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5일에 홍콩 소재 다국적 음반사인 낙소스의 일본 지사 낙소스 재팬에서 뭔가 흥미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NHK 엔터프라이즈와 손을 잡고 NHK의 음향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NHK 교향악단의 실황 음원들 중 일부를 낙소스의 인터넷 스트리밍 음악 사이트인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이하 낙뮤라)에만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막상 알게 된 것은 낙소스 재팬의 공지 이후 2주도 더 지나서 였는데, 일본어에 능숙한 지인이 알려준 덕에 그 음원들의 일부를 들어볼 수 있었다. 그 중에 개인적으로 꽤 '불쾌한 흥미' 를 자극시킨 것이 하나 있어서, 이번 뻘글의 주제로 삼았다.
예전에 아예 포스팅을 휘갈기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사랑은 심지어 원산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의아하게 볼 정도로 메가데레유별난 축에 속한다. 오죽하면 다른 9번 교향곡들이 쌔고 쌨는데도 '제9' 라고 하면 일본인들은 바로 이 곡을 떠올린다고 할까. 물론 나치즘에 푹 빠졌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을 당한 해당 국가들처럼, 일본에서도 이 9번을 정치적으로 이래저래 악용한 사례들이 꽤 된다.
ⓟ 2012 Naxos Japan, Inc.
이번에 공개된 음원들 중 가장 오래된 음원도 바로 그 사례에 해당되는데, 녹음 시기가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뮤라 일본어판에는 음원 원산지답게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는데, 번역기를 돌려 확인해 보니 그 해 12월에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에서는 대동아 전쟁이라고 부름) 개전 1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송년 음악회의 실황이라고 했다. 더 자세한 공연 정보는 구글링을 해본 결과 26~27일 이틀 동안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고 나와 있었고, 실황 중계와 녹음은 물론 NHK의 전신인 JOAK 방송국에서 맡았다고 한다.
연주진은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관현악단으로 표기된 일본 교향악단은 원래 신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1926년 창단되어 활동하던 악단이 한창 전쟁 중이던 1942년 1월에 개칭된 것이다. 이 당시 일본 교항악단은 동맹국인 독일이 매우 증오하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조셉 로젠스톡보다 오타카 히사타다(尾高尚忠)와 타카다 신이치(高田信一), 야마다 카즈오(山田一雄)가 더 자주 출연하면서 악단을 이끌고 있었고, 이 공연에서는 야마다가 지휘를 맡았다. 관현악 외에 합창은 일본 방송 합창단이, 독창은 미야케 하루에(三宅春恵. 소프라노)와 요츠야 후미코(四家文子. 알토), 키노시타 타모츠(木下保. 테너), 야타베 케이키치(谷田部勁吉. 베이스)가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4월에 동맹국이었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이 곡이 비슷하게 '능욕' 당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포스팅들에서 이미 다룬 바 있었다. 물론 그 당시의 녹음은 지금도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고, 연주는 끝내주게 카리스마 있지만 연주 목적이 목적이었던 만큼 음악과 정치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도 박터지는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녹음과 비교하게 되었다.
이 일본 교향악단(=종전 후 NHK 교향악단) 음원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녹음인 만큼 그 역사적 가치는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는 음원이지만, 역사적 가치에 비해 예술적인 가치가 얼마나 크냐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부정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다만 녹음의 질은 사실 베를린 필이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1942년 4월에 남긴 것과 비교하면 이게 좀 더 우수하다.
사실 둘 다 테이프가 아닌 아세테이트 디스크 혹은 와이어 레코더 같은 음질이 시망인 매체로 녹음된 까닭에 음질 비교는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지만, 방송국 자료실에 '고이 모셔져 있던' 이 음원과, 개인 수집상들의 손을 거치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골동품 경매장에서 빛을 보게 된 푸르트벵글러의 음원을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이게 더 보존 상태가 좋았을 것은 뻔하다.
