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판옥에서 타코야키와 오코노미야키, 야키소바를 맛보고 나니, 뒤셀도르프를 떠나오고 나서 한 동안 입에 못댄 일본식 라멘도 조금씩 땡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셀도르프의 그 '나니와' 처럼 여러 종류를 하는 집은 일본 요리점이 과포화 상태라고까지 여겨지는 홍대 쪽에서도 흔한 편이 아니었다.
거기서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며 먹었던 쇼유-시오-미소와 먹을 일이 없었던 톤코츠까지 내 취향을 모두 만족시켜줄 곳은 없을까 했는데, 과포화네 어쩌네 해도 역시 해답은 홍대에서 찾을 수 있었다.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두 블럭 걷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소위 '걷고싶은 거리' 에 있는 집이었는데, 다만 제일 가까운 9번 출구는 심심하면 도떼기 시장이 되는 탓에 개인적으로는 8번 출구로 나와 걷는게 더 편했다. 가게 이름은 간판에 있듯이 산쪼메였고, 가맹2호점이라고 되어 있어서 어딘가에 본점이나 다른 가맹점이 있는 것 같았다.
흔히 일식 요릿집에 가는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하곤 하는 중간 휴식 시간이 없다고 써붙여 놓았는데, 물론 고객 입장에서는 편하겠지만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괜찮은 건지 약간 의문이 들기도 했다.
라멘집이라고는 해도, 돈부리(일본식 덮밥)도 같이 파는지 따로 테이크 아웃 된다고 입간판을 세워놓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먹고 싶었던 것은 라멘이었으니 이건 가장 나중을 기약했다.
가게 안은 상당히 좁은 편이었는데, 식사 공간은 길쭉하게 난 통로풍 공간에 2인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인 모양새였고 그 반대편에는 칸막이친 주방이 있었다. 주방을 마주하고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했지만, 이렇게 좁은 곳에서는 불가능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본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주문 받던 남자분은 일본식 억양의 한국어를 했기 때문에 일본인이 확실해 보였다.
일단 빈 테이블에는 이렇게 코팅한 가격표와, 짤방은 못만들었지만 음식 사진이 찍힌 책자형 메뉴판 두 종류가 갖춰져 있다. 뭘 먹겠다고 시키고 나면 사인펜으로 체크하고 두 가지 모두 가져가는데, 테이블도 두 사람 먹을 것을 놓으면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아서 이렇게 하는 것 같다.
그 작은 테이블의 벽쪽에 밀어붙여놓은 연장과 양념통들. 집게가 들어가 있는 두 가지 통 중에 큰 것은 김치통, 작은 것은 초생강(베니쇼가)통이었다. 그 외에는 후춧가루가 든 것 같은 양념통과 맵싸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다진 고추가 든 스테인리스 종지도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내가 먹을 때 곁들인 건 오직 김치 뿐이었는데, 초생강은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손도 못댔다.
맨 먼저 시켜먹은 것은 쇼유라멘(6000\)이었다. 차슈가 생각보다 작은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먹어 보는 일본 라멘이고 또 그 중 가장 즐겨먹는 쇼유 계통이라 입에는 상당히 잘 받았다. 국물도 생각보다 느끼하지 않았고, 간도 흔히 짜다는 일본 라멘 치고는 적당한 편이었다.
통영 갔다온 뒤 두 번째로 찾아갔을 때는 시오버터라멘(7000\)을 주문해 봤는데, 사실 이건 시키면서도 약간은 의심스러운 메뉴였다. 시오라멘이야 먹어본 적은 여러 차례 되고 쇼유 다음으로 좋아한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거기에 버터라고? 그리고 나온 것을 보고는 약간 멘붕 상태에 빠졌다. 수저 밑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약간의 버터 덩어리가 보였고, 국물에서는 육수 냄새와 버터 냄새가 섞인 묘한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이거 정말 느끼하겠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버터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먹는 내내 미묘함과 느끼함이 혀를 지배한 탓에 김치를 두 번이나 덜어먹어야 했다. 물론 추운 겨울철에는 딱일 것 같은 메뉴였지만, 먹은 시점이 4월 초였던게 에러였고 맑은 소금 국물의 시오라멘을 기대한 것이 실책이었다. 버터 없는 시오라멘도 있었으면 했는데.
시오버터라멘의 미묘함을 뒤로 하고 세 번째 갔을 때는 미소라멘인 산쪼메라멘(6000\)을 주문해 먹었다. 가게 이름을 굳이 넣은 것에서 이 집의 간판 메뉴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도 쇼유라멘과 함께 이 집에서 먹은 가장 괜찮은 라멘이었다. 약간 달달한 일본 된장을 넣은 국물 맛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이 두툼한 차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전에 먹은 두 라멘에서는 다소 작고 얄팍한게 들어 있었던 것에 비하면 신기할 정도였다. 질기지도 느끼하지도 않은 돼지고기가 입안에 들어가는 그 촉감이란.
