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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콘서트라는 음악회에 대해서는 이미 이 포스팅에 어느 정도 끄적였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저 공연을 난생 처음 가본 것이 지난 달 29일이었다.
다만 장소가 몇 차례 옮겨갔는지 실제로 가서 본 '공연장' 의 모습은 해당 콘서트의 홈페이지에서 본 것과는 달랐다. 이번이 세 번째 자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일단 매봉역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접근성이 딱히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 날 공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요인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윤이상의 4중주 '영상'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 후배가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배는 이미 학교 다닐 때 다른 학생들-선후배와 동기 포함-과는 상당히 차별화되는 실험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어떤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 충격과 공포를 안겨줄 지 기대했다.
공연장은 그냥 평범한 건물의 지하 1층이었고, 내려가는 계단 옆의 화이트보드에는 그 날의 공연 이름과 출연진이 기재되어 있었다. 후배의 이름 중간 글자가 잘못 기재된 게 옥의 티였는데, 사실 이미 공연에 대해서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왔기 때문에 자세히 눈여겨 볼 필요는 없었다.
지하실 문앞에서 공연비 2만원을 지불한 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신발을 왜 벗는 지 궁금하다면 궁금하겠지만, 이 공연장은 무대와 청중석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도 없고, 청중들은 마룻바닥에 걸터앉아서 공연을 보게 되어 있다. 생경하기는 했지만 이미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들은 바 있으니 딱히 충격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공연이 오래 진행될 수록 다리가 아파오던 게 좀 거시기하기는 했지만.
공연장 내부의 '무대' 격인 공간. 연륜이 느껴지는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뒤쪽에는 마치 녹음 스튜디오에서 볼 만한, 음향기기가 들어 있는 콘솔 룸이 보이는 창문이 있다. 콘솔 룸이 바로 뒤에 붙어있다는 것은 이 공간이 콘서트 외에 녹음 스튜디오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용도로도 종종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지하실을 리모델링한 자그마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음향 설계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지, 천장에 음향판을 덧대놓고 조명 기기들을 설치한 것도 볼 수 있었다. 관람 형태가 좀 파격적일 뿐이지, 공연장이 갖춰야 할 기본 기기나 설계는 갖추고 있었다. 다만 연주자 대기실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콘솔 룸을 대신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이 날 공연 프로그램. 축소하면 글자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보정하지 않은 크기 그대로 올렸는데, 일본의 도호가쿠엔 음대 출신들로 구성된 창작 동인인 오토센닌(音仙人)과 한국의 창작 동인인 혜윰의 합동 공연 형식이었다. 다만 혜윰의 구성원인 이의경 역시 도호가쿠엔 출신이라서, 작곡가들은 모두 도호에 적을 두고 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 또한 갖추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단촐한 대신, 이 공연은 각자의 곡이 연주되기 전에 작곡자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고 공연에 들어가는 일종의 렉처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연주곡 중에는 '내 작품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작곡자 자신의 곡 해설을 매우 삼갔던 쇼스타코비치처럼 해설 없이 막바로 공연에 돌입하는 이도 있었다.
첫 곡은 도쿄예대 방악과-邦樂. 일본에서는 전통음악을 이 단어로 칭한다-출신인 샤쿠하치(尺八) 연주자 쿠로다 세이쿄가 미야기 현의 한 사찰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 곡인 오우슈사시(奥州薩慈)를 어느 정도 즉흥성을 띄게 재해석해서 연주한 것이었다.
사실 샤쿠하치라는 악기가 내게 완전히 생경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학 시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샤쿠하치 주자가 초빙되어 진행된 특별 강연을 들었던 바 있다. 다만 저 강연 이후 내가 샤쿠하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고, 이번이 두 번째 대면이 되었다. 당시의 강연이 주로 주법이라던가 현대적 응용 방식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이번 공연은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좀 더 '일본적인'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연주자 자신이 샤쿠하치 주자인 만큼 악기에 대해 간략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해설을 했는데, 이 곡에 내재된 의미는 '악기와 자신을 돌본다' 이며, 과거에는 걸인들이 이 악기를 불고 다니면서 구걸을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 그 전통이 이어져 곡의 절정에 달하는 순간에 연주자는 적선을 해준(=이 경우에는 음악을 들어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도 했다.
