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오랜만에 블로그 장기 방치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연말부터 1월 현재까지 계속 일복이 터지고 있는 탓이 큰데, 그 때문에 식도락 계획은 올스톱 상태, 음반 지름은 진행 중이지만 쓸 시간과 체력, 정신력이 없어서 답보 상태다. 아무튼 주말에 쉬면서 좀 쓸 예정인데, 우선 방치 플레이의 (임시) 종결은 이걸로 하기로 했다.
2010년 8월 8일 열린 제3회 행사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나 했던 동인 행사가 백합제였다. 물론 재작년(2012)에 '백합꽃 필 무렵' 이라는 비슷한 성격의 행사가 열리기도 했지만, 백합제와 주최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가보질 못해서 어떤 행사였는 지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잊혀져 있던 행사에 시동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된 게 작년 10월 무렵이었다. 서코의 각종 온리전 전단지 홍보 코너에서 자그마한 카드형 유인물을 봤는데, 네 번째 행사가 내년(2014) 1월에 개최된다고 되어 있었다. 당장 핸드폰 일정에 저장을 시켰고, 계속 홈페이지를 확인하면서 머릿속에도 저장시켰다.
이번 행사는 성북구민체육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전 행사들과 달리 지하철역에서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또 주최측이 만든 지도에도 상당히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닿을 수 있다고 표기했기 때문에, 과연 예전 행사들처럼 많은 이들이 올 지에 대해 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이 예상은 상당히 빗나갔다.
주최 측이 만든 약도 외에도 행사 전에 현금호송 보조 일을 하면서 이 동네를 돌아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언덕이었다. '자동차도 주차 브레이크 풀면 저절로 내려갈 정도의 급경사' 라는 주최 측의 비유는 헛소리가 아니었는데, 올라가면서 우선 저질 체력의 소모가 꽤 컸다.
하지만 올라가서 '어차피 소규모 행사니까 그냥 들어가겠지' 라고 생각한 나의 멘탈 역시 곧바로 탈탈 털렸다. 언덕을 올라가 성북구민체육관에 도착하자 마자 본 풍경은 이랬다.
엄청나 보이는 대기줄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물론 지난 달의 서울 코믹월드에서 나타난 지옥도 같은 풍경까지는 아니었지만 대기줄이라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한 내게는 정신이 멍해지는 모습이었다.
대기줄을 정리하는 주최 측 관계자는 '행사장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라고 했는데, 내가 행사장 규모가 작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다고 답했다. 그럼 대체 얼마나 북적이는 건가 하고 계속 기다렸다.
줄을 서고 있으면서 이렇게 누군가가 몰고 온 이타샤도 볼 수 있었다. 마시로이로심포니라는 에로게 캐릭터를 도장한 이 차 외에도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의 이타샤 등이 눈에 띄었는데, 행사 참가자가 아닌 일반 체육관 이용객들이라면 저게 뭔가 하고 신기해했을 것 같다.
대략 20분 쯤을 기다려서 마침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건물 2층의 실내체육관은 거의 시장통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으니 각 부스들에서 준비한 회지를 비롯한 물품들의 매진도 상당히 빨랐는데, 내가 구입을 완료한 것이 12시 30분 언저리였다. 공식 입장 시간에서 불과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뿐이었지만, 그 시점에서 상당수의 부스는 팔 물건을 다 팔고 견본만 내놓고 있거나 심지어 철수한 곳도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용케 세 가지 물품을 구입해올 수 있었다. 우선 홈페이지의 서클홍보게시판을 통해 미리 선입금 예약한 '꽃피는 소녀에게(현장 구매가 6000\)' 라는 개인지(연수 화백)를 '펑크나면 바님이 행사장 오는 부스(...)' 라는 곳(A3)에서 받아왔다. 그냥 게시판의 샘플 몇 장만 보고 삘꽂혀 했던 좀 경솔해 보이는 선입금 예약이었지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용과 그림체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선입금 예약자에 한해 1000원 저렴한 5000원에 구입할 수 있었고 특전도 주어졌으니 말이다.
나중에 사오고 나서 작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뭔가 예전에 본 느낌이 났던 그림과 내용은 실제로 내가 전에 접한 적이 있었다. 2011년 1월에 열렸던 노멀커플 온리전이었던 '설레임' 에서 구입한 두 회지에 저 작가가 참여했는데, 당시 부스명은 '결혼까지 생각했어' 였고 필명은 녹차였다.
이걸 구입한 뒤 모든 부스를 쭉 돌아봤는데, 의외로 내 취향이나 구미에 맞는 건 찾기 힘들었다. 2차 창작의 경우 원작 자체를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어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 의외로 많았는데, 그 외에도 그림체의 호불호 등까지 더해지니 이번에도 이걸로 끝나려나 싶었다.
하지만 이전 행사들과 달리, 이번에는 주최 측도 행사 공식 물품들을 제작해 팔고 있었다. 이번 백합제의 행사용 일러스트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내가 서코, 제3회 백합제 등에서 이미 몇 가지 물품을 구입한 바 있는 코타비 화백의 것이었다. 해당 작가는 이번 행사의 카탈로그 표지를 '백조의 호수' 의 흑조와 백조 일러스트로 장식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만든 안경 클리너와 메모장을 내놓았다.
둘 중에 내가 고른 건 안경 클리너(1500\)였다. 이것으로 행사 주최측의 물품을 처음 구입했다는 것을 기록에 남겼는데, 그럼 이 두 가지만 사고 땡이었나 하면...아니었다. 4년 만에 개최된 행사인데, 이렇게만 지르고 끝내려나 싶어서 계속 부스들을 돌고 또 돌았다. 물론 그렇다고 새로운 물품이 갑툭튀하는 일은 없었고, 있던 것도 연이어 매진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마음 먹고 현장 구입한 것이 신견지멍이라는 작가가 차린 동명의 부스(C6-2)에서 나온 '나와 그녀가 사귄다는데 안보고 가신다고요' 라는 회지(2500\)였다. 처음 볼때는 그다지 삘이 꽂히지 않았는데, 몇 번 넘겨보니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아즈망가 대왕 류의 4컷 개그 진행이었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결국 샀다.
입장권을 갈음한 행사 카탈로그(맨 왼쪽)을 포함한 이 날의 구입 품목들. 사실 이전 백합제들에서도 구매한 물품 숫자는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었고, 이보다 더 대규모의 종합 동인 행사인 서코에서도 양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양보다 질' 이라는 면에서 따져 보면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다만 이 만한 인원이 몰려올 지는 주최 측도 예측을 못했는지, 행사 진행 면에서 뭔가 버벅거리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성인 여부를 체크하는 도장을 별도로 찍어주기는 했지만, 케이크 스퀘어처럼 따로 15/19금 회지를 내놓은 부스만 격리시켜 편성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성인 확인 여부는 일반 참가자와 부스 참가자들의 양심에 맡기는 식이었다.
이렇게 여러 난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BL 쪽이 상당한 세를 확보하고 있는, 혹은 그런 것 같은 모양새인 한국 동인계에서 의외로 백합 쪽도 수요는 꽤 되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행사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접근성도 예전보다 더 떨어지는 언덕배기의 시설을 빌려서 개최한 행사에 이렇게 사람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을 리가 없으니까.
서코가 없는 달을 이렇게 보냈으니, 이제 다음 달에는 몇몇 존잘들이 컴백한다는 2월 서코를 기대하고 싶다. 물론 양적인 면 말고, 질적인 면에서 내 까탈스러운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온다고 하니 기대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거 말고 내 '레알' 덕질인 음반 구입에 따른 결과물들은 언제 포스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