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곽에 빽빽하게 담아놓은 공연 팜플렛들 중에 흥미로운 것을 하나 찾았다. 아마 중3 때였나? 그 때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어느 공연의 팜플렛인데, 서울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996년 12월 26일에 개최했던 송년 음악회였다. 1부에서는 장귀오라는 작곡가의 서곡 '꿈 I, II, III' 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이, 2부에서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된 공연이었는데, 특이하게 2부에서 나오는 교향곡이 1부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의 관현악단이나 지휘자에 대해 별로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았었고, 그래서 공연도 그냥 설겅설겅 봤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그 때 출연한 지휘자 임원식과 피아니스트 윤기선이 한국 음악계에서 레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임원식이라는 인물이 한국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 지는 이후 계속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때 전주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거의 매 번 찾아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2002년 8월 27일에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일환으로 저 악단이 시벨리우스 음악회를 개최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난 뒤 울먹이면서 그 전날 임원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추모곡으로 바흐의 작품을 연주했다.
이후 해방 공간에서 잊혀진 월북 예술인들과 관련한 자료를 모으다가 거기서도 임원식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보고는 좀 놀랐었고,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임원식의 이력에 대해서도 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에 열린 교향악축제에서는 마지막 공연으로 임원식의 서거 10주기를 기념해 임시 편성된 운파 메모리얼 오케스트라가 일본의 노장 지휘자 토야마 유조의 지휘로 포레의 레퀴엠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을 연주한 공연도 관람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임원식이 지휘한 상업 음반이나 영상물은 내가 아는 한 현재 하나도 없고, 그나마 방송국에서 연주회를 중계하거나 녹음/녹화하는 작업이 본격화된 것도 1980년대 후반에 가서였기 때문에 임원식이 지휘한 공연의 녹음이나 영상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중에서 2001년 열린 서울국제음악회의 공연을 KBS 위성 1TV의 위성스페셜에서 녹화방송했는데, 그 영상을 지인이 KBS 미디어를 통해 DVD로 주문해 받았다고 해서 빌려볼 수 있었다.
서울국제음악제는 원래 1975년에 광복 30주년을 맞아 개최한 기념 음악제가 시발점이 되어 열리던 행사였는데, 1996년까지는 대한민국음악제라고 불렸다가 1997~2005년에는 서울국제음악제로, 2006년부터는 대한민국국제음악제로 계속 개칭을 거치며 이어지고 있다. 2009년에 개최되기 시작한 또 다른 서울국제음악제가 있어서 혼동의 여지도 있지만, 저 공연은 2001년에 개최된 것이므로 대한민국국제음악제라는 행사의 맥을 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2001년 서울국제음악제는 8월 28일부터 9월 2일까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는데, 임원식 지휘의 폐막 공연은 9월 2일에 있었다. 부제가 '베토벤의 밤' 이었던 만큼 모든 곡이 베토벤 작품이었는데, 좋게 보면 대중적인 선곡이었고 삐딱하게 보면 구태의연한 선곡이어서 크게 땡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원식이 이 공연 뒤-물론 이듬해 6월 1일까지 계속 지휘대에 섰다-1년도 되지 않아 눈을 감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지휘자의 최후반 공연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기록물이었다.
자막에 나와 있는 대로 관현악단은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임원식은 이 때 이미 80세를 넘긴 고령의 몸이었지만, 부축도 받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병세나 쇠약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1부는 내가 1996년에 본 음악회와 비슷하게 교향곡이었다. 수천 수만번 연주되고 있어서 닳고 닳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지겹다고 폄하할 수 없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연주는 전체적으로 중후한 인상이었지만, 8분음표 셋+4분음표 하나로 구성되는 1악장의 가장 중요한 동기를 제대로 소화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관현악의 합주력은 기대 이하였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온갖 반주와 오페라 일정에 시달리다 보니 연습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지휘하는 임원식 캡처. 교향곡은 암보로 지휘했는데, 아주 강렬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절도있는 스타일의 지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발도 카라얀 만큼은 아니지만 지휘대에 거의 고정시키고 팔놀림 만으로 악단을 이끄는 모습이었다.
관현악단 전체 연주샷. 현 파트는 14-12-10-8-6으로 맞췄고, 관악기는 가감없이 악보에 나온 그대로 편성했다. 트럼펫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관현악단에서 흔히 쓰는 로터리식을 쓰고 있었다.
2부의 연주곡도 마찬가지로 베토벤이었는데, 피아노 협주곡 5번이었다. 이것도 역시 무난한 선곡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절대 인정 안하는 부제지만 '운명과 황제', 그리고 5라는 숫자에 맞춘 듯한 모양새였다. 관현악 편성은 피콜로와 콘트라바순, 트롬본이 빠진 것을 빼면 1부와 동일했고, 현악기 숫자도 줄이지 않았다.
협연자는 지난 번 원경수 포스팅에서도 나온 이경숙이었다. 게다가 이 곡은 저 피아니스트가 리카르도 샤이 지휘의 로열 필과 연주했을 때 트러블을 일으켰던 곡이어서, '이번에는 어떠려나' 라는 식으로 다소 음흉한 속셈을 갖고 봤다. 물론 다행히 그런 사고는 없었지만.
협주곡 연주 때는 으레 그렇듯 총보를 놓고 지휘하는 임원식. 다만 노안 때문이었는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한 협연 무대라 그런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편안한 인상이었지만, 피아노에 너무 바짝 갖다댄 마이크 때문에 관현악과 피아노가 조용한 부분에서 어우러지는 인터플레이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문제점이 아쉬웠다.
사실 이런 음향 문제는 비단 KBS 뿐 아니라 아르떼TV 같은 신생 문화예술 전문 방송에서도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라, 단시간 해결은 무리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아르떼TV 쪽은 2011년 후반 들어 근접 마이킹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라 약간은 기대하고 있다.
협주곡 연주가 끝난 뒤 이경숙을 다독이고 있는 임원식.
앵콜곡도 역시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로 통일해 올 베토벤 콘서트로 마무리지었다.
사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녹화해둔 임원식의 공연 자료가 하나 더 있는데, 1997년 열린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이 합동으로 공연한 '연합교향악단 연주회' 의 실황이다. 이 실황은 지금은 없어진 A&C 코오롱에서 중계했는데, 주형기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임원식이 종전 직후 하얼빈 교향악단을 지휘해 개최한 공식 데뷰 콘서트의 첫 날 메인 연주곡이었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연주되었다.
다만 KBS의 경우 미디어 사업부가 있어서 복사 가능한 자료에 한해 DVD 제작을 해준다고 하지만, 이렇게 공중분해된 방송국의 자료 같은 경우에는 소유권이 어디에 있는지, 있어도 DVD 등의 제작과 판매가 가능한 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집의 AV 시스템도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도 화질과 음질이 조악해 자료 이상의 가치는 없어 보인다. 언제 쯤 임원식 뿐 아니라 국내 지휘자들이 남긴 공연 녹음과 영상의 체계적인 자료화가 진행되려나.
그리고 최근에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디스코그래피 사이트에서 제작한 CD를 구입해 들어본 것도 있고,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콘서트인 '아르스 노바' 에서 인상적으로 들어본 한 특이한 현대음악 작품의 CD도 지인이 입수했다고 해서 들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후속 포스팅은 이런 음반들 위주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