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저러하게 남은 돈들을 싹 모아서 국내외에 좀 거하게 지른 것이 다소 늦기는 해도 차곡차곡 오고 있는 중이다. 그 중 해외에 주문한 것은 모두 예전에 이 포스팅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바 있는,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연주가 담긴 CD들이다.
가장 처음 도착한 CD는 비교적 최근인 2008년 6월에 녹음된 물건이었는데, 소위 '얼짱'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캐나다 바이올리니스트 라라 세인트 존(Lara St. John)이 비발디의 사계와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를 묶어 낸 음반이다. 기돈 크레메르 이래 이 두 레퍼토리를 묶어 '팔계' 로 내놓는게 유행같이 보일 정도인데, 이 CD도 마찬가지였다.
ⓟ 2009 Ancalagon
다만 내게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값 보다는 협연한 악단이 어디냐가 지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연 시몬 볼리바르가 어떻게 연주했을까. 대편성 아니면 소편성? 현대적 아니면 원전연주 스타일? 물론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볼 수 있는 음반이라 그 의문점은 나름대로 해결했지만, CD를 걸어들으며 다시금 확인했다.
일단 악단 편성은 제 1바이올린 6-제 2바이올린 6-비올라 4-첼로 4-콘트라베이스 2에 콘티누오로 하프시코드가 들어간 소편성을 취하고 있었다. 편성에 걸맞게 전체적인 소리는 가볍고 정갈한 편이었는데, 전체적인 연주 스타일도 비브라토를 적게 줘서 정격연주풍 맛을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무난하게 가는 스타일의 연주는 아니었는데, 곳곳에 악보에는 없는 효과가 주어지고 있는 점이 특히 그렇다.
눈에 띄는 대목들만 꼽아보면 '봄' 1악장에서 천둥번개가 쓸고 나가는 부분을 바이올린 그룹 둘이서 받게 하는 대목과 '여름' 2악장에서 묘사되는 천둥소리를 작게 시작해 마지막까지 음량을 키우는 아이디어, '가을' 3악장의 사냥 풍경에서 총소리를 묘사하는 저음현에 콜레뇨 바투타(col legno battuta. 활의 말총 부분이 아닌 활대 부분를 현에 튕겨 연주하는 주법)를 가미하기, '겨울' 1악장 초반부에서 강추위를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 파트 일부에 술 폰티첼로(sul ponticello. 활을 현의 브릿지 가까이에서 연주하게 하는 주법)로 연주하도록 한 대목 등이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가을' 3악장 연주가 끝나자마자 역시 원래 악보에는 없는 콘트라베이스의 길게 끄는 저음 악구가 슬그머니 들어와 곧장 '겨울' 1악장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기도 한데, 다른 곡에는 없던 것이 여기서만 튀어나와 좀 이해가 안되는 착상이었다.
바이올린 독주도 원보 그대로 가기 보다는 몇몇 음을 끌거나 새로운 대목을 즉흥으로 삽입해 별다른 카덴차가 없는 곡의 독주 파트를 나름대로 개성적으로 만드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곡에 수반되는 소네트의 내용에 중점을 두는 묘사적인 연주인데, 다만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 같은 상당히 깨는 편인 정격연주의 파괴력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맹맹하게 느껴질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비발디보다 피아졸라의 사계가 좀 더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라틴아메리카 작곡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상성이 더 잘 맞는 듯한 모습이다. 비발디와 달리 원래 연작으로 의도한 곡은 아니지만 쓰다 보니 사계절이 다 들어가는 탕고 누에보 레퍼토리가 되었다는데, 크레메르를 비롯해 팔계 컨셉으로 낸 음반들은 거의 대부분 러시아 작곡가인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Leonid Desyatnikov)가 1999년에 바이올린 독주와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한 악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앨범도 마찬가지인데, 계절 순서는 가을-겨울-봄-여름 순으로 배치하고 있다. 물론 비발디와 달리 피아졸라는 표제에서 오는 느낌에 음악을 그대로 대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원곡에서 각 곡들의 개성 편차는 훨씬 적다. 데샤트니코프 편곡판은 원곡의 강한 리듬이나 반도네온의 공격적인 악센트, 타악기적인 효과를 소편성에 맞게 다듬는 한편, 겨울과 여름 두 곡에서는 비발디의 해당 곡에서 일부 차용해 독주 파트에 새롭게 삽입하는 패러디도 보여주고 있다.
비발디와 피아졸라 모두 지휘는 악단원들과 동향인인 베네수엘라 지휘자 에두아르도 마르투레트(Eduardo Marturet)가 맡았는데, '엘 시스테마' 의 한국 개봉에 발맞춰 나왔던 이 책에 실린 짤막한 인터뷰에 의하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과 지휘자로 첫 공연을 치렀다고 한다. 다만 대부분의 음악 교육은 영국에서 받았고, 2003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아시아 무대에 데뷰했다는 기록이 있다. 2006년부터 미국의 마이애미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고, 엘 시스테마에서도 지휘와 작곡, 타악기 레슨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수록곡들 자체도 그렇고, 연주 면에서도 어떠한 장엄함이나 원숙한 기풍보다는 다양한 색채감과 표현력이 요구되는 탓에 이 음반의 연주도 인상이 꽤 좋은 편이었다. 4~5관 편성의 대편성으로 연주한 도이체 그라모폰 음반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소편성만의 아기자기함이나 자발성도 살려놓고 있어서, 왜 한국에 정식 수입이 안되는지 의아할 정도다.
음반사인 안칼라곤(Ancalagon)은 2000년에 라라 세인트 존이 직접 만든 회사로, 기존 음반사들의 마케팅 방식이 뒤떨어졌다고 생각해 새로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 명칭은 J.R.R.톨킨의 소설 세계관에 나오는 용들 중 하나인데, 세인트 존이 톨킨 작품의 팬이라서 작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어판 위키를 보니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는 이구아나 이름도 안칼라곤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정말 골수 톨킨 덕후인 듯 하다.)
두 번째로 도착한 음반은 사실 시몬 볼리바르 연주가 단 한 곡만 수록되어 있지만, 일단 다른 곡들도 어떨까 하고 같이 구매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