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독주 협주곡 두 곡-제 1번 A단조 BWV 1041, 제 2번 E장조 BWV 1042-과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2중 협주곡 D단조 BWV 1043 한 곡까지 세 곡 뿐이다. 물론 그 외에 바흐가 이들 협주곡을 쳄발로 협주곡으로 편곡한 것을 들어 몇 곡의 쳄발로 협주곡을 제 3자가 역으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편곡해 재구성한 곡들도 있지만, 바흐 자신이 남긴 곡으로는 저 세 곡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협주곡은 비발디의 '사계' 와 함께 고전 시대 이전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가 높고 연주와 음반 취입도 자주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 한국 연주자들이 남긴 음원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최근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아름다운가게 헌책방은 물론 중고음반 전문점보다는 가짓수나 다양성에서 떨어지지만, 일단 가격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저렴하고 광화문점에서 입수한 바이올린 협주곡집이나 강남점에서 찾아낸 부천 필 실황 음반처럼 잘 보면 레어템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점에서 늘 기대감을 갖고 드나들고 있다.
지난 9월 초에 구입한 CD도 강남점에서 발견했는데, 마찬가지로 가격은 겨우 2000원이라 그냥 곧바로 사갖고 올 수 있었다.
(Copyright unknown)
앨범 속지에 나와 있는 대로 김기재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했는데, 그 외에는 커버와 케이스에 따로 표기되어 있는 연주자가 없었다. 만약 이게 래핑되어 있었다면 뭔지도 모르면서 망설였겠지만, 중고인 만큼 열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속지를 넘겨서 나머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김기재는 속지의 이력에 따르면 서울대와 미국 템플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음대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 CD도 일종의 교수 연구 실적 발표용으로 내놓은 사가반으로 추측된다. 반주는 서울 프리모 신포니에타라는 생소한 이름의 실내악단이 맡았는데, 구글링을 해도 딱히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을 봐서는 녹음을 위해 임시 편성한 악단으로 보인다.
악단 편성은 세 곡 모두 현악 합주(+통주저음)라는 간소한 편성이라 제 1바이올린 5-제 2바이올린 4-비올라 3-첼로 2-콘트라베이스 1이라는 아담한 사이즈였고, 독주자 두 사람이 필요한 2중 협주곡에서는 제 1바이올린 주자인 김일남이 협연했다. 지휘는 클라리넷 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강릉시향 상임 지휘자를 역임한 바 있는 류석원이 맡았다고 되어 있다. 그 외에는 녹음 스탭 두 사람과 녹음 스튜디오(지구레코드) 정도만 기입되어 있고 녹음/제작 일자와 제작 회사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다.
일단 집에 와서 들어 봤는데,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음질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흐릿하거나 촛점이 불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주 바이올린의 소리 톤이 너무 중음역 쪽에 집중되어 바이올린이 아니라 얼후(二胡)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음질 뿐 아니라 연주 자체도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충분한 리허설과 재녹음을 하기 힘든 빠듯한 시간과 예산으로 진행되었는지, 곳곳에서 흔들리는 합주력이나 음정이 종종 거슬린다.
아무래도 감상용으로 쓰기에는 약간 모자른다 싶은 음반이었는데, 일단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을 순수 한국 음악인들과 기술진이 제작한 것으로 하나 갖추었다는 선에서 만족감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비발디의 사계는 내가 아는 한 '국내 토종 연주' 가 네 종류, 거기에 독주 파트를 바이올린이 아닌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한 좀 별종인 것까지 더하면 다섯 종류나 되지만, 이 곡은 바흐라는 이름에 일종의 경외감과 그로 인한 범접하기 어려운 포스 때문인지 이 음반 외의 다른 음원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한국의 실내 관현악단 CD도 꽤 여러 장 모았는데, 다만 그 중 음반을 가장 활발하게 내놓는 편인 서울바로크합주단의 경우 아직도 들어보지 못한 CD들이 여러 장 있어서 이런 것들도 사냥 목록에 올려놓아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