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90년대에 한국에서 열린 관현악단 연주회를 어느 정도 본 사람이라면 원경수라는 지휘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모두 단기 재임으로 끝났지만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이라는 당시 한국에서 알아주는 관현악단들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고, 이외에도 국내의 여러 악단을 지휘해 연주회를 열면서 존재감을 각인시킨 인물이었으니까.
다만 저 지휘자도 이제는 여든을 넘긴 고령이라 요즘에는 지휘대에 섰다는 소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시향 상임 지휘자를 장기 역임한 동갑내기인 정재동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은퇴하고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어서,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린 감도 있다.
하지만 해당 지휘자가 1997년에 가졌던 콘서트의 실황 일부를 운좋게 비디오로 녹화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지우지 않고 나름대로의 추억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한 지인이 KBS 미디어를 통해 예전의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정재동 영상처럼 DVD화 주문을 넣어 입수했다고 해서, 콘서트 전체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KBS 교향악단은 1990년대에 KBS홀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두 차례 개최하는 정기 연주회 이외에도 FM 콘서트라는 일종의 방송 연주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었다. 다만 이름처럼 라디오 방송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것이 아닌, KBS홀에 청중들을 모아놓고 여는 일반 연주회처럼 진행되었고 몇몇 공연은 위성 1TV의 위성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녹화방송되기도 했다.
1997년 6월 5일 열린 FM 콘서트는 모두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작품만으로 편성된 프로그램의 특이함 때문에 관심을 끌었는데, 그것 보다는 번호 붙은 교향곡을 여섯 곡만 남긴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데도 '7번' 교향곡이 메인 프로그램에 선곡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부의 두 번째 곡으로 잡힌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경우 저 '7번' 의 1악장으로 계획되었다는 점 때문에 묘한 연관성이 있었고. (문제의 '7번' 에 대해서는 이 포스팅을 참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촌스러운 CG로 대충 만든 듯한 콘서트 로고. 하지만 이런 것까지 따질 겨를은 없었고, 일단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첫 곡은 슬라브 행진곡이었는데, 지금은 외래어 표기법이 바뀌어 '차이콥스키' 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차이코프스키' 라는 표기가 더 익숙하다. 물론 실제 러시아어 발음대로 하자면 프를 저렇게 길게 발음하지 않기 때문에 줄여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지휘하는 원경수의 모습. 물론 8년이라는 시간차와 지휘자 개개인의 스타일, 건강 상태라는 변수들이 있지만, 2005년 교향악축제에서 상당히 경제적으로 지휘한 정재동보다는 더 움직임의 폭이 크고 절도가 있는 지휘 스타일이었다.
2층 객석 오른쪽의 카메라로 잡은 것으로 보이는 무대 전체샷. 제1바이올린을 지휘자 왼쪽에, 비올라를 오른쪽에 놓는 악기 배치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악의 만듦새는 정재동의 서울시향 녹음과 비슷했지만, 정재동보다는 좀 더 진중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국가가 인용되며 박력있게 끝나는 종결부에서는 꽤 여러 지휘자가 생략하는 도돌이표 반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었다.
1부의 두 번째 연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사실 2부에 연주할 '7번' 의 구도를 생각해 보면, 이 3번 다음에 차이콥스키 사후 제자인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관현악 편곡해 출판한 '안단테와 피날레' 를 곧바로 연주하는 것이 더 구색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인지 결국 이 3번만 연주하는 것으로 결정된 모양이었다.
협주곡의 독주자는 이경숙이었는데, 좀 거시기하겠지만 저 피아니스트는 내게 1980년대 리카르도 샤이의 지휘로 내한 공연을 가진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 연주 도중 암보한 악보를 잊어버리는 난처한 실수를 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물론 그 때 꼬꼬마였던 내가 그 연주회장에 가서 그 모습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충격적인 장면이었는지 그 당시 음악 잡지들에서는 정말 빼놓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 그 때 저 피아니스트가 그랬다고 이 때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짧은 관현악 서주 뒤 피아노가 그것을 모방하듯 등장할 때 갑자기 음이 악보와 전혀 다르게 나오면서 첫 독주부를 마무리짓는 이상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음반에서도 이렇게 연주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연주 전 악보를 이상하게 암기했거나 살짝 기억력이 흐트러져서 얼버무리고 간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처음부터 눈에 띄는 미스가 있었고, 또 후반부 카덴차에서도 화음 난타 대목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는 등 연습 부족인 티가 너무 많이 나서 보기에 좀 민망했다. 겨우 16분 짜리 단악장 협주곡임에도, 혹은 그랬기 때문에 곡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볼 때 오히려 '안단테와 피날레' 까지 안한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2부에서는 앞에 쓴 대로 세묜 보가티례프가 복원했다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7번' 이 연주되었다. 당시 음반으로도 전혀 접해볼 수 없었던 곡인 만큼 이 곡의 연주만 따로 녹화했는데, 이번에 공연 전체의 실황을 본 결과 아무래도 독주자와 의견을 맞춰야 하는 협주곡 특성상 좀 느린 듯이 시작한 초반부를 이번에는 꽤 빠르게 연주하고 있었다.
상당히 드물게 연주되는 곡이지만, 원경수는 꽤 자신이 있었는지 암보로 지휘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게, 원경수는 1991년에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이 곡을 녹음한 적이 있었고 1993년 6월 25일에는 서울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가진 공연에서 이 곡을 한국 초연한 경력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청중들 대부분이 처음 듣는 곡이어서였는지 몰라도, 이 곡의 연주 때는 매 악장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런 악장 사이의 박수를 상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당시 비디오로 녹화할 때도 좀 짜증이 났고, 이후 비디오 데크를 오디오에 연결해 소리만 뜰 때도 가능한한 저 박수를 모두 잘라버렸다.
그리고 비디오보다야 공식 녹화 소스로 제작한 DVD였으니 음질과 화질은 내 비디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녹화 테이프를 뜰 때 기존에 뭔가가 녹화되었던 비디오 위에 그대로 녹화한 티가 심하게 났다. 특히 조용하게 끝나는 2악장에서는 웬 한국어 나레이션-"이곳에는 좌측통행의 구분이..."-까지 들리는데, 당시 KBS에서 얼마나 공연 자료 보존을 건성으로 했는 지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라 꽤 뒷맛이 씁쓸했다.
앵콜로 현악 4중주 1번의 2악장을 현악 합주로 편곡한 '안단테 칸타빌레' 를 연주하며 마무리했는데, 느리고 서정적인 소품이라는 무난한 선곡이라 편안하게 들을 수 있...지는 못했다. 위에 쓴 것처럼 계속 선명하게 들리던 그 나레이션 때문에.
비록 KBS의 그 당시 막장 자료 제작 관행, 그리고 협주곡 연주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과거의 완전한 확인이 모두 기분좋게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막장화되어 법인화 과정을 밟고 있는 악단이 그 당시 인생의 황혼기를 맞고 있던 지휘자의 지휘로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귀중한 자료였다. 그리고 덕분에 원경수가 모스크바 필과 녹음한 저 교향곡 앨범을 더 구하고 싶어졌고. 하지만 문제는 외국에서도 이미 폐반 혹은 절판이다 보니...lll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