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관현악단들이 어느 정도 자신들의 연주에 자신감을 갖고 음반을 만들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음반 매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LP가 끝물을 탈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라, 이후 CD로 재발매된 것도 그리 많지 않아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 문제고.
이번에 소개할 음반도, 그리고 앞으로 소개할 예정인 음반들도 지난 번 서울시향이 서울음반에 취입했던 LP와 마찬가지로 발매 이래 다른 포맷으로 재발매가 되지 않은 것들 중 하나다.
ⓟ 1986 Jigu Records Co., Ltd.
음악동아 1986년 10월호의 지방 음악계 소식을 정리한 코너에 당시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가 '부산시향, 브람스 교향곡 4번 레코딩' 이라는 제목으로 쓴 기사가 실렸다. 제목 그대로 부산시향이 음반을 녹음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녹음 시기에 관해 좀 애매한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음반사인 지구레코드의 간부나 당시 부산시향 상임 지휘자였던 박종혁의 인터뷰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녹음과 음반 제작에 관한 의도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한국 클래식 음반 시장은-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세기가 바뀐 지금도 역시-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한국의 악단이 낸 음반에 관심을 가지는 애호가도 드물었다. 이를 의식해서였는지, 지구레코드 간부도 '국내 연주 단체의 본격적 클래식 음반 제작은 시장성이 없음을 시인'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산시향이 이 녹음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음반 발매가 성사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박종혁은 이 음반 발매 계획에 대해 '레코드 취입은 남과 경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악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입장을 밝혔고, 브람스 교향곡의 선곡에 대해서는 정기 연주회와 서울 원정 공연에서 연주해본 뒤 외국 악단과는 다른 독특한 서정성을 표현할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두 달 뒤 같은 잡지의 12월호 음반평 코너에서는 따로 '국내 음반 뉴스' 라는 제목으로 이 음반의 발매 소식이 언급되었는데, 10월 5일에 발매되었다고 했으니 좀 늦게 기사가 뜬 셈이었다. 녹음 일자에 대해서는 10월 기사에 나왔던 9월 1일이 아니라 8월 29일이라고 되어 있었고, 장소는 서울스튜디오였다고 한다. 부산 현지에서 녹음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녹음을 위해 3개월 동안 리허설을 했다는 말이 덧붙었다.
사실 이 녹음 몇 해 전만 해도 부산시향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는데, 3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한 이기홍이 악단과 심한 마찰을 빚어 공연이 취소되고 부산시 측으로부터도 안좋게 찍히는 등 온갖 악재가 겹쳐 1981년 6월에 해단된 흑역사가 빚어진 바 있었다. 그나마 다섯 달 뒤인 11월에 재창단되어 활동을 이어갔는데, 이 앨범의 제작 동기도 재창단 5주년 자축을 겸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박종혁은 이 음반 이후에도 부산시향이 계속 음반 작업을 하기를 바랬다고 하는데, 그 바램은 실현되지 못했다. 2년 뒤에는 박종혁 자신도 부산 외 지역 출신 연주자들을 우대한다고 하는 논란 속에 사임했고, 이후 충남교향악단의 초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996년 3월에 향년 54세로 급서했다. 부산시향도 후임 지휘자들이 악단과의 갈등으로 조기 사임하거나 임기 중 급서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이래저래 까이는 등의 난관을 겪던 터라, 음반 제작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지인이 저 LP를 구입했다고 하길래, 나도 지면 안되겠다는 각오로 집에 LP 턴테이블은 없지만 일단 소장용으로라도 하나 마련하자고 생각해서 모 중고 LP 사이트에서 구입했다. 다행히 가격은 비싼 편이 아니었고, 상태도 괜찮았다. 그리고 턴테이블을 갖고 있는 그 지인에게 LP 스캔을 부탁해 flac 파일로 받아왔고, wav 편집 프로그램으로 귀에 거슬리는 표면 잡음을 어느 정도 제거해 듣고 있다.
악단과 지휘자가 나름대로 강훈련을 하며 준비한 녹음이고, 또 한국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교향곡 전곡을 스튜디오 녹음한 물건이라 나름대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들었을 때 그 기대가 모두 들어맞은 것은 아니었고.
물론 스튜디오 녹음이라 연주를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눈에 띄는 치명적인 실수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2악장의 84마디 끄트머리에서 팀파니가 한 소절 전에 미리 들어와 연주한 정도? 하지만 그보다 악기들-특히 관악기-의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여러 대목에서 맥놀이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더 신경쓰인다. 현악기의 고음 패시지나 빠른 악구의 처리도 약간 어색해서, 녹음 시작 전에 철저히 튜닝을 하고 며칠 동안 재녹음을 해 편집했다면 좀 더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한국 악단, 그것도 지방 악단이 꽤 의욕적으로 도전한 녹음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음반이라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같이 구입한 국향(KBS향)과 대구시향의 LP도 스캔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향 LP의 경우 A면은 작업했지만 B면에서 바늘이 크게 튀는 바람에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상태가 좋은 음반으로 재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후 지휘자가 여러 차례 바뀌고 세기도 21세기로 바뀌었지만, 부산시향이 이 레코드 이후 다른 음반을 녹음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바가 없다. 물론 음반 시장이 개발살 직전인 시점에서 채산성 안맞는 녹음을 굳이 낼 만큼 악단이나 시 측이 목돈을 마련하거나 내놓을 엄두를 못내고 있겠지만, 먼 곳에 사는 타지인들이 악단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공연장 방문이나 이따금 있는 교향악축제 같은 공연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연주를 광범위하게 어필하려면 녹음이나 녹화 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관현악단 최초로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어느 악단이 관심을 끌어서, 그 앨범들을 질러서 듣고 있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