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춘향전' 과 조선인의 '에텐라쿠'.
#1
일본의 초기 양악 작곡가들 중에 다키 렌타로나 야마다 고사쿠 정도로 중요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장수한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다카기 도로쿠(高木東六, 1904-2006)라는 작곡가로, 일본 유명 작곡가들 중 최장수 작곡가(타계 당시 102세)로도 유명하다.
다카기는 돗토리현 요나고시 출신으로, 특이하게 러시아 정교회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러시아 정교회의 신부들은 로마 가톨릭과 달리 독신제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처음 희망한 직업은 피아니스트였다. 도쿄음악대학에 입학할 때의 전공도 피아노였으나, 1928년에 중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가면서는 피아노 외에 작곡도 배우게 되었다.
파리 유학 시절 작곡 스승은 뱅상 댕디와 가브리엘 피에르네 두 사람이었는데, 이 두 거물 외에도 야마다 고사쿠에게 작곡가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수 차례 받았다고 한다. 결국 1932년에 졸업 후 귀국하면서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정통 클래식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가요나 동요, 교가 등의 대중음악이나 기회음악 분야에까지 손을 뻗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가요 '물빛 왈츠' 는 대히트해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곡이라고 하고.
하지만 굳이 다카기를 여기에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인으로서는 좀 특이하게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의 전통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다카기가 초기에 작곡한 관현악곡들 중에는 '조선의 환상' 과 '조선풍 무용 모음곡' 두 곡이 있었고, 모음곡은 1940년에 만주국 신경 음악원에서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1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모음곡 중 3악장인 '다이코(아마 전통악기인 좌고를 뜻하는 듯함)' 는 일본 정부의 문부대신상을 수상함)
물론 이렇게만 쓴다면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이 당연히 나올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저 작품이 왜 상을 탔는지에 대한 것이다. 알다시피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만든 괴뢰 국가였으며, 그 곳에 세워진 신경 음악원도 단순한 교육 기관이라는 기능 외에 음악을 통한 내선일체를 추구하던 곳이었다. (물론 일본인 외에도 중국인이나 조선인도 저 학교에 다니거나 교직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김성태의 '한국기상곡' 도 신경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다카기의 작품은 일본 정부의 눈으로 봤을 때 '독립군이니 임시정부니 해서 속을 벅벅 긁어놓는 이민족을 찬양해서 뭣하냐' 라는 부정적인 시선 보다는, '이 곡을 국가적으로 인정하면 조선 민족도 우리에게 호감을 보일 것이다' 라는 고도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곡 외에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식민지로, 혹은 점령지로 삼던 타이완이나 인도네시아 등의 민속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창작과 발표를 장려하기도 했는데, 타이완 태생의 작곡가 고 분야(중국명 장 원여)가 쓴 관현악 '대만 춤곡' 이나 후카이 시로가 쓴 교향 영상 '자바의 노래' 가 그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후카이의 작품은 낙소스 일본작곡가선집으로도 나와 있고,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다. 8.557688)
그리고 다카기가 아무리 조선의 전통예술에 관심이 있다고 했어도, 그는 여전히 일본인이었고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러워 했다. 1942년 초에 일본군 공수부대들이 셀레베스섬과 수마트라섬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네덜란드군의 주요 시설을 손쉽게 점령했는데, 이 대활약의 선전과 홍보를 위해 4월에 군가 '하늘의 신병' 이 발표되었다. 이 곡의 작곡자가 바로 다카기 도로쿠였고. (이 군가는 당연히 제국 육군을 찬양하는 내용이라 지금은 거의 불려지지 않고 있지만, 지금도 육상 자위대의 낙하산 부대 훈련 때 군악대의 기악 연주로 주악되고 있다고 한다.)
패전 후에도 다카기는 여전히 조선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창작하고 있었는데, 초연된지 53년 만인 2002년에 요코하마에서 재연되어 화제가 된 '춘향전(1947)' 이었다.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 춘향전을 소재로 한 작품 중 가장 먼저 선보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본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이 다카기를 설득해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춘향전 소재로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오페라는 이면상 작곡의 '춘향(1948. 북한)' 이었고, 1949년에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 이 뒤를 이었다.)
재연 공연이 열렸던 때가 마침 한일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던 시기였고, 재일교포와 일본 시민들이 공동으로 공연 비용을 모금하고 한일 양국의 성악가들을 캐스팅하는 등의 준비 작업들도 '훈훈한 미담' 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양국 언론들에서는 다카기가 '하늘의 신병' 의 작곡가라는 사실이나 '조선풍 무용 모음곡' 으로 수상한 작곡가라는 사실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훈훈한 화해 무드에 과거 행적을 운운하며 찬물을 끼얹는다는 것은 '페어 플레이 정신(???)' 으로 봤을 때도 좋은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카기의 본국인 일본은 그렇다 쳐도, 한국에서 다카기 관련 보도가 저 '춘향전' 한 작품만으로 그친 것은 석연치 않다. 그가 관제 작곡가로 활동했든 어쨌든 간에, 춘향전으로 한일 화합의 장을 연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사실 2000년도의 다카기에 대한 보도는 저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심지어 2006년에 타계했다는 소식조차 실리지 않았다. 한국의 일본 음악계에 대한 얕은 지식과 미온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목이다.)
