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록의 인연은 그리 새롭지는 않다. 재수생 시절 홍대를 거닐며 자주 들었던 것도 원래 듣던 클래식 외에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인디 록-그 중에서도 펑크(punk)-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드럭이나 스팽글 등을 비롯한 클럽들을 드나들며 격렬하게 날뛰기도 했었고,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의 크리스마스 이브 철야 공연 등 이색적인 공연도 봤다.
하지만 어느 시점엔가-아마도 대학 들어가고 군대 갔다온 뒤-점점 저 쪽에 갖는 관심이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포스팅에 언급한 공연이 거의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대학 끝물 탈 쯤에는 뜬금포로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지금은 재즈가 20대 초중반 시절의 록을 거의 대체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록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이나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신체적인 문제로 따지면 항상 갔다오고 나면 느껴지는 먹먹한 귀나 격렬하게 뛰놀며 소모되는 체력 같은 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저 신에서 멀어진 원인이 아닐 까 싶다. 아무래도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귀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소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다시금 그걸 보러 간 게 올해 4월 27일이었다. 토요일도 아니고 일요일이었고, 바로 다음 날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핸디캡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이런 기회를 다시 누려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또 내가 한창 설치던(??) 2000년대 초반에서 10년도 넘게 흐른 현재의 인디 록은 어떤 모습일 지 궁금해서 공연장을 찾아갔다.
공연장은 대략 2호선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 쯤에 위치한 프리즘홀이었다. 완전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물론 그 사이 클럽 문화나 환경도 많이 바뀌어서 엔지니어 부스와 바가 한 쪽에 마련되어 있었고 사운드 시스템도 그 때와 비교하면 부쩍 좋아져 있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내가 2007년에 공연을 보러 갔던 DGBD에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앞에 이렇게 현수막이 내려져 있었다. 출연 밴드는 모두 네 팀이었고, 아래에서 위의 순서로 공연했다. 물론 내가 공연을 보러 간 가장 큰 동기인 명령27호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살짝 찍어 본 공연 시작 직전 무대 위의 모습. 미리 리허설을 했는 지, 악기들이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다. 다만 이렇게 세련된 클럽 내부에 비해 보러 온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마 세월호 사고의 여파로 한국 사회에 지나치게 강요되었고 지금도 그런 상황인 '문화예술 공연=현 시국에 맞지 않는다' 는 괴상한 풍토 탓이 아닐 까 싶기도 했는데, 딱히 그런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비가 줄줄 내리는 날씨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일단 바에서 하이네켄 한 병을 주문해 마시면서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그리고 현수막이 오르면서 시작된 첫 밴드 '더 베거스' 의 공연. 이 날 공연에서 내가 20대 때 즐겨들었던 소위 '펑크'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한 유일한 밴드였다.
곡들은 대개 상당히 짧은 편이고, 리프 몇 번 하고 끝나는 '짐바브웨' 같은 좀 황당스러운 곡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날 뛰놀게 하던 펑크의 격렬함과 흥겨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전부 들어보지 못한 곡임에도 몸을 들썩이며 서서히 녹아들 수 있었다. 연주 중 베이스의 앰프 잭이 부러지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별 무리 없이 끝났다.
이어진 무대는 '데드버튼즈' 라는 2인조 밴드였는데, 특이하게 기타 겸 보컬과 드럼 딱 두 명 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베이스가 없어서 저음이 좀 약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밴드 관련 노가리 중에 '베이스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는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다소 직설적인 펑크 스타일이었던 더 베거스에 비해, 이 밴드의 음악은 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분위기였다. 어떤 곡은 일부러 짜낸 듯한 촌스러움이 느껴졌고, 어떤 곡은 너바나 등 소위 그런지 풍, 또 어떤 곡은 하드코어 풍 등 저마다 다른 느낌이었다.
어느 풍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밴드가 있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스타일의 음악을 같이 시도하는 밴드도 있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 지에 대해서 누가 묻는 다면 '그냥 일단 들어보쇼' 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이 밴드는 공연 중간의 멘트에서 자신들이 '다음 달(5월) 초 영국 공연을 간다' 고 밝혔다. 자비를 들여서 간 것인지 초청을 받아서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영국 록 신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잘 어필하고 왔는 지가 궁금하고 또 요리 계의 생지옥이라는 영국에서 얼마나 식생활을 잘 영위하고 왔는 지도 궁금하다. 그래도 맥주는 괜찮은 게 많았을 테니 그걸로 버티지 않았을 까 싶기도 하다
세 번째 밴드 '더 모노톤즈' 역시 내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기타리스트가 어디서 많이 본 양반 같아 보였는데, 공연 후 밴드 관련 정보를 찾다 보니 노브레인과 문샤이너스에서 활동했던 차승우였다. 나머지 멤버들도 각기 다른 밴드에서 꽤 오래 뛰었다는데, 이 밴드는 그렇다면 인디 신에서 '짬 좀 되는' 뮤지션들이 모인 일종의 프로젝트 밴드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밴드의 음악도 데드버튼즈와 마찬가지로 딱히 한 스타일로 정의하기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뭔가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게 아닌 상당히 탄탄한 팀워크나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풍겨나온 게 신기했다. 그러니 이 밴드 멤버들이 꽤 오랜 경력의 소유자였다는 정보를 보고 납득할 수 있었던 게 아닐 까 싶다.
