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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떼기죽으로 늦은 끼니를 때운 뒤, 곧바로 통영국제음악당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해저터널 대신 충무교로 건너갔는데, 버스를 타고 건너가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도보로 가본 적은 처음이었다.
대형 선박의 입출항 문제 때문인지, 다리가 꽤 높이 설계된 편이었다. 멍게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마침 다리 아래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리 양 가의 인도가 그다지 넓지는 않았고, 여느 교각이 그렇듯 대형차가 지나가면 조금씩 흔들리는 것 때문에 밑을 내려다보는 게 꽤 소름이 끼쳤다. 다리를 건넌 뒤에는 계속 도남로를 따라 이동했다.
가는 길이 좀 멀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벚꽃으로 치유받으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거의 도착했을 무렵, 멀리서 농악 비슷한 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공연이 있나 했다. 하지만 공연은 아니었다.
아마 통영시 측에서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으며 주변 토지에 대해 관광 관련 생업을 가진 주민들과 충분한 합의 없이 용도 변경을 한 모양이었는데, 그래서 주민들이 이렇게 플래카드를 걸고 꽹과리와 북을 치며 항의하는 집회였다. 옆에는 봉고차가 민중가요를 확성기로 틀어놓고 주기적으로 뱃고동 소리까지 울리고 있었는데, 통영국제음악회까지 달갑지 않았는지 그것까지 반대한다는 뉘앙스의 플래카드도 보였다.
온갖 소음의 향연 속에서 음악당으로 향하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남로에서 좀 더 올라가야 했지만, 통영시민문화회관처럼 상당히 가파르지는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음악당은 크게 중앙의 발코니 겸 광장을 중심으로 대공연장인 메인홀과,
소공연장인 블랙박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공연장들이 아니라, 발코니를 통해 볼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이었다.
비록 날씨가 흐렸기 때문에 생각했던 만큼의 장관은 아니었지만, 바다와 인근 지역을 널찍이 조망할 수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공연장에서 배부한 책자에 실린 음악제 예술감독이자 이 날 공연의 지휘자였던 알렉산더 리브라이히(Alexander Liebreich)도 인터뷰에서 '이 만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공연장이 어디 있겠냐' 고 언급했는데, 다음 방문 때는 날씨가 좋기를 바라며 메인홀로 들어갔다.
일단 꿀빵 꾸러미를 보관소에 맡긴 뒤 올라갔는데, 공연장 내부는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이나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그리고 최근 재개관한 대구시민회관처럼 슈박스(구두상자) 형태였다. 콘서트에 최적화된 설계인데, 3층에서 봤기 때문에 1층이 어떻게 되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민문화회관보다는 좀 더 넓어 보였다.
하지만 이 개막 공연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음악제 사무국 측의 미숙한 일처리로 꽤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시작되었다. 공연 직전에 자꾸 중복 좌석표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인데, 심지어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고 온 나조차도 그렇게 중복 예매로 골탕을 먹었다. 진행 요원들은 1층 로비에 가면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불과 공연 시작 3~4분 전에 그러라는 건 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예매한 좌석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공연은 결국 좀 지연되어 시작되고 말았다. 이 날 출연한 악단은 음악제를 위해 임시 조직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였는데, 정확한 악단원 명부가 없어서 확인은 못했지만 아마 리브라이히가 현재 상임 지휘자로 있는 폴란드 카토비체의 국립 방송 교향악단 단원들에 앙상블 TIMF 단원들을 주축으로 기타 객원 연주자들이 가세한 것으로 보였다.
현악 편성이 14-12-10-8-6으로 단촐한 것을 제외하면 표준 관현악단 편성이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관악 단원들은 대부분 한국인 혹은 한국계로 보이는 동양인 연주자들이었다. 대개 이런 편성의 악단을 조직할 때면 관악은 서양 연주자들을 데려다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뭔가 거꾸로 된 모양새였다.
첫 곡이었고, 내가 공연을 보러 오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던 윤이상의 '유동' 은 공연장에서는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음반도 국제 윤이상 협회 회원 전용반 3집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듣기 힘든 편이다. 해당 음반에는 페터 로네펠트 지휘의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이 초연 직전 제작한 방송 녹음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해당 녹음보다 좀 더 빠른 템포를 잡고 팽팽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손열음이 협연한 라벨 협주곡은 앞에 연주된 윤이상 곡보다는 다소 심심하고 무덤덤하게 들렸다. 손열음이라는 피아니스트가 화려한 기교나 쇼맨십 보다는 다소 신중하고 중도적인 연주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면을 의도적으로 죽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런 면모가 늘 마이너스인 것은 아니어서, 2악장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어울리게 들렸다.
