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아침에 두 번째로 부산행 버스를 탔다. 부산시향 공연 관람과 새 도시철도 노선 탑승, 처묵처묵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될(???) 이 방문에 맞춰 나름대로 설렁설렁하게 언제 어디서 뭘 어떻게 할 지를 짜놨는데, 세상 일이 뜻대로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이번에도 초반에는 그랬다.
내가 9시 20분에 동서울터미널에서 탄 버스는 예정대로라면 4시간 20분 뒤인 13시 40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끝내주는 정체를 만나면서 1시간 늦은 14시 43분 쯤에야 부산종합터미널에 닿을 수 있었다.
좀 일찍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돌아다니려던 계획은 당연히 망했고, 휴게소에서도 뭘 먹은 게 없었으니 일단 끼니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뭘 하든 간에 시 외곽인 여기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지하철이든 버스든 타야 했다.
3년 전 갔을 때 3500원이었던 1일권 가격도 이제는 4000원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만 있으면 하루 종일 노선 하나를 빼고는 모든 부산 도시철도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으니, 별로 손해보는 느낌은 없었다.
2일 하룻 동안 내 이동을 담당해준 1일권. 판매기 잉크가 부족했는지 인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의 다른 지하철이나 도시철도에서는 모두 카드나 칩으로 대체된 지 꽤 됐지만, 여기서는 여전히 1회용 승차권과 1일권을 모두 종이 승차권으로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교통카드 사용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정액권 시대로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있어서 약간 귀찮기도 했다.
노포역에서 서면역까지 가는 도중에. 4호선과 부산-김해 경전철의 개통으로 전체 노선도가 꽤 색채감있고 또 복잡해져 있었다. 그리고 차량 내부도 마찬가지로 복잡했고.
어쨌든 서면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뒤,
첫 날 처묵처묵 목표 지점에서 제일 가까운 개금역에 도착했다. 여전히 뭔가 압박스러운 역명판의 글자 폰트가 인상적이다.
일단 개금시장만 찾으면 쉽다고 해서, 시장이 표기되어 있던 1번 출구로 나왔다. 하지만 누군가가 네이뷁에 표시해둔 위치가 병맛이었던 터라, 좀 헤매야 했다.
결국 약국과 안경점 사이에 있는 시장 골목 입구로 들어가서 찾아보는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이게 훨씬 쉬웠다.
들어가서 왼쪽 두 번째 골목에서 본 '원조 개금밀면 해육식당' 의 세로 간판. 부산에서 첫 끼니는 여기에서 때우기로 정해놓은 상태였고, 늦게나마 다시 일정이 예정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식사 시간 대에는 사람이 꽤 많다 보니 이렇게 줄을 세우는 도구들까지 갖춰놓고 있었지만, 내가 갔을 때는 오후 3시 43분이었으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가게 내부는 오래된 집이라는 인상은 아니었고, 메뉴는 매우 단순했다. 밀면과 비빔밀면 두 가지에 양만 대짜와 소짜로 나뉘어 있었다. 뭘 먹을 지도 미리 결정하고 왔기 때문에 주저 없이 주문했다. 밀면 대짜.
간단한 테이블 세팅. 수저통 옆의 병은 쓰여진 대로 식초병이다.
김치와 육수는 셀프로 리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육수를 우리는 데 쓰는 뼈와 고기가 국내산이라는 안내문도 보인다.
달마도의 지긋한 표정 밑에 눈에 띄는 '물은 셀프'. 물받이가 약수터에서 볼 법한 하늘색 바가지로 되어 있어서 이채로웠다.
주문한 밀면 대짜. 뭔가 없어보인다고 생각하면 기분 탓...이 아니라 당연하다. 오이를 빼달라고 했으니까. 오이와 척을 진 이상 모양 보다는 맛이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지만, 없어보이는 건 둘째 치고 맛까지 없으려나 하는 노파심도 들었다. 난생 처음 맛보는 밀면이었으니까.
국물 색깔은 연한 갈색을 띄고 있었고, 약간 한약 비슷한 냄새도 났다. 하얗고 약간은 질겨 보이는 면사리 위에는 꽤 매워 보이는 붉은 양념장과 장조림에 쓸 법한 양지 부위 고기가 죽죽 찢겨 올라와 있었다.
일단 짜장면 비비듯이 젓가락을 양 손에 쥐고 양념장과 고기 꾸미, 면사리를 살살 풀어헤쳐 섞어봤다. 역시 오이를 뺐으니 없어 보이는 건 똑같다. 면을 잘라먹을 수 있도록 가위도 내왔지만, 함흥냉면이 아닌 이상 질길 것 같지 않아 일부러 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양념장 자체만으로도 매워 보여서, 무김치와 함께 내놓은 (겨자로 보이는) 양념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한 젓가락 먹어 보니, 확실히 메밀국수를 쓰는 평양냉면보다는 질깃했다. 하지만 잘 씹어 먹으면 무리 없이 넘어갔고, 양념장도 맵기는 했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국물도 한약 냄새가 좀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 냄새 때문인지 잡내 같은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짜인 만큼 양도 꽤 되었고.
한 4/5 쯤 먹었을 때. 사실 맵다는 느낌은 이렇게 그릇을 비워가면서 점점 더 강해졌는데, 처음에 풀어헤쳐줄 때 양념장이 잘 섞이지 않았던 것 같다. 삶은 달걀을 이렇게 여러 번 썰어놓은 형태로 올려주는 것도 특이했다.
무김치 몇 쪽과 손도 안댄 겨자 양념을 빼고는 처묵 완료. 밀면이라는 음식 자체가 냉면처럼 노포가 많은 것도 아니라고 하고, 그냥 6.25 전쟁 후 궁핍했던 한국에 미국이 공여한 밀가루로 면을 만들어 먹은 것이라는 만큼 고급스럽다고 하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런 사실까지도 알고 먹은 것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이렇게 소박한 국수에 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역사나 노포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산 사람이 아니니 부산 출신으로 타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밀면을 그리워 한다는 향수병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비교적 저렴하게 냉면 대신 먹을 수 있는 찬 국수 요리라는 점에서 이게 왜 명물이냐고 하는 의문에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다음 방문 때도 또 맛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 물론 오이 꾸미 없이.
원래 계획은 여기서 점심을 먹은 뒤 부산-김해 경전철을 타보는 것이었지만, 그러려고 하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있는 다른 신설 노선을 타보기로 했다. 해당 노선 탐방기와 그 뒤의 처묵처묵은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