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의 작품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곡이, 집요한 음악학자들의 추적 끝에 '위작' 임이 밝혀지는 경우는 지금도 결코 드물지 않다. 이 재미없는 블로그의 '레어 애청곡선' 시리즈 중에서도 베토벤의 최초 교향곡이라고 했다가 프리드리히 비트라는 듣보잡의 작품임이 밝혀졌던 것을 소재로 뻘글을 끄적인 바 있었고. (클릭)
하지만 거꾸로, 자신이 쓴 곡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속여 발표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종종 있어왔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푸냐니 작곡의 아다지오' 라고 발표한 바이올린 독주곡이나, 프랑스의 19세기 음악학자 프랑수아-조셉 페티가 '스트라델라 작곡의 성가곡' 이라고 발표한 노래가 사실 자작곡들이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일화인데, 크라이슬러나 페티 이상으로 음악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까지 문제가 확산된 사건도 소련에서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출신으로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미하일 골드스테인(Mikhail Goldstein, 1917-1989)이라는 음악인이 있었다. 그의 동생인 보리스도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신동으로 이름나 있었는데, 동생과 달리 형인 미하일은 불행히도 손을 다치는 바람에 연주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바이올린을 접은 대신, 미하일은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의 폭정이 계속되던 때였고,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같은 이름난 작곡가들도 '형식주의' 니 뭐니 해서 틈만 나면 갈굼 쿨타임이 발동해 이리저리 까이던 시기였다. 그래서 수많은 작곡가들이 자의건 타의던 간에 19세기의 국민악파 스타일로 곡을 써야 별 탈없이 살아남는 길이기도 했고.
골드스테인도 마찬가지로 고향 우크라이나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다만 이 작품들은 제도권 내의 비평가들에게 '우크라이나 민요의 어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쓴 졸작' 이라는 식의 악평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소련에서는 작곡가에 대한 악평이 해당 인물의 경력 뿐 아니라 생존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던 실정이었다.
평판이 좋지 않았던 작곡 활동과 병행해 골드스테인은 오데사 음악원 부속 도서관의 사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48년에 오데사 국립극장 자료실의 악보 더미 속에서 1809년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 교향곡 한 곡의 악보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 작곡자는 골드스테인에 의해 우크라이나의 대지주이자 예술 후원자로 파악된 미콜라 오프샤니코프-쿨리코프스키(Mikola Ovsianikov-Kulikovsky, 1768-1846)로 파악되었고, 순번은 21번이었다(교향곡 제 21번).
러시아에서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작곡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소위 '러시아 5인조' 의 보로딘이나 림스키-코르사코프로 기록되어 있었다. 골드스테인이 발견한 곡은 그보다도 훨씬 앞선 후기 고전~초기 낭만 시기의 작품이었고, 러시아/소련의 음악사 사상 매우 의미있는 발견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비록 21번 이전의 작품들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도, 미야스코프스키나 쇼스타코비치 이전에 9번 이상의 교향곡을 다작한 작곡가가 전무했기 때문기 때문에 '소련의 자부심' 으로까지 해석되었다.
이 '소련 최초의 교향곡' 은 발견 이듬해인 1949년에 오데사와 키예프에서 연주되었고, 2년 뒤인 1951년에 소련 국립 음악출판사에서 총보와 파트보가 발간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 지휘계의 거두였던 예프게니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가 레닌그라드 필을 이끌고 소련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Melodiya)에 녹음까지 취입했고, 음악학자들에 의한 상세한 연구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연구 과정에서 생겨났다. 키예프 음악원의 교수이자 작곡가였던 글레브 타라노프가 발견자인 골드스테인에게 '발견한 교향곡의 자필보를 달라' 고 요청했는데, 골드스테인이 갖다준 악보를 오랫동안 정밀하게 검토한 타라노프는 '이 곡은 오브샤니코프-쿨리코프스키의 작품도, 그렇다고 골드스테인의 작품도 아니다' 라는 충공깽의 결론을 발표했다.