다만 진한 블루 노트의 음색이 지배적인 1악장이나 떠들썩한 시장통 분위기의 3악장에서는 너무 얌전하게 연주한 듯한 모양새라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손열음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시각이 다소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들린 게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여러 번의 커튼 콜 이후 앙코르로는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이 연주되었는데, 사실 개인적인 악취미로는 요즘 일본에서 대리 작곡 문제로 화두가 된 사무라고우치 마모루-라고 쓰고 니가키 타카시라고 읽는다-의 피아노곡을 골랐으면 했다. 손열음이 일본의 사무라고우치 열풍에 음반까지 내고 동참했음을 생각하면 그녀가 계속 관련 문제에 침묵만 하고있는 게 영 못마땅한 탓인데, 물론 그러고 싶어도 JASRAC(일본저작권협회)이 사무라고우치-니가키 간의 저작권 분쟁이 명확하게 끝날 때까지 모든 연주와 방송, 녹음을 봉인한 상태니 못했겠지만.
2부에서는 이번 음악제의 테마인 'Seascape' 에 어울리는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우선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에서 간주곡 네 곡을 발췌한 '네 개의 바다 간주곡' 이 연주되었다. 이후 연주된 드뷔시의 작품이 인간이 배제된 자연으로서의 바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면, 브리튼 작품은 그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이 생활 속에서 늘 접하는 바다라는 느낌이다.
드뷔시 만큼은 아니지만, 브리튼 곡도 꽤 섬세하고 정교한 연주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곡이다. 그런 면에서 연주 자체는 약간 실망스러웠는데, 물론 마지막 곡인 '폭풍' 에서 휘몰아치는 연주로 만회하기는 했지만 두 번째 곡 '일요일 아침' 에서는 금관의 역량이 아쉬웠고 세 번째 곡 '달빛' 에서는 밀고 당기는 느낌이 좀 더 강했으면 했다.
마지막 연주곡인 드뷔시의 교향 소묘 '바다' 는 공교롭게도 2002년에 이 음악제를 처음 찾았을 때 정명훈 지휘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폐막 공연 2부의 첫 곡으로 연주한 곡이기도 했다. 이번이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섬세한 디테일 면에서는 2002년 연주보다는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관악 파트의 난조도 브리튼 곡보다는 덜해서 윤이상 곡과 함께 이 날 연주된 곡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축에 속했다.
연주 후 커튼 콜이 이어진 뒤 리브라이히가 영어로 직접 앙코르를 소개했는데, '아리랑은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면 다 알 만한 노래' 라는 식으로 운을 띄우고 민요 '도라지' 의 편곡을 들려줬다. 물론 공식 프로그램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누가 편곡한 것인지 꽤 궁금했는데, 이 궁금증은 의외로 빨리 풀 수 있었다.
사실 공연 내내 집중하기가 좀 어려웠는데, 일단 음악당 자체의 음향 수준은 상당히 좋았지만 객석 바닥까지 모두 나무로 만들어 공연장 자체가 악기 역할을 하는 세종체임버홀과 비슷한 난점을 갖고 있었다. 말인 즉슨, 청중들의 매너가 좋아야 쓸데없는 잡음에 방해받지 않고 그 좋은 음향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뒷자리에 하필이면 아이들을 떼로 데려온 학부모들 덕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내 지루해진 아이들은 끊임없이 마룻바닥을 밟아 다지고 때로는 앞자리 좌석을 발로 툭툭 건들며 '합주' 에 동참했고, 아이들 외에 라벨 피아노 협주곡 연주 직전까지도 계속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던 몇몇 '어른이들' 도 진상인 건 비슷했다. 오죽하면 내가 '사진 좀 그만 찍으시죠?' 라고 대놓고 핀잔을 줬을까.
좀 거칠게 말하자면, 통영시청이나 통영국제음악제 측이나 좋은 공연장 지어놓았다고 만족스럽다고 한다면 그건 참 실없는 자뻑이다. 아예 객석 소음마저 집어삼킬 정도의 폭발적인 음량을 자랑하는 록 공연이나 청중들의 일탈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재즈 공연이 아닌 이상, 그리고 클래식 전용 홀로 지어놨다고 공표한 이상 그 공연장의 이미지 관리는 시청과 음악제, 그리고 청중들과 연주자들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이라도 균형이 깨진다면 그 후폭풍이 어떠할 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연 후 사인회가 있다는 공지를 들어가기 전 확인했는데, 어차피 독주자 우대에 편향된 한국 공연예술계의 특성 상 '뭐 손열음 사인회겠네' 하고 생각해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로비로 가보니 손열음과 리브라이히가 나란히 앉아서 사인을 해주고 있었는데, 손열음은 제껴두고 리브라이히의 사인을 받고 싶어서 바로 줄을 섰다. 다만 로비에서 쇼팽의 녹턴 앨범이 팔리고 있던 손열음과 달리, 리브라이히는 뭔가 자신있게 내밀어 사인받을 음반이 수중에 없었다.