그리고 이 녹음도 처음으로 공개하면서 NHK 측에서 최신 기술로 잡음을 가능한한 제거해서 깨끗하게 들릴 뿐이지, 당시 JOAK 스탭들의 허접한 녹음과 중계 실력을 곳곳에서 유감없이 만끽할 수 있다(특히 3악장에서 마치 파도처럼 출렁대는 불안정한 피치가 압권이다). 오죽하면 아직 테이프 녹음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도 전이었던 1930년대 후반에 독일 제국방송에서 JOAK와 단파방송을 통해 음악 프로그램 교환을 했을 때, 독일 기술진들이 '아오 이 놈들 방송 기술 수준이 왜 이 모냥이냐' 라고 불평했을까.
그렇다고 연주의 수준이 푸르트벵글러 싸대기를 때리거나 맞먹으려 들 정도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딱 잘라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녹음 탓도 있겠지만 유난히 제어가 안되는 팀파니의 무지막지한 음량과 곳곳에서 버벅거리는 관악기 솔로, 2악장 초반부 등 빠른 악구의 속도와 음표의 홍수를 따라잡지 못해 엉성하게 넘어가는 현악 합주는 당시 일본 최고라 불리던 악단이 결코 세계구 급의 실력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독창과 합창도 당시 일본에서 섭외할 수 있는 최상의 가수들을 끌어와서 공연했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베토벤이 요구한 캐사기급 역량에 확실히 못미치는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연주의 질을 떠나 4악장의 경우에는 가사 처리 면에서 또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베토벤이 다듬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독일어 가사를 전부 일본어로 개사해서 부르고 있다. 번역은 베이스 독창자였던 야타베 케이키치가 담당했다고 하는데, 낙뮤라 음원 설명을 보면 다소 구식 문어체로 번역되었다고 하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현대 번역과의 차이를 알 길이 없다.
물론 일본 성악가들이 독일어 발음이 영 좋지 않아서 이렇게 개사해 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이미 1930년대에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을 (당시 기준으로) 꽤 능숙한 독일어 발음으로 불렀고 세계 최초로 음반까지 만든 바 있다. 오히려 당시 국수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음악계의 시류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면에서, 또 청중들에게 자국어로 가사 전달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한 실용적인 면에서 개사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예술적인 면에서는 이렇다 치고, 과연 음악회의 모토인 '대동아전쟁 개전 1주년' 의 저무는 한해를 환희의 송가와 함께 축하할 정도로 일본의 상황이 좋았을까? 절대 아니었다. 이미 그 해 6월에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처절하게 쳐발렸고, 육군도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군과 함께 그야말로 녹아났다. 그 동안 일본군의 승리 만을 국민들에게 선전했던 대본영과 정부, 언론들도 이제는 이러한 대패 사실을 어떻게 숨기고 왜곡해야 할 지 머리를 싸매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되면 악화될 수록 이들의 베토벤 애호는 최절정에 다다른 국수주의+황국사관과 함께 그 쪽 말로 '얀데레' 수준까지 치달았다. 1942년에 이 '제9' 로 개전 1주년 송년 음악회를 열었던 일본 교향악단은 1945년 6월 14일에 '베토벤 연속 연주회' 의 마지막 순서로 같은 곡을 재차 연주했다. 한 달 전 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추축국에서 이탈했지만, 그러한 대격변도 이미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이 연주회를 끝으로 일본 교향악단은 여름 휴가를 빙자한 무기한 활동 중지 상태가 된 채로 종전을 맞았다.
물론 지금도 일본의 몇몇 우익 성향, 혹은 스스로를 비정치적이라고 여기는 듯한 음악 애호가들은 자신들의 블로그나 SNS 등에 '드디어 70년 전에 우리 일본인의 손으로 공연하고 녹음한 제9를 듣게 되었다' 고 꽤 감개무량한 어조로 한껏 자축을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그 기쁨과 자부심 뒤에 있던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고, 또 그 속에서 환희라는 메시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직도 2차대전 당시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계속 하는 독일과, 여전히 그 노력이 미진한 일본의 상황을 볼 때 이러한 환호가 더더욱 씁쓸하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