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시스테마' 의 좀 더 오래된 성과물을 찾아서.

베네수엘라의 어린이/청소년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물론 그 교육 시스템 자체 외에도, 거기서 배출된 청소년 관현악단이 만든 녹음도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관심거리 중 하나고. 예전에는 뭔가 미숙해 보이는거 같아 별로 끌리지 않았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기성 악단 연주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지름 동기' 를 부여해주고 있는 셈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구스타보 두다멜이 도이체 그라모폰과 계약한 후 내놓은 CD와 DVD를 통해 저 프로그램에서 배출된 걸출한 악단인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의 연주를 접하고 나름대로의 느낌이나 인상을 받았을 걸로 안다. 하지만 이 악단은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녹음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다큐멘터리 '엘 시스테마' 의 국내 개봉에 맞춰 나온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해당 책에 대한 포스팅은 이미 여기서 한 바 있다.)

지난 12월 서코가 끝나고 서울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오랜만에 명동 중앙우체국 근처의 '부루의 뜨락' 에 들렀다. 사실 큰 목적은 없었는데, 이미 르네 콜로의 앨범을 근처 회현지하상가에서 구입했기 때문에 그냥 뭐 또 들어온거 있나 싶어 2층 클래식 CD/DVD 매장으로 올라갔다.

사실 중고품 중에는 별로 끌리는게 없었다. 하지만 현대음악 음반만 모아놓은 진열장을 보다가 뭔가 눈에 확 띄는 것을 집어들고 확인했다. 바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이하 시몬 볼리바르)의 연주를 담은 CD 중 하나였는데,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1층으로 내려가 계산대에 잠깐 맡겨놓고 다시 회현지하상가로 달음질쳐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더 빼와 샀다.

문제의 물건은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음반사인 도리안(Dorian)이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현지에서 녹음한 시몬 볼리바르의 CD 아홉 장 중 하나다. 이 CD들에는 악단 명칭이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Simón Bolívar Symphony Orchestra of Venezuela)' 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두다멜 지휘의 녹음으로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악단과 같은 단체다. 도리안은 멕시코 지휘자인 에두아르도 마타가 많은 음반을 녹음한 것으로 잘 알려진 회사로, 녹음 품질도 좋아 오디오파일 애호가들에게 명망있는 업체이기도 하다.

마타는 1989년부터 시몬 볼리바르를 지휘하기 시작했는데, 불과 1년 뒤인 1990년에 베네수엘라 작곡가 안토니오 에스테베스의 '라 칸타타 크리올라' 와 브라질 작곡가 빌라-로부스의 쇼루 제 10번을 도리안을 통해 녹음하면서 이 악단의 본격적인 세계 시장 공략에 크게 기여했다. 마타는 1995년 1월 비행기 사고로 급서할 때까지 시몬 볼리바르와 여섯 장의 음반을 만들었고, 이것들은 2009년 10월 쯤 박스 세트로 재발매되었다. 다만 국내 수입이 안되고 있어서, 외국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주문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고.

마타 사후 시몬 볼리바르는 도리안에서 세 장의 앨범을 더 녹음했는데, 각각 칠레의 막시미아노 발데스(Maximiano Valdés)와 멕시코의 엔리케 에두아르도 디에메케(Enrique Eduardo Diemecke), 그리고 캐나다의 케리-린 윌슨(Keri-Lynn Wilson)의 지휘로 연주한 라틴아메리카 관현악 작품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세트 재발매가 이루어진 마타의 음반들과 달리, 이 세 장은 미국에서도 절판되었는지 미개봉 신품과 중고품을 인터넷에서 사는 방법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세 장이 모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한 장인 발데스 지휘의 음반을 입수한 것은 굉장한 성과였다. 발데스 지휘 음반은 '카라멜로스 라티노스(Caramelos Latinos)' 라는 에스파냐어 제목이 붙은 소품집인데, 예전에 국립예술자료원에 소장된 CD로 들어본 케리-린 윌슨 지휘의 음반과 비슷하게 모차르트 카마르구 과르니에리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 실베스트레 레부엘타스, 이노센테 카레뇨, 후안 바우티스타 플라사, 호세 파블로 몬카요의 관현악 소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 1995 The Dorian Group Ltd.

윌슨 지휘반과 마찬가지로 몇 곡은 두다멜 지휘로 낸 CD나 DVD 수록곡과 중복되는데, 여기서는 카레뇨의 교향 변주곡 '마르가리테냐' 와 몬카요의 '우아팡고' 가 겹치고 있다. 물론 손해본 느낌은 없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시몬 볼리바르는 과연 어떻게 변해왔고 지휘자에 따라 느껴지는 개성의 차이는 어떤지를 비교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녹음 상태도 스튜디오 녹음인 만큼 매우 양호하고.

만약 마타 지휘의 세트를 구입한다면, 아마 다음 시몬 볼리바르 지름 목표는 나머지 도리안 음반 두 장과 안칼라곤이라는 음반사에서 녹음된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사계' 음반, 그리고 올 1월에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를 통해 갑툭튀한 필.하모니라는 처음 들어보는 음반사의 반할과 호프마이스터, 디터스도르프의 콘트라베이스 협주곡 선집이 구매 대상으로 올라갈 것 같다.

특히 맨 마지막의 협주곡집의 경우에는 두다멜과 함께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유명인인 콘트라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가 독주를 맡았고, 낙뮤라로 들어본 결과 연주도 꽤 마음에 들어서 구매욕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메이저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의 이름값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이들 음반도 분명히 시몬 볼리바르의 변천사와 연주력과 기질을 만끽할 수 있는 매개체임에 틀림없다.

욕심 같아서는 이베이 같은 곳도 뒤져서 도리안 음반보다도 더 이전인 1980~81년에 녹음했다는 LP들까지 구하고 싶은데, 마스터 테이프가 아직 있다면 나중에라도 CD 재발매가 꼭 이뤄지길 바라고 있다. 게다가 저 LP들 중에는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지휘한 음원까지 수록되어 있다고 하니, 역사적인 가치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