그런데 잘 보니 공연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앨범이 하나 더 팔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하이든 교향곡 39번과 45번에 윤이상 실내교향곡 1번이 커플링된 ECM 음반이었다. 이 음반은 이미 예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모처에서 빌려들은 것이라 '언젠가는 사야 겠다' 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구입했다. 덕분에 좀 더 떳떳하게 사인을 요청할 수 있었다.
리브라이히 앞에 서게 되자, 오랜만에 현지까지 가서 배우기도 한 독일어 실력을 살려 공연이 좋았다는 말을 전하고 앙코르의 편곡을 누가 했는 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리브라이히는 음반 속지에 사인을 해주면서 뒷쪽에 실린 뮌헨 실내 관현악단 단원 명부 중 누군가의 이름에 표시를 해줬다. 악단 바이올린 단원인 베른하르트 예스틀(Bernhard Jestl)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편곡을 해줬다고요?' 라고 약간 놀란 어조로 묻자, 리브라이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작곡도 한다' 고 답해줬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비매너 청중들의 민폐 덕에 우거지상이 되어 공연장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 순간 만큼은 다시 헤벌쭉해졌다. 사인을 받은 뒤에는 '내일 공연의 성공을 바랍니다' 라는 말을 리브라이히에게 전하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음악당을 빠져나왔다.
음악제는 앞으로도 큰 탈이 없는 한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유무형의 지원이나 청중들의 관람 태도 개선, 주최 측의 책임 있는 운영도 한국의 여타 음악제와 마찬가지로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미 돌아갈 차표를 예매했기 때문에, 올 때처럼 느긋하게 걸어갈 수는 없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차가 뜸한 편이라 다소 조급한 심정으로 기다리다가 버스 하나를 발견하고 올라탔는데, 다행히 매우 충분하고 여유롭게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중간한 시간에 죽으로 끼니를 때운 탓에 배가 고팠는데, 시간은 많이 늦은 상태라 주변의 식당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 통영에서 먹은 마지막 한 끼는 터미널 맞은 편의 미니스톱에서 먹은 도시락이었다. 물론 편의점 도시락이라서 '나 이거 먹고 왔다' 고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찬이 꽤 푸짐한 편이라 배를 채우기에는 적당했다. 밥이 좀 적은 건 아쉬웠지만. 그리고 밤차에서 흔들리며 서울로 올라온 뒤, 다시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서울 코믹월드로 향했다. 20대 때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몸이 안따라 주니 꽤 피곤했다.
이후에는 지금까지 교향악축제를 비롯해 클래식 공연을 본 적이 딱히 없는데, 다만 음반은 꽤 여러 종류를 구입했고 이곳저곳에서 처묵한 것들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포스팅은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다만 글 쓸 시간이 주로 주말에 국한되기 때문에 이 때 여러 편 써서 4일 주기로 저장해두는 '묵은 글 저장소' 신세는 당분간 면치 못할 것 같다.
일단 꿀빵 꾸러미를 보관소에 맡긴 뒤 올라갔는데, 공연장 내부는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이나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그리고 최근 재개관한 대구시민회관처럼 슈박스(구두상자) 형태였다. 콘서트에 최적화된 설계인데, 3층에서 봤기 때문에 1층이 어떻게 되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민문화회관보다는 좀 더 넓어 보였다.
하지만 이 개막 공연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음악제 사무국 측의 미숙한 일처리로 꽤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시작되었다. 공연 직전에 자꾸 중복 좌석표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인데, 심지어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고 온 나조차도 그렇게 중복 예매로 골탕을 먹었다. 진행 요원들은 1층 로비에 가면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불과 공연 시작 3~4분 전에 그러라는 건 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예매한 좌석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공연은 결국 좀 지연되어 시작되고 말았다. 이 날 출연한 악단은 음악제를 위해 임시 조직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였는데, 정확한 악단원 명부가 없어서 확인은 못했지만 아마 리브라이히가 현재 상임 지휘자로 있는 폴란드 카토비체의 국립 방송 교향악단 단원들에 앙상블 TIMF 단원들을 주축으로 기타 객원 연주자들이 가세한 것으로 보였다.