어쩌다 찍힌, 차승우의 솔로 연주 장면. 이 공연 내내 어느 외국인이 DSLR을 들고 무대 앞에서 사진을 수백 장은 박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도 아마 이 장면을 찍지 않았을 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등장한 명령27호. 이 밴드도 참 굴곡진 프로필을 갖고 있는데, 2007년에 이 밴드의 공연을 처음 보러 갔을 때도 재결성 공연이었고 이번에도 (공식) 컴백 공연이었으니 어쩌면 나는 밴드의 부활을 두 번이나 목격하는(???) 흔치 않은 이벤트를 경험한 셈이다.
2007년에 본 공연에서는 박현(본명 버크 조슬린. 기타/보컬), 안악희(베이스), 김간지(드럼) 3인조였는데, 이번에는 기타리스트가 한 명 더 추가된 형태였다. 물론 음악 자체는 예전에 그랬듯이 로큰롤의 촌스러움과 펑크의 격렬함이 혼재하는 독특한 맛이 풍겼다.
알고 있던 밴드다 보니 사진도 참 많이 찍어댔다. 뭔가 빌리 헤링턴 형님이 연상되는 모습으로 등장한 박현.
무시한 듯 시큼하게(???) 베이스를 퉁기고 있는 안악희.
이 밴드를 알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이 양반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트위터로 인생의 낭비를 하도록 권유한 인물이기도 하고, 트친을 맺고 리트윗 중인 여러 글을 통해 내 트위터의 빈약한 타임라인을 채워주고 있다.
서로 맞춰보듯 연주 중인 박현과 새 기타리스트.
예전 공연 때 드러머 김간지를 찍지 못했던 걸 후회하며(??) 이번에는 한 번이라도 찍어보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격렬한 공연 와중에 그나마 잘 나온 게 이거다(...). 뭔가 식겁한 듯한 표정이 일품.
그리고 이 공연에서는 또 내 기억에 길이 남을 퍼포먼스도 있었다. 박현이 갑자기 1980년대 프로레슬링 좋아하던 사람 있냐면서 한 번 해보자고 마스크 두 개를 줬는데, 거기에 내가 뽑혀 버렸다. 물론 WWE가 WWF 시절이었을 적 AFKN에서 본 헐크 호건과 워리어, 마초킹, 달러맨, 앙드레 자이언트, 스네이크 등의 레슬러들은 지금도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남아 있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존내 빡셌다.
마구 달리는 연주를 배경으로 어설픈 기술을 걸고 접수를 해대며 보인 30대 중반 아저씨의 추태를 누군가 찍지 않기를 바랬지만...찍힌 것 같다. 물론 마스크 쓰고 있었으니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공연장에서 신나게 뛰어논 경험은 있어도 이렇게 얼치기 프로레슬링까지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 체력과 땀을 뺀 뒤에도 공연은 계속 되었다. 조명 덕에 무슨 성자 마냥 찍힌 기타리스트.
전체샷 찍어보려다 망한 사진 한 컷.
2007년에 본 Girls Love Elvis 연주의 '백댄서' 광경은 이 무대에서도 다시 재현되었다. 엘비스 팬 없냐고 박현이 묻자 거의 반강제적으로 두 명의 여성이 끌려나와(??) 무대로 올라왔다.
이들은 함께 엘비스를 연호하며 무대를 누비면서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렇게 근 7년 만에 다시 찾아간 록 공연은 시끌벅적하게 끝났다.
생각같아선 내 돈 내고서라도 밴드들의 뒷풀이에 참석해 썰을 풀고 싶었지만, 일단 나는 이방인이었고 또 다음 날 일찍 출근해야 했기에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근처의 마포만두에서 늦은 끼니를 때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아, 빈 손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고, 공연장에서 팔던 첫 번째 밴드 더 베거스의 CD를 구입해서 돌아왔다.
20대 시절 신나게 뛰놀던 시절의 체력과 기백은 이미 사그라들었고, 또 공연을 보면서 나름대로 능동적이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상태였기에 '나도 늙었고, 음악 환경도 변해가는 구나' 는 진리를 새삼 깨우치게 해준 기회였다. 그래서 다시는 안 갈 거냐고? 물론 아니다. 그게 나를 계속 잡아당기고 입맛을 다시게 한다면 관람의 형태가 어떻게 되든 간에 다시 갈 용의는 물론 있다. 내가 한국에 남아있을 동안에라도 추가 공연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