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낙소스(Naxos)의 일본작곡가선집 음반도 일본에서 발매된 것을 기준으로 25장에 달하고 있다(인터내셔널 릴리즈로는 아직 23장). 비록 2008년 터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출반 속도가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창작 성향과 시대를 떠나 특정 국가 작곡가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웬만한 배짱과 빽 없이는 안되는 프로젝트다.
물론 낙소스에서 그 전에 일본 작곡가들의 작품을 아예 음반으로 만들어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 가곡의 실내악 편곡 등 소품 위주였고, 특정 작곡가의 작품만 가지고 음반을 만든 것이 딱 한 장 있었다.
홍콩을 본거지로 하는 홍콩 레코드가 직계 모체인 낙소스는 낙소스라는 이름을 쓰기 전부터 이미 꽤 여러 종류의 LP들을 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중국이나 홍콩 작곡가들의 작품들이었고 연주도 보통 중국이나 홍콩, 일본의 관현악단이 맡았다. 이들 녹음은 대부분 카탈로그에서 사라져 지금은 들어보기 힘들지만, 희귀 레퍼토리 전문을 표방하며 새로 출범시킨 산하 레이블인 마르코 폴로를 통해 나온 것 중에는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아 지금도 들어볼 수 있다.
1984년 3월 25~29일 닷새 동안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췐완 대회당(荃灣大會堂, Tsuen Wan Town Hall)에서 후쿠무라 요시카즈(福村芳一)의 지휘로 현대 관현악곡 세 곡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도 홍콩 레코드를 통해 마르코 폴로 레이블을 단 LP와 CD로 출반되었다. 이게 바로 이번 뻘포스팅의 떡밥인 마유즈미 토시로(黛敏郎, 1929-1997) 관현악 작품집 음반이다.
ⓟ 1984 Hong Kong Records Co., Ltd.
사실 마유즈미는 한국인들에게 꽤 애증이 얽히는 인물이다. 이 양반은 적어도 1970년대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전위적인 작풍과 일본 선불교 특유의 명상에 기반한 신비주의 컨셉을 보여주며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작가이자 극우 정치운동가였던 친구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 본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며 개뻘짓을 하다가 실패하자 어설프게 배를 갈라 자살한 뒤에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오른쪽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양반이 어떻게 극우파로 변모했는지는 이미 이 포스팅에서 언급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음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때 녹음된 작품들은 1950~60년대에 작곡된 곡들이었다. 수록 순서대로 포놀로지 생포니크(Phonologie symphonique, 1957. 직역하면 교향 음운론), 바카날(Bacchanale, 1954)과 교향시 '윤회(Samsara, 1962)' 인데, 마유즈미의 대표작들인 '열반 교향곡(1958)' 과 '만다라 교향곡(1960)' 이 작곡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짧게 말하자면 마유즈미가 창작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50년대의 두 작품에서는 마치 '고질라' 의 OST로 유명한 이후쿠베 아키라의 작품들처럼 리듬이나 음형의 반복이 사용되어 꽤 드라마틱한 면모를 보여준다. 심지어 '바카날' 의 시끌벅적한 초반부는 프리 재즈화된 빅 밴드의 연주를 듣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데, 물론 그러면서도 전자음악을 통해 얻은 음향에 관한 실험이나 분석을 통해 이후쿠베 류의 통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도 내비치고 있다.
반면 마지막 수록곡인 교향시 '윤회' 의 경우 1950년대 작품들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물론 중후반부에서는 타악기의 강렬한 리듬이나 날카로운 불협화음 연주로 대비를 주고 있지만 처음과 끝은 매우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작품의 제목인 불교 용어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비록 세 곡 합쳐서 수록 시간이 꼴랑 43분 약간 넘는 정도라 아쉽기는 했지만, 일단 마유즈미가 극우파로 변모하면서 맛이 가기 전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고 '일본작곡가선집' 의 원점 격인 CD라서 언제 한 번 사서 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볼 수 있고 디지털 다운로드 음원만 구입해서 듣는 방법도 물론 있지만, 일단 CD 자체를 구입하는 것이 낙뮤라에는 없는 라이너 노트도 입수할 수도 있을 테니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과 거리가 상당히 단축되어 있었던 독일 체류 중에 영국 아마존을 통해 주문했고, 1주일도 되지 않아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물건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다른 모양새였다.
CD 앞면부터가 일반적인 낙소스/마르코 폴로의 것과는 달랐는데, 아마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음반 커버 이미지를 복사한 듯한 속지가 맨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뒷면도 다른 낙소스 음반들과 달리 너무 단조로웠고, 녹음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게다가 지휘자인 후쿠무라 요시카즈의 알파벳 스펠링이 Yoshikawa Fukumura로 기재된 오타도 보였고. 하지만 정작 첫 번째 타격은 바코드 왼쪽에 있는 로고였다. 짤방에서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뚫어지게 들여다 보면 'COMPACT DISC' 밑에 검은 바탕으로 'DIGITAL AUDIO CD-R FORMAT' 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 물건은 마르코 폴로 원반이 아니라, 그 원반의 음원으로 아마존의 계열사들 중 하나인 크리에이트스페이스(CreateSpace)라는 업체가 낙소스 본사의 허가를 받아 공CD에 구워서 제작한 것이었다. 어쩐지 조악하다 싶었지. 하지만 속지라도 괜찮기를 바라고 일단 케이스를 열어봤다.
하지만 케이스를 열어봐도 뭔가 '없어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속지를 케이스에서 빼내 넘겨보니...
......
...이런거 사자고 지불한 14파운드가 아닌데???...
꽤 어이없어서 환불을 받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독일어도 어설픈데 영어로 클레임이나 제대로 걸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워서 그냥 포기했다. 물론 염가인 낙소스 음반들의 속지 해설들이 전반적으로 좀 대충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기는 하지만, 상당히 추상적인 현대음악 작품을 해설 없이 듣는다는 것도 난처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찝찝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에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구입한 음반에 대한 포스팅은 끝. 사실 이외에도 벤야민 누스라는 피아니스트가 우에마츠 노부오의 게임 음악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해 녹음한 앨범을 비롯해 꽤 구미가 당기는 물건들이 많았지만, 결국 유로화의 떨어질 줄 모르는 환율과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음반 가격, 유럽에서도 없어서 대서양 건너 미국이나 캐나다 등을 통해 주문해야 하는 어려움 등으로 인해 대부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음반은 아니지만, 독일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구입한 물건 하나가 더 있어서 그건 다음 기회에 또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