실제로 들어본 곡은 일본 전통 음악의 기본 구성 원리인 서-파-급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정적이고 때로는 처량하게도 들렸는데, 다양한 시김새라던가 음의 떨림, 숨과 소리의 강한 섞임 같은 면은 한국의 퉁소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곡의 음계라던가 진행 방식은 한국 전통음악의 그것과는 다른 편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국적인 느낌도 물씬 풍겼다.
두 번째 곡은 사사키 에리의 안개구름(層雲. 층운)이라는 오보에+첼로+피아노 3중주곡이었는데, 제목대로 층층이 쌓여 매우 가깝게 깔린 구름의 형상을 표현했고 중간부에서는 도호 재학 시절 들었다는 재독 작곡가 박영희의 강의를 상기하며 한국과 일본의 전통음악 장단을 의식했다고 해설했다. 곡의 분위기는 구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중간부에서 작곡자의 코멘트 대로 뭔가 틀이 잡힌 동적인 진행도 엿보였다.
세 번째 곡이자 1부 마지막 곡은 상술한 후배인 이의경의 '...조용히...깊어진 품으로...' 라는 곡이었는데, 이 날 연주자로 출연한 모든 이들이 '무대' 를 가득 메우고 연주했다. 박노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했는데, 혼돈 상황과 그 속에 있는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반부에서는 특히 호흡에 관해 매우 세밀하게 다룬 듯 했는데, 연주자들이 악기를 잡지 않고 다양한 들숨과 날숨을 주고받다가 여러 형태의 빈 병을 불기도 하고, 곡이 소란스러워질 즈음에는 보면대에 매단 플라스틱 윈드차임을 치고 뒤흔들며 파열음을 곁들이기도 했다. 소리꾼은 그 속에서 구음을 내면서 동참하고, 후반부에는 의도한 것인지 핸드폰 벨소리와 DMB의 소리가 곁들여지면서 끝맺었다. 시쳇말로 학창 시절 보여준 '똘끼' 가 좀 더 강화된 모습이었는데, 보여지는 면모로 따지자면 2부에서 연주된 두 곡과 함께 상당히 인상적인 곡이었다.
2부의 첫 곡으로는 미야가와 신이치로의 'a small Bother for violin and composer' 라는 곡이 '연주' 되었는데, 사실 연주라는 표현 보다는 상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종의 음악극이었다. 작곡자의 일상적인 행위를 변형시켜서 무대화했다고 설명했는데, 대체적인 스토리나 바이올린 주자가 연주해야 할 대목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작곡자 자신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연기는 그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되, 즉흥성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리고 딱히 고정된 대사가 없던 만큼, 언어 자체로 어필하기 보다는 마치 촌극 무대처럼 다양한 사물과 상황을 즉석에서 활용해 연기하는 모습이었고 영어와 일본어, 가끔 한국어도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였다. 해프닝 측면으로 보자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음악극 풍의 공연 분위기는 바로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작곡자 우메키타 나오아키는 자신의 곡인 '금지된 노래(禁じられた歌)' 에 대해 다른 이들과 달리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고 바로 '공연' 에 임했다. '무대' 중앙에는 종이컵에 담은 양초에 촛불이 밝혀져 있었고, 컵 주변으로 붉은 실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작곡자를 포함한 열 명의 '연주자' 들은 촛불 주변에 둘러앉아 악보를 펴놓고 마치 밀교의 비밀 의식 같은 분위기를 잔뜩 내면서 '연주' 를 시작했다.
아무 악기 없이 열 명의 목소리가 주가 되는 곡이었는데, 다양한 무성음과 들숨/날숨, 신음소리, 파편화된 단어의 의미없는 중얼거림 등이 계속 이어지며 마치 말싸움 하듯 격렬한 분위기로 이어지기도 하고, 마법 주문을 외우듯이 웅성이기도 하면서 진행되었다. 마지막에는 서로 잡고 있던 실을 끊어버리고 촛불을 끄는 것으로 마무리했는데, 미야가와의 곡이 구체적인 일상을 각색했다면 이 곡은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청중 개개인에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인 느낌을 주는 곡으로 여겨졌다.