현악 편성이 14-12-10-8-6으로 단촐한 것을 제외하면 표준 관현악단 편성이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관악 단원들은 대부분 한국인 혹은 한국계로 보이는 동양인 연주자들이었다. 대개 이런 편성의 악단을 조직할 때면 관악은 서양 연주자들을 데려다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뭔가 거꾸로 된 모양새였다.
첫 곡이었고, 내가 공연을 보러 오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던 윤이상의 '유동' 은 공연장에서는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음반도 국제 윤이상 협회 회원 전용반 3집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듣기 힘든 편이다. 해당 음반에는 페터 로네펠트 지휘의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이 초연 직전 제작한 방송 녹음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해당 녹음보다 좀 더 빠른 템포를 잡고 팽팽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손열음이 협연한 라벨 협주곡은 앞에 연주된 윤이상 곡보다는 다소 심심하고 무덤덤하게 들렸다. 손열음이라는 피아니스트가 화려한 기교나 쇼맨십 보다는 다소 신중하고 중도적인 연주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런 면을 의도적으로 죽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런 면모가 늘 마이너스인 것은 아니어서, 2악장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어울리게 들렸다.
다만 진한 블루 노트의 음색이 지배적인 1악장이나 떠들썩한 시장통 분위기의 3악장에서는 너무 얌전하게 연주한 듯한 모양새라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손열음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시각이 다소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들린 게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여러 번의 커튼 콜 이후 앙코르로는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이 연주되었는데, 사실 개인적인 악취미로는 요즘 일본에서 대리 작곡 문제로 화두가 된 사무라고우치 마모루-라고 쓰고 니가키 타카시라고 읽는다-의 피아노곡을 골랐으면 했다. 손열음이 일본의 사무라고우치 열풍에 음반까지 내고 동참했음을 생각하면 그녀가 계속 관련 문제에 침묵만 하고있는 게 영 못마땅한 탓인데, 물론 그러고 싶어도 JASRAC(일본저작권협회)이 사무라고우치-니가키 간의 저작권 분쟁이 명확하게 끝날 때까지 모든 연주와 방송, 녹음을 봉인한 상태니 못했겠지만.
2부에서는 이번 음악제의 테마인 'Seascape' 에 어울리는 두 곡이 연주되었는데, 우선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에서 간주곡 네 곡을 발췌한 '네 개의 바다 간주곡' 이 연주되었다. 이후 연주된 드뷔시의 작품이 인간이 배제된 자연으로서의 바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면, 브리튼 작품은 그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이 생활 속에서 늘 접하는 바다라는 느낌이다.
드뷔시 만큼은 아니지만, 브리튼 곡도 꽤 섬세하고 정교한 연주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곡이다. 그런 면에서 연주 자체는 약간 실망스러웠는데, 물론 마지막 곡인 '폭풍' 에서 휘몰아치는 연주로 만회하기는 했지만 두 번째 곡 '일요일 아침' 에서는 금관의 역량이 아쉬웠고 세 번째 곡 '달빛' 에서는 밀고 당기는 느낌이 좀 더 강했으면 했다.
마지막 연주곡인 드뷔시의 교향 소묘 '바다' 는 공교롭게도 2002년에 이 음악제를 처음 찾았을 때 정명훈 지휘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폐막 공연 2부의 첫 곡으로 연주한 곡이기도 했다. 이번이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섬세한 디테일 면에서는 2002년 연주보다는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관악 파트의 난조도 브리튼 곡보다는 덜해서 윤이상 곡과 함께 이 날 연주된 곡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축에 속했다.
연주 후 커튼 콜이 이어진 뒤 리브라이히가 영어로 직접 앙코르를 소개했는데, '아리랑은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면 다 알 만한 노래' 라는 식으로 운을 띄우고 민요 '도라지' 의 편곡을 들려줬다. 물론 공식 프로그램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누가 편곡한 것인지 꽤 궁금했는데, 이 궁금증은 의외로 빨리 풀 수 있었다.
사실 공연 내내 집중하기가 좀 어려웠는데, 일단 음악당 자체의 음향 수준은 상당히 좋았지만 객석 바닥까지 모두 나무로 만들어 공연장 자체가 악기 역할을 하는 세종체임버홀과 비슷한 난점을 갖고 있었다. 말인 즉슨, 청중들의 매너가 좋아야 쓸데없는 잡음에 방해받지 않고 그 좋은 음향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뒷자리에 하필이면 아이들을 떼로 데려온 학부모들 덕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내 지루해진 아이들은 끊임없이 마룻바닥을 밟아 다지고 때로는 앞자리 좌석을 발로 툭툭 건들며 '합주' 에 동참했고, 아이들 외에 라벨 피아노 협주곡 연주 직전까지도 계속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던 몇몇 '어른이들' 도 진상인 건 비슷했다. 오죽하면 내가 '사진 좀 그만 찍으시죠?' 라고 대놓고 핀잔을 줬을까.
