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초부터 지방행이 잦아지고 있다. 1월 말에 대구, 포스팅은 안했지만 2월 말에 울산, 3월 말에는 지금 쓸 광주와 다음에 쓸 통영까지 어째 영호남 유람기 식이 되고 있는데, 원래 방랑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 여행을 설명하는 공통의 키워드에는 처묵처묵이 있다.
특히 광주의 경우 그 처묵처묵의 비중이 다른 곳보다 꽤 높은 편인데, 이번에도 그 비중은 당연하게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음악잡설의 비중이 의도적으로 축소되는 모양새가 되는 것도 감수하고 광주와 통영 여행기를 연달아 올리기로 했다.
이번 광주 방문은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정확히 하자면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명분 상으로는 전라권 지역에서 열리는 유일한 대규모 동인 행사인 쥬씨페스티벌을 처음으로 가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가 열린 23일이 아닌 그 전날인 22일에 광주에 도착한 것은 물론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휴게소 먹거리도 마다하고 유스퀘어에 도착한 뒤, 내가 첨단09 버스를 타고 가장 처음 향한 곳은 광주 도시철도 금남로4가역 1번 출구 바로 지척에 있는 한 추어탕 집이었다. 물론 추어탕을 아예 안먹어본 샌님도 아니었고, 오히려 추어탕이라는 음식을 처음 접한게 남도식이라서 오히려 이쪽 스타일에 익숙하다면 익숙하다. 하지만 그걸 남도 현지에서 먹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게 이름은 무등산 혹은 뽐뿌집으로 되어 있는데, 후자의 경우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했을 때 펌프로 지하수를 길어먹던 시절을 따온 거라고 했다. 물론 지금까지 그 '뽐뿌' 로 물을 길어먹지는 않지만, 일본식 조어의 쌈마이함 덕분인지 뽐뿌집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다.
광주 현지인이 운영하는 모 식도락 블로그에서는 이 집이 연륜을 자랑하는 노포이기는 하지만, 전남도청이 무안군으로 이전한 뒤로는 손님이 상당히 줄어버렸다고 적고 있었다. 그걸 의식해서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오후 2시 가까운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나 외의 손님이 없었다. 가게 내부도 어두운 편이라, 처음에는 '여기 오늘 안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게 주인도 분명히 있었고 내 주문에도 분명히 응했기 때문에,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는 추어탕 하나 뿐이니, 주문을 특별히 안해도 사람 수에 맞춰서 나오는 것 같다.
의자는 다소 딱딱한 나무 의자로 통일되어 있었고, 연식도 꽤 되어 보여서 이런 면에서 꽤 꼬장꼬장한 노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어탕 한 상이 차려졌다. 흑미를 넣어 지은 밥에 밑반찬도 간소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 곳 특색이 느껴지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곰삭은 묵은지와 매우 부드러운 식감이라서 먹어 보고 꽤 놀랐던 동치미, 그리고 여기서 처음 먹어본 갈치속젓이었다.
이 곳 추어탕은 예전에 먹었던 그 남도 양식이라서 생경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미꾸라지를 꽤 거칠거칠하게 갈아넣은 것으로 보여서 식감은 꽤 터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망설임 같은 거 없이 바로 밥을 떠넣고 먹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래 끓여내는지, 시래기의 식감은 매우 부드러웠다. 대신 갈아넣은 미꾸라지는 꽤 거친 맛이었는데, 뼈가 꽤 단단하게 씹힐 정도라 치아가 그다지 좋지 않은 내게는 다소 성가실 수도 있었다. 물론 일단 갈아넣은 것이라 잇새에 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수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추어의 거친 식감 뿐 아니라 국물 맛 자체도 된장의 강한 내음이 지배적이라 진짜 옛스러운 맛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여기에 처음 먹어보는 갈치속젓의 독특한 맛이 더해져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풍겨나온 것 같다. 사실 광주 여행 직전에 굴전을 잘못 먹었다가 체했기 때문에 강한 내음이 느껴지는 해산물은 자제하자고 생각했는데, 저 젓갈도 내음 자체는 강했지만 그렇게 역하다는 느낌까지 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꽤 낯설고 옛스럽기는 했지만, 거부감 보다는 흥미로움이 든 한 상을 비워냈다. 이 집을 먼저 포스팅했던 그 광주 블로거의 말처럼, 좀 더 오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돈을 내고 나와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광주점으로 갔다.
