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영상사업단(이후 KBS 미디어로 개칭)은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녹음들을 음반으로 발매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는데, 초기에는 해동물산이라는 곳을 거쳤고 2000년대 부터는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내놓았다.
KBS의 음반들은 일관되게 세 가지 컨셉으로 제작되어 왔는데, 한국 연주자들의 녹음은 '한국의 연주가',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 녹음은 '한국의 작곡가', 그리고 한국 전통예술인들의 녹음은 '한국의 전통음악' 이라는 소제목으로 묶어서 분류했다. 이번에 내가 산 저 음반은 '한국의 연주가' 61집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콰르텟 21이라는 현악 4중주단의 녹음을 담고 있다.
저 단체는 속지 해설에 의하면 1991년에 창단되었고, 1992년에 예음상 실내악 부문을 수상했고 1993년에는 오사카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 입상했다고 나와 있다. 다만 좀 이상한 대목도 있는데, 1994년에 베를린에서 윤이상 1주기 추모음악제에 참가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윤이상이 세상을 뜬 해는 1995년이다. 집필자 실수로 졸지에 고인드립
*여담으로, 실제로 콰르텟 21이 참가한 윤이상 1주기 추모 음악회는 1996년 11월 8일에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개최되었고, 이 공연에서 연주한 현악 4중주 4번의 실황녹음은 국제 윤이상 협회 1집 CD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도 멤버가 고정되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 녹음 당시의 라인업은 김현미(제1바이올린), 김정화(제2바이올린), 위찬주(비올라), 박경옥(첼로)으로 되어 있었다. 수록곡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52번 '종달새' 와 윤이상의 현악 4중주 6번,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인데, 하이든과 보로딘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윤이상 곡이 든 게 구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실 이 음반의 존재를 새삼 확인한 건, 작년 11월에 베를린 필 내한 공연 때 객원 피아니스트로 왔던 국제 윤이상 협회 회장 대리 홀거 그로쇼프의 문의였다. 한국에서 제작한 윤이상 음반을 구하고 있는데 현재 구입할 수 있냐면서 두 장의 소재를 물어봤는데, 그 중 하나인 진현주 한국 현대 바이올린 작품집 CD(아울로스)는 공연장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위치한 음반 가게에서 직접 찾아주고 구입하도록 했다.
나머지 하나가 이 CD였는데, 이 시리즈는 물론 국립예술자료원 등에 소장되어 있지만 대개 몇 장씩 이가 빠진 상태고 음반 시장에서도 절판된 지 오래라는 답변 밖에 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중고음반 사이트나 판매점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올해 초까지는 별 소득이 없던 상태였다. 하지만 올해 3월 쯤 뮤직앤시네마라는 중고음반 사이트에 이 KBS 시리즈 음반들이 속속 올라오더니 이 CD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곧바로 구입했는데, 음반 수집의 재미는 이런 레어템을 발견하고 주문하고 받았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에서 온다.
실제 공연에서 이들의 연주를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기본 실력이 어느 정도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 녹음은 1999년 9월 6일과 20일에 KBS 라디오 16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것이라 아마 여러 차례의 세션과 편집을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리가 약간 어둡고 탁한 감은 있지만, 음질 면에서 딱히 꿀리는 것은 없다. 다만 윤이상 4중주 3악장에서 기계적인 문제로 보이는 잡음이 살짝 들어간 것은 옥의 티로 지적하고 싶다.
연주나 음질을 떠나서 한국의 실내악단이 연주한 윤이상 작품 녹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꽤 유니크한 물건인데, 내가 아는 한 이런 시도를 한 단체는 이 콰르텟 21과 지금은 해체된 금호아시아나 현악 4중주단 정도 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 2000년 9월 25일에 서울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에서 개최한 공연 실황을 담은 금호문화재단의 비매품 CD가 그 증거물인데, 윤이상의 현악 4중주 3번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22번,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3번을 담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다만 자신들의 연주를 담은 음반의 프로모션에 서툰 것인지 아니면 무지한 것인지는 몰라도, 국제 윤이상 협회 측에서도 확보하지 못해 이렇게 한국에 사는 뜨내기에게까지 음반의 존재를 물어보고 있다는 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는 비매품 같은 한정된 시공간에서만 돌아다니는 것 뿐 아니라 이렇게 팔려고 내놓는 상업반에도 공통으로 해당되는 문제다.