좀 거칠게 말하자면, 통영시청이나 통영국제음악제 측이나 좋은 공연장 지어놓았다고 만족스럽다고 한다면 그건 참 실없는 자뻑이다. 아예 객석 소음마저 집어삼킬 정도의 폭발적인 음량을 자랑하는 록 공연이나 청중들의 일탈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재즈 공연이 아닌 이상, 그리고 클래식 전용 홀로 지어놨다고 공표한 이상 그 공연장의 이미지 관리는 시청과 음악제, 그리고 청중들과 연주자들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이라도 균형이 깨진다면 그 후폭풍이 어떠할 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연 후 사인회가 있다는 공지를 들어가기 전 확인했는데, 어차피 독주자 우대에 편향된 한국 공연예술계의 특성 상 '뭐 손열음 사인회겠네' 하고 생각해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로비로 가보니 손열음과 리브라이히가 나란히 앉아서 사인을 해주고 있었는데, 손열음은 제껴두고 리브라이히의 사인을 받고 싶어서 바로 줄을 섰다. 다만 로비에서 쇼팽의 녹턴 앨범이 팔리고 있던 손열음과 달리, 리브라이히는 뭔가 자신있게 내밀어 사인받을 음반이 수중에 없었다.
그런데 잘 보니 공연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앨범이 하나 더 팔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하이든 교향곡 39번과 45번에 윤이상 실내교향곡 1번이 커플링된 ECM 음반이었다. 이 음반은 이미 예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모처에서 빌려들은 것이라 '언젠가는 사야 겠다' 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구입했다. 덕분에 좀 더 떳떳하게 사인을 요청할 수 있었다.
리브라이히 앞에 서게 되자, 오랜만에 현지까지 가서 배우기도 한 독일어 실력을 살려 공연이 좋았다는 말을 전하고 앙코르의 편곡을 누가 했는 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리브라이히는 음반 속지에 사인을 해주면서 뒷쪽에 실린 뮌헨 실내 관현악단 단원 명부 중 누군가의 이름에 표시를 해줬다. 악단 바이올린 단원인 베른하르트 예스틀(Bernhard Jestl)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편곡을 해줬다고요?' 라고 약간 놀란 어조로 묻자, 리브라이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작곡도 한다' 고 답해줬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비매너 청중들의 민폐 덕에 우거지상이 되어 공연장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 순간 만큼은 다시 헤벌쭉해졌다. 사인을 받은 뒤에는 '내일 공연의 성공을 바랍니다' 라는 말을 리브라이히에게 전하고 터미널로 가기 위해 음악당을 빠져나왔다.
음악제는 앞으로도 큰 탈이 없는 한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유무형의 지원이나 청중들의 관람 태도 개선, 주최 측의 책임 있는 운영도 한국의 여타 음악제와 마찬가지로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미 돌아갈 차표를 예매했기 때문에, 올 때처럼 느긋하게 걸어갈 수는 없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차가 뜸한 편이라 다소 조급한 심정으로 기다리다가 버스 하나를 발견하고 올라탔는데, 다행히 매우 충분하고 여유롭게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중간한 시간에 죽으로 끼니를 때운 탓에 배가 고팠는데, 시간은 많이 늦은 상태라 주변의 식당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후에는 지금까지 교향악축제를 비롯해 클래식 공연을 본 적이 딱히 없는데, 다만 음반은 꽤 여러 종류를 구입했고 이곳저곳에서 처묵한 것들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포스팅은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다만 글 쓸 시간이 주로 주말에 국한되기 때문에 이 때 여러 편 써서 4일 주기로 저장해두는 '묵은 글 저장소' 신세는 당분간 면치 못할 것 같다.
Posted by 머나먼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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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내가 2년 전 가서 봤을 때는 그냥 한 척만 개방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봉인되어 있던 나머지 두 척과 판옥선 한 척까지 네 척을 관람할 수 있었다. 전시물과 관람 체계에도 꽤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무료 관람이었던 것이 이제는 유료가 되었다.
개인 여행이었으니 2000원이라는 요금을 부담해야 했는데, 미륵산 케이블카 탑승 시 당일 관람권을 제시하면 500원 할인 혜택도 있다고 했지만 날씨가 좀 흐렸고 탑승비 자체가 꽤 비쌌기 때문에 딱히 큰 감흥은 없었다.
