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두 차례 바뀌면서 알게 모르게 예산이 깎이고 반대 세력도 생기고 하고, 또 그 때문인지 해를 거듭할 수록 프로그램에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던가 하는 문제점 때문에 갈 수록 발길을 떼기가 힘들어지는 게 통영국제음악제다. 물론 현대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너무 어려워하고 또 어려워하게 만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나마 국제적으로 맥을 잇고 있는 행사라서, 최소한 한두 편의 공연은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작년에는 그것 마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최소한 개막 공연이라도 보기로 하고 개막 전날 통영으로 갔다. 그나마 내게 매력적으로 여겨진 게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출연한 이 날 프로그램이었는데, 1부는 윤이상의 관현악 '유동' 과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손열음 협연)으로, 2부는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중 네 개의 바다 간주곡과 드뷔시의 교향 소묘 '바다' 로 꾸며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통영행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삐걱대는 일정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남부터미널역으로 오다가 안경닦이를 어딘가에 흘리고 온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로리꾼 화백이 그린 '나는 친구가 적다' 의 두 여캐 요조라와 세나의 그림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아깝기는 했지만 뭔가 스페어로 하나 더 사둔 게 있던 것 같았고-실제로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랬다-, 다행히도 쥬씨페스티벌 때 구입한 물품들이 그대로 가방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엠카 화백의 보틀미쿠 핸드타올을 대신 쓸 수 있었다.
통영에 도착한 뒤,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미리 봐둔 항구 근처의 어느 모텔로 가서 방을 잡았다. 검색해서 보기로는 일반실이 1박에 45000원이었는데, 현금으로 결제하면 5000원 깎아준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물론 찾아 보면 여기보다 더 싼 숙소도 있기는 하겠지만, 개인 사생활을 보장해주고 유무선 인터넷도 쓸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눈에 띄었다.
짐을 부려놓고 씻은 뒤, 다시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 시내를 거닐었다. 어차피 공연은 내일이고 했기 때문에, 이 날은 주로 식도락이나 윤이상기념공원 방문 같은 것으로 때우려고 했다. 그래서 모텔에서 나와 맨 처음으로 간 곳이 서호시장이었는데, 입소문이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팔고 있는 충무김밥 중 보기 드물게 쭈꾸미나 오뎅 같은 밑반찬을 꼬치에 꿰어 주는 꼬지김밥이라는 게 있다고 해서 그걸 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앞에 도착했지만, 내부에 인기척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문 앞에 뭔가 불길해 보이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통영에서 첫 퇴짜가 시작되었다. 하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시락국을 먹기로 했는데, 시장 내에서 별로 눈에 띄는 집은 아니지만 블루 리본 서베이도 받고 해서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게 여기였는데, 여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문도 굳게 잠겨져 있었다. 이렇게 두 번의 퇴짜를 연속으로 맞았는데, 김밥 쪽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시락국집의 경우 나중에 찾아 보니 이른 새벽부터 오후 2시 까지만 영업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어서 결국 내 조사 부족이 원인이라고 귀결되었다. 스마트폰을 마련했는데, 왜 쓰질 못하니...왜 쓰질 못해...
결국 예정에는 없던 것을 대신 먹기로 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시장 안을 돌아다녔다. 바닷가 동네다 보니 해산물이 강세를 보였고, 이렇게 곳곳에서 생선을 말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다 보니 생물보다 건어물이나 염장물의 비중이 조금씩 높아지는 듯 했다.
사실 우짜는 이제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고, 또 엄밀히 따지면 통영의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음식이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하기는 좀 거시기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방문 때마다 늘 갔던 이 집에서 우짜가 아닌 다른 걸 먹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2년 전까지만 해도 봤던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가 아닌, 아무리 높게 잡아도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 때 주인이었던 2대 할머니는 건강 악화로 장사를 접었고, 그 대신 저 아주머니가 조리법과 가게를 이어받아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튼 외지에 하도 알려지다 보니, 인테리어에도 좀 더 신경을 쓴 모양새였다. "우짜는 할머니께서 만든것이 아니라 통영 사람들이 만든 메뉴다." 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는데, 사실 원조 논쟁을 벌이자면 어느 음식이든 한도 끝도 없겠지만 결국 원조 보다는 어디가 음식을 맛있게 하느냐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통영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우짜를 무시하고(...), 처음으로 그냥 우동을 시켰다. 외지인들이 오면 대부분 우짜를 먹고 간다는 것 때문인지, 주문을 하니 약간 의아한 듯한 모습이었다.
기본적인 모습은 우짜에서 그냥 짜장 소스만 뺀 것이었는데, 단무지채를 여기도 넣어주는 것이 독특했다.
밑반찬으로도 나오는 데 뱀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일단 두 군데에서 퇴짜맞고 배도 상당히 고팠기 때문에 바로 섞고 입에 끌어넣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는 분식집 우동과 다를 바 없는 맛이었지만, 국물 맛은 다시다 등으로 급조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맛이었다. 아무래도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안 지방인 만큼, 마른 멸치-사투리로는 띠포리-를 많이 넣어 우린 것 같았다.
일단 국물 맛이 마음에 들었고, 또 허기진 속에 뭐든 끌어넣고 싶다는 욕구 덕에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워냈다. 계산을 하면서 왜 우짜가 아닌 우동을 골랐냐고 아주머니가 물어봤는데, 위에 쓴 것처럼 우동 국물 맛이 타지와 다르다고 해서 먹으러 왔다고 답해드렸다. 그리고 (이 때까지만 해도 그저 예비 후보에 올렸을 뿐이지만) 내일은 빼떼기죽을 먹으러 오겠다고 하고 가게를 나왔다.
어쨌든 끼니를 때웠으니, 이제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서호시장에서 그다지 멀지는 않아서 걸어갔는데, 이렇게 음악제 플래카드가 거리 곳곳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기념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이랬다.
모 프로게이머 마냥 삼연벙 당한 허탈한 모습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이것도 따져 보면 시락국집과 마찬가지로 사전 조사 미비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렇게 하릴 없이 해저터널을 들어가고,
누군가가 따놓은 듯한 동백꽃 두 송이를 지켜보고,
다시 터널을 나오고,
지역 대형 마트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와 입가심하면서 넋나간 인간처럼 거리를 거닐었다.
그래도 남쪽이라 그런지, 가로수로 심어놓은 벚나무가 벌써부터 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걷는 동안 어느 정도 운치를 느낄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물론 이웃 동네인 진해 만큼은 아니겠지만, 서울에서는 아직 피지도 않았거나 이제 피기 시작한 벚꽃이라서 꽤 정취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추억에 남을 만한 짓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모텔로 돌아온 뒤 다시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동피랑 벽화마을.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