#2
오늘 개강하면서 학교 도서관에서 '객석' 최신간을 열람했는데, 지난달 과월호와 마찬가지로 재독 음악학 전공자인 송병욱의 특별 기고가 실려 있었다.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초연 7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지면이었는데, 다만 그 내용은 안익태 기념재단 등 관변 단체에서는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달에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초연 프로그램과 신문 기사를 통해 한국 환상곡의 초기 형태와 '후속작' 으로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교향 환상곡 제 2번 '교쿠토(극동)' 와의 관계, 한국 환상곡이 초연 이후 1944년에야 필사보로 재등장할 때까지 한 번도 연주는 고사하고 언급도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 2006년에 공개된 '만주국' 과의 연관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또 다른 의혹으로 제기된 곡이 바로 '에텐라쿠' 였다.
'에텐라쿠' 는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 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많이 지휘한 자작곡이었고, 1943년에 베를린 필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연했을 때에도 프로그램에 올렸을 정도로 자신있어하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저 작품의 악보는 '교쿠토' 나 '만주국' 과 마찬가지로 1944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춘 상태인데, 이번에는 헝가리 국립 영상보관소에서 '에텐라쿠' 의 연주 장면이 담긴 기록영화 동영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동영상은 지난 번의 '만주국' 처럼 아직 언론에 전면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는데, 송병욱은 그 동영상을 직접 시청하고 거기서 나오는 선율 중 훗날 안익태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는 '강천성악' 과 유사한 악구를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대략적인 채보도 실려 있는데, 피아노로 쳐보니 '강천성악' 의 클라이맥스 악구와 상당히 비슷했다.
사실 '강천성악' 에서 제 2주제로 사용되는 선율이 일본의 가가쿠 중 한 곡인 '에텐라쿠' 와 극히 유사하다는 문제점은 이미 허영한이나 이경분 등의 음악학자들이 제기한 적이 있었고, 송병욱도 2006년의 '만주국' 관련 세미나와 '객석' 의 특별 기고 때 같이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에텐라쿠' 와 관련된 악보는 고사하고 음원이나 동영상도 찾지 못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랬을 것이다' 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동영상은 송병욱이 헝가리 국립 도서관에 요청한 관련 자료들에 따르면 1941년 10월 10일에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거도(Pesti Vigado)에서 열린 공연을 녹화한 것이며, 특히 '에텐라쿠' 의 클라이맥스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는 1부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 서곡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7(8)번 '미완성', 안익태의 '에텐라쿠' 가 연주되었고, 휴식 후 2부에서는 헝가리 작곡가인 샨도르 베레슈가 1940년 일본 건국 2600주년 기념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연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헝가리는 당시 독일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3국동맹 국가들이었던 이탈리아나 일본과도 돈독한 맹우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안익태가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에게 배웠다는 것도 아마 연주회 개최에 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실제로 공연장인 비거도의 무대 뒷면에 지난 번 '만주국' 동영상에서처럼 헝가리 국기와 일본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도 동영상에서 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만약 송병욱의 주장대로 저 동영상이 10월 10일의 연주회를 녹화한 것이고, 또 거기서 나오는 곡이 '에텐라쿠' 가 맞다면 또다시 안익태의 재평가와 관련해 큰 파문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안익태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안익태 기념재단에서조차 저 동영상이나 공연 기록을 반박할 만큼의 결정적인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지도 의문인데, 거기에 안익태 자신이 '에텐라쿠' 와 '강천성악' 의 관계를 은폐하기 위한 행동을 했다는 기존 의혹도 여전히 '떡밥' 으로 작용할 것 같다.
(안익태는 2차대전 후 '강천성악' 을 공연하면서 이 작품이 '세종대왕이 만든 아악을 소재로 하고 있다' 고 주장했는데, 제 2주제에 왜 에텐라쿠와 유사한 선율이 나오는 지에 대한 해명은 전혀 하지 않았다. 국내에 출시된 '강천성악' 음반들의 속지들도 안익태가 집필한 곡 해설에 의존하고 있으며, '에텐라쿠' 가 언급된 것은 내가 아는 한 음악동아의 별책부록으로 제공된 비매품 CD가 유일하다.)
물론 이런 자료가 계속 발표된다고 해도, 안익태가 대한민국 건국 후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 합창단들도 어색하나마 한국어 가사로 '애국가' 가 첨부된 한국 환상곡을 도처에서 연주했고, 요즘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리고 일본에서 연주하면서 파문을 일으킨 '논개' 같은 작품도 있고.
하지만 정말 큰 문제는 이러한 '뒤가 구린' 자료가 계속 발표되면 발표될 수록,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워온 '안익태는 한시도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은 위대한 음악가' 라는 신화에 계속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안익태 외에도 홍난파나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 등의 작곡가와 관련된 평가에서도 나타난 문제이며, 흔히 '뽕짝' 이라고 비하하는 트로트 음악이나 일제 시대에 유행한 창가, 동요의 기원에 관한 고찰에서도 나타난 문제다.
송병욱의 행보를 보면 저 동영상도 머지않아 언론사들을 통해 공개될 것 같은데, 그 때 안익태 기념재단이나 여타 음악인들이 과연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반박을 할 지 한 번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독일이나 헝가리, 오스트리아 외에 안익태가 공연했던 프랑스나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또 어떤 자료가 발견될 지 그 가능성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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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음악, 혹은 정치에 이용된 음악-1940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