공연의 마지막은 윤이상의 '영상' 이 장식했는데, 창작 활동 중기의 걸작 실내악 작품이라 음반으로는 여러 종류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 공연으로 듣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소한 편성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연주 난이도의 곡이라 그랬는지 바로 전에 자작곡을 선보였던 우메키타가 지휘했는데, 최상급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열성적이고 진지하게 연주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곡 전에 공연된 온갖 전위적인 곡들을 경험한 뒤라 그런지 되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곡으로까지 들렸는데, 초연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 연주자들도 힘들게 소화하던 곡을 이제는 갓 학생 신분을 벗어난 이들이 모여 연주하는 모습은 인간의 기교나 표현력에 아직은 정해진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 보수적인 취향의 감상자라면 이 날 공연에 대해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냐' 고 격하게 반발할 지도 모르지만, 이미 몇십 년 전에 장르는 다르지만 프리 재즈의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앨버트 에일러가 남긴 "이제 음은 중요하지 않아. 느낌이지." 는 말을 상기시키는 공연이기도 했다. 또 이 공연의 주최자 박창수씨가 공연 전과 후에 남긴 코멘트에도 나왔듯이, 이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라면 처음 접했을 이 음악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예 듣지도 않고 거부하는 것과, 듣고 나서 자신의 주관을 세우고 수용 혹은 거부하는 것은 차원이 상당히 다르다. 적어도 이 날 공연을 직접 들었던 사람이라면, 현대음악의 다양한 사조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작품들을 공개적이든 마음 속이든 나름대로 음미하고 품평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누구든 일치하는 생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작곡이라는 것을 대학에서 전공한 만큼, 아직 늦깎이 백수이기는 하지만 작곡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인지하고 있고 또 그 활동을 위해 갖가지 음악을 경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 와 함께 상당히 흥미롭고 또 귀한 기회였다. 물론 아직까지 내 귀나 취향, 스타일은 좀 보수적이라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은 끝까지 남을 것 같지만.
공연이 끝난 뒤의 출연자 단체 사진. 조명이 좀 강해서 영 좋지 않게 나와버렸다. 주최자 박창수씨의 말에 따르면, 일본 측 출연자들은 예정되었던 지원이 취소되는 바람에 자비를 들여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물론 이 공연이 한-일 우호 음악회 같은 거창한 표어를 달고 진행한 것은 아니라서 특별히 일본 음악인들의 내한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억지로 표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아직 자국 현대음악도 찬밥 신세인 한국의 현실에서 정말 듣기 힘든 주변국의 최신작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사람의 행동으로 자발적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또 청중 쪽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내 오른편에서 별로 지루한 기색도 없이 모든 곡들을 사뭇 진지하게 듣던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취학 전의 아이들이나 초등학생들에게 현대음악을 들려주면 오히려 일반적인 고전음악보다 더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다소 어렵고 난해하게 들었을 지 모르지만, 과연 그 아이에게 이 날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다만 장소가 몇 차례 옮겨갔는지 실제로 가서 본 '공연장' 의 모습은 해당 콘서트의 홈페이지에서 본 것과는 달랐다. 이번이 세 번째 자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일단 매봉역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접근성이 딱히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 날 공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요인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윤이상의 4중주 '영상'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 후배가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배는 이미 학교 다닐 때 다른 학생들-선후배와 동기 포함-과는 상당히 차별화되는 실험적인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어떤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 충격과 공포를 안겨줄 지 기대했다.
지하실 문앞에서 공연비 2만원을 지불한 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신발을 왜 벗는 지 궁금하다면 궁금하겠지만, 이 공연장은 무대와 청중석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도 없고, 청중들은 마룻바닥에 걸터앉아서 공연을 보게 되어 있다. 생경하기는 했지만 이미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들은 바 있으니 딱히 충격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공연이 오래 진행될 수록 다리가 아파오던 게 좀 거시기하기는 했지만.
