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과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한 것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한국 관현악단들 중 녹음 작업에 이 정도 열의를 갖고 있는 악단은 내가 아는 한 서울시향이나 KBS향을 빼면 별로 없는 걸로 안다. 그리고 해당 전집 음반 이전에도 이미 세 장의 라이브 앨범을 낸 바 있는데, 그것도 저기 링크된 글에서 조금 주절댄 바 있다.
아직 명칭이 '강남구립교향악단' 혹은 '강남교향악단' 이었던 시절이었던 1990년대 후반부터 이 악단은 한국 관현악단들이 한 자리에서 모여 연주하는 가장 큰 행사인 교향악축제에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가장 처음 참가한 것은 1998년이었다.
4월 10일에 열린 공연에서 이 악단은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캔디드' 서곡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김남윤+황대진 협연),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물론 지휘는 상임 지휘자인 서현석이 맡았는데, 이 중 2부의 메인 레퍼토리였던 교향곡이 이즘레코드를 통해 사가반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창단된 지 1년 밖에 안되어 합주력이나 표현력 면에서 성긴 점이 적잖게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었고, 게다가 사후 편집이 불가능한 무편집 공연 실황이라는 단점도 있었지만 초짜 시절의 모습을 음반으로 담아낸 배포는 꽤 대담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악단은 1999년에도 두 번째로 교향악축제에 참가했고, 4월 25일에 김신욱의 교향 서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임종필 협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을 차례로 연주했다. 그리고 이 때의 실황 중 교향곡도 마찬가지로 P&A 클래식스라는 곳에서 사가반으로 제작되었다.
이 앨범이 지난 번 2004 경남국제음악콩쿠르 결선 실황 음반과 함께 주문한 것인데, 위의 차이콥스키 5번은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서 그걸로 들어볼 수 있었지만 이건 아예 실물 자체를 접해보지 못한 물건이라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들어보니 오히려 연주 양상은 5번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물론 음악의 감성적인 면을 중시하는 한국 청중들의 대체적인 특성을 고려한 '대중적인' 선곡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저 4번이 악단이나 지휘자 입장에서 공연하기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1악장에서 3박이라는 기본 박자감을 계속 흐트러놓는 엇박이나 크로스리듬이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이런 리듬 처리가 깔끔해야 좀 제대로 연주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게 제대로 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마 마지막 4악장에서 빵빵 터뜨려준 포르티시모 덕분에 어느 정도 무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4악장의 박력이 1악장에서 보여준 엉성함이나 2악장에서 나타나는 단조로움을 보상해 주지는 못했다.
일단 연주나 녹음의 완성도 보다는 레어템 하나를 건졌다는 의의라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0년에 참가한 세 번째 교향악축제에서 공연한 실황이 세 번째이자 이 악단의 마지막 실황 음반으로 제작되었다. 4월 14일에 열린 공연이었는데, 이영조의 오페라 '처용' 중에서 도깨비춤,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변주곡(홍성은 협연),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무대에 올랐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과 4번을 연달아 했으니 6번이 나올 차례라고 생각한 것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러시아 레퍼토리를 메인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들 조차 한국 정부의 선곡 변경 요구를 애써 무마해 가며 공연해야 했던 '쏘련' 작곡가의 곡이지만, 1980년대에 공산권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해금이 이루어진 뒤로는 꽤 자주 콘서트에서 공연되는 곡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선곡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도 1998년 실황을 제작한 이즘레코드에서 사가반으로 발매했는데, 이건 황학동의 중고음반점 중 하나인 장안레코드에서 2007년 쯤엔가 이미 구입한 상태였다. 같은 음반사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다소 촛점이 불분명하고 흐릿한 차이콥스키 5번과 달리 이 음반의 녹음은 꽤 선명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비록 포르테 이상의 대목에서 소리가 흩어지는 현상은 여전했지만.
연주 자체도 차이콥스키 5번에서 보여준 너무 조심스러운 기색이나 4번에서 보여준 무대뽀 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인데, 물론 한국 관현악단 대부분이 가진 맹점인 '섬세함의 부족' 은 어쩔 수 없었지만 트럼펫 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휘자답게 관악 파트를 제어하는 솜씨는 꽤 눈에 띄었다.
물론 강렬하다 못해 자극적일 정도인 '러시아식 금관' 의 맹위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차이콥스키 교향곡 못잖게 기복이 심한 이 곡에서 너무 날뛰다가 균형 감각을 잃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소화한 것에서 악단이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험삼아 낸 세 장의 라이브 앨범 이후, 이들은 차례로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을 한국 관현악단 역사상 최초로 완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강남심이 소속된 강남문화재단에서 관계자와 통화를 했을 때는 거기서도 저 라이브 앨범들은 자료용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 외의 재고가 없다고 했는데, 그 세 장 중 두 장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수록된 나머지 한 장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국립예술자료원에서 회원 대출이 가능한 CD로 소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놈의 '소유욕' 때문에 말이지.
그리고 산 지는 몇 달 됐지만, 역시 스캐너 문제로 미뤄뒀던 여타 CD들에 관해서도 계속 포스팅할 예정이다. 역시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