매표소 맞은편의 광장에서는 프린지 공연을 위해 연습 중인 오카리나 합주단의 모습도 보였다.
관람권을 확인하는 검표소를 거쳐 들어간 뒤,
바로 선체 내부 관람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없던 이런 게임 시설도 추가되어 있었는데, 다만 고장난 건지 작동이 안되고 있었다. 아마 적선을 공격하는 슈팅 게임으로 보였는데, 한 쌍의 화승총,
그리고 총통 한 문이 스크린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게임인지 해볼 수도 없었으니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뜬금 없는 저런 게임 보다는 이렇게 선체 밑바닥에 당시 조선 수군의 함상 생활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더 이채로운 것이었다. 상당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는데, 원래는 판옥선에 전시되어 있던 걸 뜯어와 여기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선내 진료소. 이렇게 밀랍 인형으로 당시 수병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 겸 탄약고. 탄약 외에 총통도 몇 문 들어 있었는데, 아마 기능 고장이나 적의 공격으로 파손될 때를 대비해 예비로 갖춰놓았을 것 같다.
수병 침실.
식량 저장고. 어째 쌀가마니와 채소만 있는 게 당시 열악했던 조선 수군의 급양 상태를 돌려까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맨 풀떼기만 먹인 게 아니라 당시 남해에서 많이 잡히던 청어를 말려서 전투식량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목조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무슨 기술을 썼는지 선내에 부엌도 설치해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고 한다. 사실 임진왜란 때의 해전은 여러 문학이나 영상물에서 자주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전투 자체보다 수병들의 생활상에 대해 조명한 것은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이런 전시물이 내게는 더 흥미로운 것이었다. 물론 고증이 얼마나 잘됐는 지를 파고든다면 모르지만.
이어 세 번째 거북선과 판옥선을 보러 갔는데, 사실 거북선은 다른 배들과 별 차이가 없었고 판옥선은 위에 쓴 것처럼 내부 전시물을 대부분 다른 거북선들로 뜯어가서 선내가 휑하니 되어 있는 게 영 좋지 않은 모양새였다. 이것도 나중에 보충 전시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전시할 거면 나머지 선박들의 내부도 비슷하게 맞춰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거북선 관람을 마친 후에는 전날 시락국집과 마찬가지로 못갔던 충무꼬지김밥으로 갔는데,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이번에도 또 못먹고 돌아서야 했다. 원래 꿀빵을 사기 위해 아침에 가기 전 들렀는데, 단체 예약 손님들의 주문이 밀려서 오후에나 된다고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오후에 다시 왔는데, 가게 문은 열려있기는 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나간 것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여러 번 틀어져 버리니 의욕 자체가 없어져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신 택한 게 할매우짜의 빼떼기죽이었다.
사실 빼떼기죽에 대해서도 전날 우동을 먹었을 때 예전 조리법에 약간 변화를 줬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점성이 좀 덜해지고 고구마가 좀 더 형체가 남아있는 식으로 조리한 게 먹어보고 느낀 가장 큰 변화였다.
물론 고구마 특유의 달달함이나 약간의 떫은 맛 같은 건 크게 바뀌지 않아서, 늘 느끼던 그 맛은 비슷하구나 하고 싹싹 비워냈다. 이것 말고도 통영에서 한 끼를 더 때우기는 했지만, 현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이게 제대로 된 마지막 식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끼니를 때운 뒤, 한 가지 객기를 부려 보기로 했다. 통영국제음악당을 걸어서 가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기념공원에서 팀장과 얘기를 나눌 때도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니 '걸어가기는 힘들고, 버스를 타는 게 가장 낫다' 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일단 아직 다리는 튼튼한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걷는 것을 택했다. 다음에 '게속'.
거북선 관람을 마친 후에는 전날 시락국집과 마찬가지로 못갔던 충무꼬지김밥으로 갔는데,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이번에도 또 못먹고 돌아서야 했다. 원래 꿀빵을 사기 위해 아침에 가기 전 들렀는데, 단체 예약 손님들의 주문이 밀려서 오후에나 된다고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오후에 다시 왔는데, 가게 문은 열려있기는 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나간 것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여러 번 틀어져 버리니 의욕 자체가 없어져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신 택한 게 할매우짜의 빼떼기죽이었다.