프로그램이 단촐한 대신, 이 공연은 각자의 곡이 연주되기 전에 작곡자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고 공연에 들어가는 일종의 렉처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연주곡 중에는 '내 작품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작곡자 자신의 곡 해설을 매우 삼갔던 쇼스타코비치처럼 해설 없이 막바로 공연에 돌입하는 이도 있었다.
첫 곡은 도쿄예대 방악과-邦樂. 일본에서는 전통음악을 이 단어로 칭한다-출신인 샤쿠하치(尺八) 연주자 쿠로다 세이쿄가 미야기 현의 한 사찰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 곡인 오우슈사시(奥州薩慈)를 어느 정도 즉흥성을 띄게 재해석해서 연주한 것이었다.
사실 샤쿠하치라는 악기가 내게 완전히 생경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학 시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샤쿠하치 주자가 초빙되어 진행된 특별 강연을 들었던 바 있다. 다만 저 강연 이후 내가 샤쿠하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고, 이번이 두 번째 대면이 되었다. 당시의 강연이 주로 주법이라던가 현대적 응용 방식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었다면, 이번 공연은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좀 더 '일본적인'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연주자 자신이 샤쿠하치 주자인 만큼 악기에 대해 간략하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해설을 했는데, 이 곡에 내재된 의미는 '악기와 자신을 돌본다' 이며, 과거에는 걸인들이 이 악기를 불고 다니면서 구걸을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 그 전통이 이어져 곡의 절정에 달하는 순간에 연주자는 적선을 해준(=이 경우에는 음악을 들어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도 했다.
실제로 들어본 곡은 일본 전통 음악의 기본 구성 원리인 서-파-급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정적이고 때로는 처량하게도 들렸는데, 다양한 시김새라던가 음의 떨림, 숨과 소리의 강한 섞임 같은 면은 한국의 퉁소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곡의 음계라던가 진행 방식은 한국 전통음악의 그것과는 다른 편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국적인 느낌도 물씬 풍겼다.
두 번째 곡은 사사키 에리의 안개구름(層雲. 층운)이라는 오보에+첼로+피아노 3중주곡이었는데, 제목대로 층층이 쌓여 매우 가깝게 깔린 구름의 형상을 표현했고 중간부에서는 도호 재학 시절 들었다는 재독 작곡가 박영희의 강의를 상기하며 한국과 일본의 전통음악 장단을 의식했다고 해설했다. 곡의 분위기는 구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중간부에서 작곡자의 코멘트 대로 뭔가 틀이 잡힌 동적인 진행도 엿보였다.
세 번째 곡이자 1부 마지막 곡은 상술한 후배인 이의경의 '...조용히...깊어진 품으로...' 라는 곡이었는데, 이 날 연주자로 출연한 모든 이들이 '무대' 를 가득 메우고 연주했다. 박노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했는데, 혼돈 상황과 그 속에 있는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반부에서는 특히 호흡에 관해 매우 세밀하게 다룬 듯 했는데, 연주자들이 악기를 잡지 않고 다양한 들숨과 날숨을 주고받다가 여러 형태의 빈 병을 불기도 하고, 곡이 소란스러워질 즈음에는 보면대에 매단 플라스틱 윈드차임을 치고 뒤흔들며 파열음을 곁들이기도 했다. 소리꾼은 그 속에서 구음을 내면서 동참하고, 후반부에는 의도한 것인지 핸드폰 벨소리와 DMB의 소리가 곁들여지면서 끝맺었다. 시쳇말로 학창 시절 보여준 '똘끼' 가 좀 더 강화된 모습이었는데, 보여지는 면모로 따지자면 2부에서 연주된 두 곡과 함께 상당히 인상적인 곡이었다.
