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샘밭막국수 서울 1호분점과 춘천 본점, 퇴계막국수까지 세 군데를 다녀온 만큼, 이제 막국수는 내게 더이상 낯선 음식이 아니다. 물론 고명에 오이가 얹혀진다면 대번에 낯설어지겠지만(...).
이번에 갔다온 집도 마찬가지로 오이 없는 막국수를 표방하는 집이라 안심하고 갈 수 있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뭔가 독특한 맛이라 처음 가는 사람들은 좀 실망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기도 해서, 약간은 긴장한 채로 찾아갔다.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샘밭막국수 분점이나 경춘선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샘밭막국수 본점과 퇴계막국수와 달리, 이 음식점은 다행히도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였지만, 이미 종로에 있는 어학원 다닐 때부터 줄기차게 걸어다녔던 을지로지하보도를 따라 그냥 걸어갔다.
을지로4가역의 1번출구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서 나오는 골목을 보면,
이렇게 빛바랜 녹색 바탕의 세로 간판을 볼 수 있다. 음식점의 정식 명칭이 춘천막국수구나 했는데,
골목을 들어가서 보니 '순모밀' 과 '산골면옥' 두 가지 단어가 같이 인쇄된 간판이 나왔다. 다만 이 집이 막국수만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아마 정식 상호명은 산골면옥으로 여겨지는데, 네이뷁이나 당므 지도에도 산골면옥으로 뜨고 있다.
뭔가 단층에 작아보이는 규모의 음식점이었고, 때마침 점심 시간대여서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들어가서 접한 공간은 의외로 넓은 편이었고, 단체 손님용 온돌방도 오른쪽에 따로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놓여 있던 물통. 메밀 삶은 물을 담아놓은 것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직접 메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내놓는 집이 아니면 이런 서비스를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신뢰할 만한 음식점으로 여겨졌다. 다만 바로 들어가 앉았기 때문에 마셔보지는 못했다.
식사중인 손님들은 거의 대부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고, 쟁반막국수나 막국수를 드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날씨 때문인지 만두국이나 닭곰탕 같은 따뜻한 음식을 자시는 분들도 보였다. 물론 빈대떡이나 이런저런 전 종류를 시켜 막걸리를 비우던 분들도 있었고. 마치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근처의 식당들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지만, 거기처럼 시끄럽고 난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 막국수 쪽이 분홍색 바탕으로 되어 있어서 이 집의 주력 메뉴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식사류와 안주감을 같이 하고 있었고, 특히 꿩이나 토끼 등 야생동물로 만든다는 탕류가 흥미로웠다.
잠깐 생각해 보다가 막국수 특곱배기를 주문했다. 막국수 종류를 주문하면 이렇게 커다란 주전자가 같이 나오는데, 면수야 문간의 통에서 직접 받아마실 수 있는데 이건 뭔가 싶었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 닭육수였다. 막국수집에서 면수나 동치미 국물이야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닭육수 주전자까지 내오는 집은 이 때까지 가본 막국수집 중에 처음이었다.
단독 짤방은 못만들었지만 동치미를 담은 그릇도 같이 나왔는데, 무슨 맛이려나 하고 한 번 국물을 들이켜 봤는데 어익후 했다. 사이다 같은 감미료를 많이 넣어 달달하고 알싸한 맛의 동치미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시큼털털한 맛이었는데, 단맛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마 이런 투박함 때문에 여기가 안맞는 사람도 있겠구나 싶었다.
일본인 관광객을 노렸는지, 이렇게 일본어로 된 홍보 기사도 벽에 붙여놓고 있었다. 다만 주변이 일반적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할 법한 상가 투성이라, 과연 얼마나 많은 외국 손님들이 방문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주문한 막국수 특곱배기. 양념장과 메밀면, 혹은 거기에 무김치를 더하는 정도로 매우 단촐했던 샘밭이나 퇴계와 달리 이 곳은 좀 더 호화로운 모양새였다. 이 집 막국수는 기본으로 주문해도 이렇게 닭고기가 딸려나오는데, 막국수 곱배기를 주문하면 국수 사리가, 막국수 특을 주문하면 닭고기가 더 나오는 식으로 되어 있다. 특곱배기는 둘 다 많이 나오는 거고.
찬 국수에 곁들여 나오는 만큼 닭고기도 마찬가지로 차게 한 것을 내왔는데, 일단 삶고 나서 어느 정도 물기가 빠졌는지 탄력이 없고 좀 꾸덕꾸덕한 육질이었다. 실수로 이렇게 한 것 같지는 않고, 이게 이 집 전통으로 여겨졌다. 닭육수가 그릇 밑에 살짝 부어져 나왔지만, 일단 잘 비벼지도록 동치미 국물과 주전자의 닭육수를 좀 더 넣었다.
그리고 일단 비벼서 한 장. 면발은 확실히 메밀을 많이 썼는지 쫄깃하지 않고 뚝뚝 끊기는 식감이었다. 다만 양념장의 경우 샘밭에서 먹어본 조화로운 맛이나 퇴계에서 먹어본 살짝 맵싸함이 강조되는 맛과도 달랐다. 대신 시큼함과 짭짤함이 강조되어 있어서, 동치미와 마찬가지로 서울 식으로 마개조된 달달한 막국수를 상상하고 온 사람이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맛이었다.
그래도 완벽하게 거부감이 드는 맛도 아니었고, 닭고기 씹는 맛도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라 싹 비웠다. 다만 동치미의 경우 끝내 익숙해지지 못해서 남겼고, 닭고기도 처음에는 순살만 발라낸 줄 알고 입에 쑤셔넣다가 뼈가 걸려서 살짝 성가시기도 했다.
이렇게 한 그릇에 8000원이라, 확실히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게 느껴진다. 하지만 샘밭 서울 분점도 아마 비슷한 가격으로 또 뛰었을 거고, 춘천 현지에 가서 먹어도 왕복 차비 합하면 오히려 돈이 더 많이 깨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손해봤다는 느낌은 없었다. 집에서 멀지 않고, 또 닭고기를 넣어 동물성 단백질도 보충해주는 막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점부터 마음에 들었고.
그리고 2011년을 하루 남겨서는 지난 번 가려다가 망년회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던 용사의 집도 재방문했다. 다음에 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