이렇게 끼니를 때운 뒤, 한 가지 객기를 부려 보기로 했다. 통영국제음악당을 걸어서 가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기념공원에서 팀장과 얘기를 나눌 때도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물어보니 '걸어가기는 힘들고, 버스를 타는 게 가장 낫다' 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일단 아직 다리는 튼튼한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걷는 것을 택했다. 다음에 '게속'.
Posted by 머나먼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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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 벽화마을 방문으로 첫 날 일정을 마친 뒤, 다음 날에는 좀 더 계획대로 진행되길 바라면서 먼저 귀향 후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기 위해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죽림으로 갔다. 선물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꿀빵이었는데, 다만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집을 가볼까 하고 약도를 저장해 왔다.
가게 앞에 창업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솔직히 원조라는 단어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걸 근거로 여기가 원조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네이버 모 블로거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 집을 한 번 가봐야 겠다고 생각한 건 통영의 꿀빵집들 중 유일하게 국산 팥을 쓴다고 한 대목 때문이었는데, 사실 원산지도 속이려면 속일 수 있겠지만 최소한의 신뢰와 호기심을 포기하지는 않기로 하고 들어갔다.
이 곳 외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오미사꿀빵 본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그 날 팔 분량의 꿀빵이 떨어지면 바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기는 날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략 오후 두 시 언저리면 그렇게 된다고 해서 좀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주방에서는 꿀빵을 빚고 튀기고 물엿을 입히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미사 분점을 비롯한 다른 꿀빵집들이 수요를 확대하기 위해 전통적인 팥앙금 외에 다른 앙금을 넣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냥 팥앙금 하나만을 속재료로 고집하고 있다. 이렇게 열 개가 들어간 게 2호,
여섯 개가 들어간 게 1호다. 가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꿀빵집들보다 평균 500원 가량 비쌌던 것 같다. 일단 앙금이 한국산이라는 가게 측 주장을 감안하면 그럴 만한 가격이었는데, 일단 집에 가져갈 2호 한 팩과 토요일 서코 때 지인들에게 돌릴 1호 두 팩을 주문해 들고 나왔다.
사실 여기 본점 외에도, 통영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민문화회관 근처에서 카페 형태로 운영하는 분점에서도 1호 한 팩을 더 샀다. 원래는 그냥 내가 먹으려고 낱개로 몇 개 사려고 했지만, 낱개는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것도 결국 내 몫으로 먹지 않고 마찬가지로 서코 공물용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집에 돌아와 2호 팩을 뜯은 뒤 내 몫이라며 한 개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많이 달거나 뻑뻑하지 않아서 원조고 국산 팥이고를 떠나 약간 연배가 있는 사람 입맛에는 잘 맞겠다 싶었다. 다만 크기는 오미사 등 다른 경쟁 업체의 것보다는 약간 작은 편이라, 양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부족하다 싶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지간히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1호 한 팩도 한 번에 다 먹기 힘들 것 같지만.
이것 외에도 사진은 못 찍었지만 1편에서 잠깐 언급한 탑마트라는 지역 대형 마트 내의 제과점에서도 이번엔 진짜 내 몫으로 사겠다고 구입한 여섯 개 들이 꿀빵이 한 꾸러미 더 있었는데, 이것도 결국 현지에서 하나도 안 먹고 집으로 가져갔다. 원조라는 수식어를 단 것과 그냥 일반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을 한 번 비교해 보라는 의도가 되었는데, 단 걸 좋아하는 내 기호에는 탑마트 제과점의 것이 좀 더 맛나게 느껴져서 아이러니했다. 결국 원조니 전통이니 하는 단어보다 어느 꿀빵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지는 여느 음식들이 그렇듯 자기 취향에 따라 갈릴 듯 하다.
꿀빵을 산 뒤, 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다시 가마솥시락국을 찾아갔다. 다행히 문을 열고 영업하고 있었고, 이 사진을 찍은 뒤 바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가게 내부는 최대한 많이 앉아도 열두 명을 겨우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는데,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지역 단골을 주 고객으로 삼는 곳이라는 게 네이버 모 블로거의 설명이었다. 식탁 위에 이렇게 밑반찬들과 양념들이 한 줄로 올라와 있는 건 여느 시락국집들과 비슷했다.
물론 메뉴는 시락국 하나 뿐이니, 주문할 필요 없이 앉으면 사람 수대로 바로 나온다. 국을 준비하는 동안 개인 접시에 반찬을 덜어와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곳 시락국은 따로국밥 스타일이 아니라 미리 밥을 말아 내오는 식이었다.