2부의 첫 곡으로는 미야가와 신이치로의 'a small Bother for violin and composer' 라는 곡이 '연주' 되었는데, 사실 연주라는 표현 보다는 상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종의 음악극이었다. 작곡자의 일상적인 행위를 변형시켜서 무대화했다고 설명했는데, 대체적인 스토리나 바이올린 주자가 연주해야 할 대목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작곡자 자신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연기는 그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되, 즉흥성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리고 딱히 고정된 대사가 없던 만큼, 언어 자체로 어필하기 보다는 마치 촌극 무대처럼 다양한 사물과 상황을 즉석에서 활용해 연기하는 모습이었고 영어와 일본어, 가끔 한국어도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였다. 해프닝 측면으로 보자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음악극 풍의 공연 분위기는 바로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작곡자 우메키타 나오아키는 자신의 곡인 '금지된 노래(禁じられた歌)' 에 대해 다른 이들과 달리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고 바로 '공연' 에 임했다. '무대' 중앙에는 종이컵에 담은 양초에 촛불이 밝혀져 있었고, 컵 주변으로 붉은 실이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작곡자를 포함한 열 명의 '연주자' 들은 촛불 주변에 둘러앉아 악보를 펴놓고 마치 밀교의 비밀 의식 같은 분위기를 잔뜩 내면서 '연주' 를 시작했다.
아무 악기 없이 열 명의 목소리가 주가 되는 곡이었는데, 다양한 무성음과 들숨/날숨, 신음소리, 파편화된 단어의 의미없는 중얼거림 등이 계속 이어지며 마치 말싸움 하듯 격렬한 분위기로 이어지기도 하고, 마법 주문을 외우듯이 웅성이기도 하면서 진행되었다. 마지막에는 서로 잡고 있던 실을 끊어버리고 촛불을 끄는 것으로 마무리했는데, 미야가와의 곡이 구체적인 일상을 각색했다면 이 곡은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청중 개개인에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인 느낌을 주는 곡으로 여겨졌다.
공연의 마지막은 윤이상의 '영상' 이 장식했는데, 창작 활동 중기의 걸작 실내악 작품이라 음반으로는 여러 종류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 공연으로 듣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소한 편성이지만 상당히 어려운 연주 난이도의 곡이라 그랬는지 바로 전에 자작곡을 선보였던 우메키타가 지휘했는데, 최상급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열성적이고 진지하게 연주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곡 전에 공연된 온갖 전위적인 곡들을 경험한 뒤라 그런지 되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곡으로까지 들렸는데, 초연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 연주자들도 힘들게 소화하던 곡을 이제는 갓 학생 신분을 벗어난 이들이 모여 연주하는 모습은 인간의 기교나 표현력에 아직은 정해진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 보수적인 취향의 감상자라면 이 날 공연에 대해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냐' 고 격하게 반발할 지도 모르지만, 이미 몇십 년 전에 장르는 다르지만 프리 재즈의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앨버트 에일러가 남긴 "이제 음은 중요하지 않아. 느낌이지." 는 말을 상기시키는 공연이기도 했다. 또 이 공연의 주최자 박창수씨가 공연 전과 후에 남긴 코멘트에도 나왔듯이, 이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라면 처음 접했을 이 음악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예 듣지도 않고 거부하는 것과, 듣고 나서 자신의 주관을 세우고 수용 혹은 거부하는 것은 차원이 상당히 다르다. 적어도 이 날 공연을 직접 들었던 사람이라면, 현대음악의 다양한 사조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작품들을 공개적이든 마음 속이든 나름대로 음미하고 품평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누구든 일치하는 생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작곡이라는 것을 대학에서 전공한 만큼, 아직 늦깎이 백수이기는 하지만 작곡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인지하고 있고 또 그 활동을 위해 갖가지 음악을 경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 와 함께 상당히 흥미롭고 또 귀한 기회였다. 물론 아직까지 내 귀나 취향, 스타일은 좀 보수적이라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은 끝까지 남을 것 같지만.
또 청중 쪽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내 오른편에서 별로 지루한 기색도 없이 모든 곡들을 사뭇 진지하게 듣던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취학 전의 아이들이나 초등학생들에게 현대음악을 들려주면 오히려 일반적인 고전음악보다 더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다소 어렵고 난해하게 들었을 지 모르지만, 과연 그 아이에게 이 날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Posted by 머나먼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