사실 알라딘의 경우 딱히 사려고 한 게 있어서 간 건 아니었고, 그냥 뭐 있나 하고 기웃거리는 수준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웃거림 덕에 CD를 세 장이나 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게 동인 행사와 식도락 위주가 될 뻔한 여행에서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추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관현악단 음원 사냥에 몰두하면서도, 정작 서울시향이 도이체 그라모폰(DG)에 내고 있는 음반에 돈을 쓴 적은 없었다. 2014년 3월 현재까지 나와 있는 여섯 장의 음반 모두 지인의 것을 빌려서 들었을 뿐인데, 그러다가 '이제 내 걸로 사야 겠다' 하는 생각을 한 게 이번 달 중순 쯤이었다. 하지만 여행 경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진짜 구입 실천은 한없이 미뤄두고 있었는데, 그게 여기서 갑툭튀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서울시향의 첫 DG 음반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내 시선을 잡아끌었는데, 프랑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나탈리 드사이의 '보칼리제' 라는 음반의 경우 예전부터 객석의 음반평으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구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무엇보다 구입의 동기가 된 것은 수록곡 중 말미에 있는 라인홀트 글리에르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협주곡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봄의 소리' 의 소프라노와 관현악판이었다.
글리에르의 곡은 예전에 포스팅하기도 했지만, 에르나 베르거+베를린 필+세르주 첼리비다케의 오래되고 불안정한 방송 녹음 외에 음질이 깨끗하고 원곡 악보에 충실한 새 녹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콜로라투라 곡이다 보니 기교나 음역 처리가 완벽하다고 해도 목소리가 어두운 경우에는 별로 끌리지 않다는 개인적인 취향 문제가 있었는데, 드사이의 가창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 줄 정도로 깨끗하고 명료했다.
마지막으로 고른 것은 클래식이 아닌 재즈 음반이었는데, 작년에 필윤의 재즈 스토리라는 연속 공연을 빠짐없이 연속 관람했을 때도 언급했지만 첫 회에 나온 임미정 퀸텟 공연을 보러 갔을 때 3집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3집 이전의 음반들 같은 경우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거나, 나온 지 좀 돼서 이미 시중에서는 중고 밖에 찾아볼 수 없다거나 했다.
임미정의 데뷰 음반이었던 1집 'Flying' 은 후자에 속했는데, 온라인 중고 매장에서도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데다가 가격대도 5000원 대로 꽤 저렴했기 때문에 이것도 결국 같이 골라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예기치 않은 데서 돈이 나가기는 했지만, 원치 않았거나 허튼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별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추어탕으로 여행지의 첫 끼니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예상치 못한 지름신 영접까지 했는데, 다만 그 이후에는 다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전남권 최대의 동물원이 있다는 우치공원에 가는 것이었는데,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광주의 시내버스 체계가 수도권 사람들 눈에는 워낙 충공깽이었고, 시내에서도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알라딘에서 시간을 꽤 많이 지체한 상황에서는 공원에 닿아도 관람 시간이 얼마 없거나 끝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AI 문제로 수도권 동물원이 몽땅 휴원한 상태에서 여기서나마 동물들을 보며 힐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쉽게도 접어야 했다. 동물원 관람을 포기하고도 내 번민은 계속 이어졌는데, 어느 시장에서 저녁을 먹을 까, 또 어디 모텔을 잡아서 하룻 밤을 묵을까가 중요한 문제였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