일단 자신들의 연주를 내보이려고 제작한 음반이라면 국내외에 좀 더 적극적인 마케팅을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음반 시장이 거의 말라죽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 노력을 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뮤직앤시네마에서 낱장으로 구입한 뒤, 뮤직랜드에서도 이 음반이 담긴 15장 짜리 세트를 누군가 중고(used) 카테고리에 통째로 올려놓은 것을 또 찾아냈고 이것도 꽤 거액을 들여(105000\) 구입했다.
이 중 뮤직앤시네마에서 구입한 것을 개인 소장품으로 하기로 했고, 뮤직랜드에서 구입한 세트에 포함된 음반은 국제 윤이상 협회에 소포로 부쳐주기로 정했다. 이외에도 같은 세트가 알라딘 중고 쪽에서 팔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일단 내가 모으고 또 보내줄 것은 구입이 끝났으니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취향과 목적으로 구입할 지가 좀 궁금하다.
그리고 뮤직랜드에서는 클래식 쪽 신보 중 뭐가 나왔나 하고 그냥 별 생각 없이 눈팅을 하다가 뭔가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 한지원이라는 피아니스트의 데뷰 앨범이라고 했는데, 이 앨범에도 윤이상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클릭해서 정보를 확인했다.
한지원은 2013년에 윤이상 국제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한 신예 피아니스트라고 하는데, 같은 해 8월 2일에 이 음반의 제작사인 메이드 컨텐츠 야기의 스튜디오 겸 홀에서 '해설이 있는 음악회' 라는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이 때 프로그램은 쇼팽의 뱃노래와 슈만의 사육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이었는데, 슈만 곡을 빼면 음반에도 모두 수록된 곡이라서 음반 제작은 아마 이 공연을 전후해 해당 스튜디오에서 병행한 것 같다.
나머지 수록곡은 쇼팽의 발라드 4번과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의 세 악장', 그리고 마지막에 윤이상의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이 실려 있다. 요즘 클래식 CD 답지 않게(??) 78분 여를 꽉꽉 채워담은 패기가 두드러지는데, 다만 음반 속지는 그냥 녹음과 연주 사진 몇 장이 전부고 곡 해설이나 연주자 프로필 같은 것을 몽땅 생략한 것이 좀 마뜩찮았다. '텍스트 따위는 집어치우고 음악부터 들으라' 는 쿨함이 컨셉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다른 곡들의 러닝 타임 같은 걸 따져 보면, 전곡 연주에 불과 7분 반 정도 소요되는 윤이상 곡은 자신이 윤이상 국제 콩쿠르 입상자임을 인증하는 일종의 서비스이자 디저트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다. 다만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윤이상 음악을 시덥지 않다는 듯 다루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런 시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연주자 입장에서 데뷰 앨범에 대뜸 포함시켰다는 것 자체가 좀 놀라웠다.
녹음을 기획/제작한 메이드 컨텐츠 야기도 처음 들어보는 회사인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음악과 관련된 여러 제반 업무들과 애니메이션/영상물 제작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컨텐츠 제작을 맡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자체 기획/제작 앨범으로는 튜바 주자 이동화의 'Soul & Passion' 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하는데, 아직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앞으로 어떤 앨범을 내놓을 지 기대가 된다.
올 4월에 출반된 이 앨범도 아직 국제 윤이상 협회에서는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이메일로 제보하고 보내겠다고 하자 곧바로 감사를 표하는 답장이 도착했다. 알라딘에서 내 몫과 협회 몫으로 각각 한 장씩 주문했고, 위에 쓴 콰르텟 21 CD와 함께 독일로 소포를 부칠 예정이다. 다만 해외에 주문해서 받은 소포는 있어도 내가 해외로 부친 적은 없어서, 비용이 얼마나 들고 또 어떻게 포장해야 파손 없이 보낼 수 있는 지는 좀 찾아보고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윤이상 곡들을 담은 이런 앨범 외에도, 뮤직앤시네마를 비롯한 여타 중고음반 사이트들과 황학동 중고음반점들에서 지른 것들도 꽤 있으니 다음 음악잡설도 이런 쪽 위주로 나갈 것 같다. 하지만 오랜만에 록 공연장에 가서 젊었을 적의 혈기를 조금이나마 발산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것도 좀 써볼 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