81번옥인가 어딘가에서 시작했다는 점보라멘은 이 가게에도 있었는데, 다만 개인적으로는 식사량이 많다고 해도 저렇게 미각의 쾌감을 스포츠 이벤트 마냥 희생시켜야 하는 푸드 파이터 스타일 메뉴는 결코 반기지 않는 탓에 사진만 찍었다.
그리고 라멘 종류로는 마지막으로 먹어본 톤코츠라멘(5000\). 가장 싼 가격의 메뉴다 보니 뭔가 하나 더 시키고 싶어서, 연어 후리가케밥(1000\)도 같이 주문했다.
물론 후리가케밥이라는 것 자체가 반찬 없을 때 임시변통으로 먹는 식의 메뉴다 보니,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런저런 양념과 깨, 잘게 부순 연어살을 조그마한 공기에 담은 밥에 얹으면 그만이니까.
돼지사골 육수는 냄새도 나지 않고 깔끔한 편이어서, 예전에 하카다분코에서 먹은 청라멘이 연상되는 맛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기름기는 청라멘보다도 더 적은 편이어서, 좀 엷게 우린 돼지국밥 국물을 먹는 맛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의 '로컬라이징' 일까? 아무튼 돼지고기 많이 먹기로 유명한 독일에서도 이 톤코츠라멘은 파는 곳을 결국 못찾아 고베 출신이라는 일본인 룸메이트에게 하소연까지 했는데, 이렇게라도 그 식탐을 풀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라멘도 네 종류 다 먹어봤겠다, 그럼 남은 건? 돈부리(덮밥)였는데, 여기서는 세 종류를 팔고 있었다. 쇠고기덮밥인 규동과 돼지고기덮밥인 카쿠니동,
그리고 매운 돼지고기덮밥이라는 부타동. 하지만 규동은 정직하게 쓴 것 같은 식재료 원산지 표시에서 미국산 쇠고기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바로 포기했고, 부타동도 '일본식 매운맛' 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 때문에 단념했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카쿠니동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돈부리 중 유일하게 먹어본 카쿠니동 중짜(6000\). 지금은 문을 닫은지 오래인 멘야도쿄에서 먹었던 부타동-다만 이건 매운 음식이 아니었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다만 고기는 달달짭짤했던 멘야도쿄 부타동의 것과 달리 한국의 장조림에 가까운 식감과 맛이었고, 얼핏 보면 초생강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빨갛게 물들은 단무지가 올라와 있던 것도 이채로운 모양새였다.
그리고 약간 독특한 마요네즈 소스와 통조림 옥수수를 뿌린 양배추 샐러드와 '시치미' 라는 자그마한 조미료 통이 같이 나온 것도 라멘 메뉴들과 구분되는 모양새였다. 샐러드에는 다행히 오이가 없어서 큰 걱정 않고 먹을 수 있었는데, 시치미의 경우 딱히 넣을 이유가 없는거 같아 뿌리지 않았다.
목살 혹은 앞다리살을 오랫동안 익힌 티가 나는 돼지고기는 상당히 두툼했는데, 예상했던 장조림 맛도 났지만 비계가 어우러진 야들야들한 식감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이런 미사여구야 상관 없었고, 돼지고기를 고기류 중 가장 좋아하던 터라 라멘의 차슈 정도로 만족하기 힘들었던 내게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을 메뉴였다.
심지어 구워먹을 때는 이가 안좋아 항상 발라버리는 오돌뼈도 여기서는 그냥 씹어먹어도 될 정도로 부드러웠다. 중짜라고는 해도 먹은 뒤 배가 든든했던 탓에, 굳이 배고파 죽을 지경이 아니면 대짜를 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라멘 네 종류와 돈부리 한 종류를 먹어봤는데, 이렇게 쳐묵하고 나니 또 덮밥이 먹고 싶어지는게 식충이의 습성이었다. 그래서 돈부리이야기를 가봤지만, 여기는 언제 폐업했는지 뜬금없는 고깃집이 들어가 있어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마침 세종체육관세종문화회관에 공연볼 일이 있었던 4.19 혁명 52주년이 되는 날 그 근처에 있던 곳을 하나 찾아냈다.
하지만 여기도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고대병원 인근의 두 곳을 갔다온 것부터 좀 처리하고 싶다. 그것 말고도 길거리 쳐묵쳐묵 사례 중 충동구매의 만용이 극에 달했던 어느 이벤트에 참가한 것도 빨랑 써없애야 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