사실 이 촌극은 골드스테인이 모두 직접 꾸민 것이었다. 그는 당시 소련에서 공공연히 박해받던 유대인 혈통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자신의 곡까지 악평한 비평가들에게 증오와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준으로 후기 고전 스타일의 교향곡을 한 곡 쓴 뒤, 그것을 오래되어 보이는 악보 뭉치에 옮겨적고 거기에 오프샤니코프-쿨리코프스키라는 가공의 인물 이름과 곡 제목을 기입해 '고악보' 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곡 뿐 아니라 작곡가까지 허위로 속였던 골드스테인의 행각은 꽉 막히고 답답한 관료주의 체제 하에서 제대로 먹혀들었고, 한동안 수많은 이들을 줄줄이 낚는 만선 떡밥이 되었다. (므라빈스키까지 낚았으니 이건 뭐)
게다가 이 교향곡 뿐 아니라, 골드스테인 자신이 발굴했다는 다른 곡들-발라키레프의 '즉흥곡' 과 글라주노프의 '알붐블라트(Albumblatt. 소품이라는 의미)'-까지도 골드스테인의 자작곡임이 드러났다. 한술 더떠 1963년 전 소련 작곡 콩쿨에서 입상한 곡들 중에서도 골드스테인이 가명으로 발표한 곡이 끼어 있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타라노프의 발표 직후, 골드스테인은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시인하고 '교향곡은 사실 나의 작품이었다' 라고 밝혔다. 뒤늦게야 낚인 것을 깨달은 소련의 위정자들은 쪽팔림과 분노를 금치 못했고, 결국 골드스테인 집안의 모든 이들을 사기꾼에 반역자로 규정했다. 골드스테인의 곡들도 자신의 이름으로 냈던 다른 이의 이름을 쓴 도작이건 간에 소련에서 출판과 공연, 녹음, 방송이 몽땅 금지되었음은 물론이었고.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골드스테인 본인 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로 착실히 경력을 쌓고 있던 동생 보리스까지도 소련에서 연주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동독으로 (사실상 추방에 가깝게) 이주해야 했고, 오스트리아와 이스라엘, 영국 등을 거쳐 서독에 정착했다.
골드스테인 형제들의 이주와 함께 소련의 음악사에서 골드스테인과 관련된 모든 항목은 삭제되었고, 공식적인 언급도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소련 국내 뿐 아니라,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음악인들에게도 이 사건이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체제와 반체제 모두에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골드스테인 자신은 서독에서 오히려 후한 대접을 받았고, 함부르크 음악원과 영국의 메뉴인 영재학교, 일본의 무사시노 음악대학 등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연주가들을 배출했다. 1984년에는 서독 정부로부터 음악 교육의 업적을 인정받아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까지 받았는데, 물론 이러한 소식도 소련에서는 완전히 함구되었다.
사실 므라빈스키가 남긴 음반-아마도 이 곡의 유일한 음반인 듯-을 들어보면, 19세기 초반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보적' 인 것을 한귀에 알 수 있다. 특히 2악장에서 낭랑하게 연주하는 트럼펫 듀엣은 19세기 초반의 내추럴 트럼펫으로는 절대 불 수 없는 악구라, 너무 자작나무 태우는 냄새가 심하게 날 정도. 적어도 연대라도 좀 늦춰서 발표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무명의 음악인이 발견했다는 소식 하나에 솔깃해서 제대로 검토도 안해보고 국가적인 발견이라고 자뻑했던 소련 정부와 주류 음악계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는 당시 소련의 상황을 파악하면 조금 이해가 되기는 하는 대목이다. 스탈린 시대에 소련에서는 서방에서 유래하고 발명된 것이라도 쌩억지로 '사실 우리가 원조임 깝ㄴㄴ' 식으로 우기는 경우가 예삿일이었고,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맘모스 화석이 발견됐다는 고고학 사례만 가지고 '러시아는 코끼리의 고향이다' 라고 교과서에서까지 가르치는 지경이었다(...).
하여튼 당시 소련의 병맛넘치는 국내 사정과, 그로 인해 빚어진 차별 대우+악평을 못이긴 한 음악인의 병크가 겹쳐 연출된 희대의 병림픽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아직 러시아에서도 정신 못차리고 있는 것 같은게, 소련 붕괴 후인 1996년에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 레이블로 발매한 '므라빈스키 에디션' 이라는 CD 시리즈의 15집에 골드스테인의 이름이 아닌 오프샤니코프-쿨리코프스키의 이름으로 1954년 녹음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 1996 Melodiya/BMG
...이 자식들, 안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해당 CD 속지의 해설을 보면 이 곡이 골드스테인의 작품이라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CD의 곡명 표기도 진퉁 작곡가와 작품명을 썼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을텐데. 한 번 더 낚고들 싶었었나?)
뱀다리: 아주아주아주 간혹 있는 재연 무대에서도, 이 교향곡은 당연히 골드스테인 작곡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2005년에 네메 예르비 지휘의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이 공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곡과 얽힌 사연이 사연인 만큼인지, 므라빈스키 이후 이 곡을 음반으로 내놓는 이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소련 외에 서방에서는 함부르크의 한스 시코르스키 음악출판사가 간행했는데, 여기에는 '옛 양식에 의한 우크라이나 교향곡' 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