 하나 뿐이었는데, 일단 내려가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벽을 마주한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는 '아담한 경양식집' 삘이었는데, 그렇다고 너무 촌스럽거나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았다. 각 탁자에는 냅킨통과 시판품 물티슈, 스테이크 소스와 핫소스병 하나씩, 정체불명의 양념이 들어있는 유리병 두 개로 일괄 셋팅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박아대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가 수프랑 샐러드 접시가 우선 나왔다. 수프는 통후추 담은 나무 양념통과 같이 나왔는데, 양념통을 쥐고 돌리면 통후추가 잘게 깎여 뿌려진다고 설명을 들었다. 다만 돌리는 재미에 열중하다 보니 매콤할 정도로 후추가 많이 뿌려져 버렸고.
수프는 겉보기에 그냥 밀가루 크림 수프같아 보였지만, 잘게 썬 양파인지 양배추인지가 조금씩 씹히는 식감이 특이했다. 양배추 샐러드는 피클 같은 것을 다져 첨가한 마요네즈 드레싱이 곁들여지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는데, 주문하기 전에 오이피클과 생당근은 빼달라는걸 잊어먹었다. (그래도 그 두 개를 빼면 같이 나온 단무지나 얇게 썬 피망, 길쭉한 방울토마토, 옥수수, 황도 통조림 조각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수프를 일단 해치우고 기다리는 중에 찍은 연장통(밑에 같이 찍힌 물건들에 신경쓰면 지는 것임). 보통 식기류는 미리 테이블 셋팅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음식을 내올 때 따로따로 내놓는 방식이었다. 컵에 그려진 완소 테디베어에 한표. 그리고 그 옆에 찍혀있는 것이 후추통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본메뉴인 돈까스(6000\). 물론 여기보다 싼 집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싼 집은 싼 이유가 있고 비싼 집은 비싼 이유가 있을 거다. 여기서는 비싼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 만큼 공을 꽤 들여서 음식을 내놓는 집이었다. 너무 달지도 짜지도 않은 소스에는 양송이와 피망 얇게 썬 것이 들어 있어서 식감이 부들부들했고, 돈까스 두께도 한국식과 일본식의 딱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약간 작은 덩어리가 안심, 큰 덩어리는 등심 같았는데, 질기거나 퍽퍽하지 않아 먹기가 꽤 편했다. 곁들이로는 다른 블로그들에서도 봤던 것처럼 작은 감자튀김과 비엔나 소시지가 두 개씩 셋팅되어 있었는데, 그 작은 비엔나 소시지도 그냥 볶아서 내오는 것이 아니라 약간 달달한 소스를 뿌려서 내오는 것 같았다. 사각형 그릇에 같이 내온 국물은 그냥 우동국물 느낌이었는데, 꼭 있어야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없으면 뭔가 허전할 것 같기도 했고. (본전 찾는 가난뱅이 근성???)
어쨌든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고, 싹 비우고 음료수로 사이다까지 제공받아 마시고 나니 꽤 배가 불렀다. 후식으로 팝콘이 또 제공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거기서 더 먹었다가는 오히려 움직이기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사이다만 다 마시고 끝냈다. 올라가서 값을 지불하고 쉬는 날을 물었는데, 일요일에 쉬는 건 똑같고 8월 4~6일 3일 동안은 여름 휴가라고 했다. 물론 홈페이지에는 게시판에 공지되어 있었는데, 가게 앞에도 붙여놓겠다는 말도 추가로 들었다.
이어 이틀 뒤 한 번 더 갔는데, 그 때 목적은 바로 생선까스였다. 사실 돈까스+생선까스 콤보 같은 메뉴도 있기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가지 메뉴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또 찾아가 먹고 싶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고 주변 풍경이고 다를 바 없으므로 사진도 더 안찍었으니 패스. 다만 가게에 들어가서 추가로 몇 장은 박아 왔다.
사실 돈까스 먹으러 갔을 때도 팝콘은 못먹었지만 그래도 은근히 기대는 했는데, 내려가서 냉장고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종이들을 보고 알았다. 서비스로 내오는 음식이라도 날씨가 좋지 않아 품질이 떨어지면 내놓지 않는다는 완벽주의였다. 주인이 써놓은 것 외에도, 냅킨에 뭔가를 쓰고 가거나 그림을 그리고 간 사람도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래 냅킨 그림.
...님들 좀 짱인 듯. 그리고 냅킨에 가려진 문구는 '김치도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면 말씀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은 개구리 개간지(???)에도 한표.
생선까스도 마찬가지로 수프와 샐러드가 먼저 나오고 이어 우동국물 곁들인 본요리가 나오는 식이었다. 다만 생선까스인 만큼 위에 뿌려내오는 소스는 타르타르소스였다. 양은 돈까스와 마찬가지로 꽤 넉넉했는데, 일단 큰 기대를 하고 소스를 나이프로 골고루 펼쳐준 뒤 먹기 시작했다.
다만 기대가 너무 컸는지 어쨌는지, 예전에 집 근처 돈까스집에서 생선까스를 시켜서 먹었을 때와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조각조각마다 가시가 걸린 것이었는데, 포를 뜰 때 제대로 뜨지 않았는지 꿀떡꿀떡 넘기지를 못해 한참을 씹으면서 입속에서 계속 골라내야 했다. 가시만 걸리적거리지 않았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웠을텐데.
그래도 어쨌든 그릇을 비운 뒤 음료로는 콜라를 택해 마시고 계산을 하기 위해 올라갔다. 막 서빙을 끝내고 올라온 주인장 분께 생선까스에 쓰이는 생선의 포를 직접 떠서 만드는지 여쭈어 봤는데, 주방 공간이 작아서 직접 포를 뜨지는 못하고 식재료를 납품하는 업체에서 떠온 생선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가시가 계속 걸렸다고 말하니 즉시 사과하시면서 '납품 업체에 다시 한 번 꼼꼼히 포를 떠달라고 하겠다' 고 답변하셨고, '나중에 가게를 확장하게 되면 생선까스도 직접 포를 떠서 만들 생각' 이라는 추가 답변까지 받았다.
고급이니 대중적이니를 따지기 전에 서빙 태도나 내오는 음식들에 기합이 꽤 들어가 있어서 신뢰가 가는 타입의 가게였다. 그래도 가게 자체가 집에서 좀 먼 탓에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할 것 같고. 하지만 재일교포 친구가 또 휴가를 얻어 한국에 오면 꼭 데려가서 먹여보고 싶을 정도다. (참고로 지난 번 왔을 때는 미미당에 가서 돈코츠라멘을 먹었음) 아직 더위에 꺾인 식욕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배 위주로 살아가고 있는 여름날에 기분전환으로 충분한 식사였다.
뱀다리: 연장샷에 같이 찍힌 수상한(???) 책은 계간 성우매거진 '소리사랑' 2008년 2분기호. 리허설 끝나고 나와서 들린 북새통에서 뉴타입 신간을 살지 저걸 살지 한참 고민하다가 질러버렸다. 아무래도 내게는 그저 꼬드겼스니 건달 땡땡이니 하는 아오안들만 표지로 나오는 잡지 보다는, 완소 여민정 여사가 다름 아닌 메이드 코스프레로 유혹하는 표지가 더 중독성이 강했고. 물론 그 외에도 몬스터즈 인터뷰나 노민, 이정구 등 원로/중견 성우들의 인터뷰 등 읽을 거리도 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