밑반찬은 콩나물 무침과 배추김치, 시금치 무침이라는 평범한 것에 파래인지 뭔지 모를 해초 무침과 멸치젓을 더해 퍼왔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짭짤하게 무친 파래나 미역 무침을 좋아해 잘 먹었는데, 멸치젓의 경우에는 예전에 먹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짰기 때문에 좀 적게 덜어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이렇게 짠 맛이라면, 아무래도 제조 상의 실수 같은 게 아닌 이 지역의 특성 같다.
후추와 땡초 다진 것을 뿌려 좀 매콤하게 먹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담백한 시래기국 스타일이라 부담 없는 아침 식사 혹은 술마신 다음 날 해장용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여느 시락국들과 마찬가지였다. 먹다가 산초 가루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뿌려서 먹었는데, 예전에 처음으로 추어탕을 먹었을 때 후춧가루인 줄 알고 듬뿍 뿌려서 먹었다가 입에 안맞아 곤혹스러웠던 경험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별로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지만.
기분 좋게 한 그릇을 비운 뒤,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가기 위해 시장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어느 동물병원에서 본 물 마시는 고양이. 바닷가 동네라 길고양이가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붙임성 좋은 고양이를 보지 못해 좀 아쉽기도 했다.
기념공원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간 곳은 2층의 전시실이었다. 물론 바뀐 건 없었지만, 바뀌든 아니든 간에 늘 오면 들르는 게 의식처럼 되고 있다. 누군가가 방명록 위에 올려놓고 간 동백꽃 한 송이가 이채로웠다.
전시 물품은 바뀐 게 없다지만, 윤이상에 대한 정치사회적 논란을 떠나 해당 인물이 작곡을 할 때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 지를 알 수 있는 자필 악보들은 여전히 흥미로운 전시물들이었다. 출판사에 보내기 직전 오류 등을 수정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의 깔끔하게 사보된 자필보 표지라던가, '가곡' 의 목소리와 하프용 판본과 첼로와 하프를 위한 '공간 2' 의 하프 페달표 같은 건 작곡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실용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다.
자료는 그대로였지만, 이 곳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어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약간 한국어가 어눌한 여성에게 큐레이터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는데, 슬쩍 끼어들어 같이 들으면서 맞장구도 쳐주며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1층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 여성이 현재 영국의 모 대학에서 윤이상의 피아노 3중주와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 두 곡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 교포 학생이었고, 직원으로 보인 사람은 기념공원 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이상이라는 키워드로 전혀 면식이 없던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교포 학생은 유럽 외에 한국에서 확보할 수 있을 자료를 모으기 위해 왔다고 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 있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팀장은 공개적으로 쓰기는 아직 좀 힘든 한국 윤이상 기념 사업의 난항 같은 현실적 문제 등에 대한 정보를 주기도 했는데, 이런 기회는 책이나 여타 미디어 매체에서는 갖기 힘든 것이라 이 날 식도락 외의 경험 중에서는 음악회와 함께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또 팀장은 나와 교포 학생에게 선물로 2005 경남국제음악콩쿠르 결선 실황이 담긴 CD 세트를 하나 씩 건넸는데, 원래 계획이라면 이걸 구입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공짜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도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집에 와서 들어보니 녹음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입상자들의 치열한 경쟁 순간이 담긴 실황이고 현재까지 역대 콩쿠르 중 유일하게 외국 악단-폴란드에서 온 비드고슈치 포모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 반주한 사례라서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공원을 나와서도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거북선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항구 쪽으로 이동했다. 다음에 '게속'.
이 곳 외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오미사꿀빵 본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그 날 팔 분량의 꿀빵이 떨어지면 바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기는 날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략 오후 두 시 언저리면 그렇게 된다고 해서 좀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주방에서는 꿀빵을 빚고 튀기고 물엿을 입히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사실 여기 본점 외에도, 통영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민문화회관 근처에서 카페 형태로 운영하는 분점에서도 1호 한 팩을 더 샀다. 원래는 그냥 내가 먹으려고 낱개로 몇 개 사려고 했지만, 낱개는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것도 결국 내 몫으로 먹지 않고 마찬가지로 서코 공물용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집에 돌아와 2호 팩을 뜯은 뒤 내 몫이라며 한 개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많이 달거나 뻑뻑하지 않아서 원조고 국산 팥이고를 떠나 약간 연배가 있는 사람 입맛에는 잘 맞겠다 싶었다. 다만 크기는 오미사 등 다른 경쟁 업체의 것보다는 약간 작은 편이라, 양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부족하다 싶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지간히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1호 한 팩도 한 번에 다 먹기 힘들 것 같지만.
이것 외에도 사진은 못 찍었지만 1편에서 잠깐 언급한 탑마트라는 지역 대형 마트 내의 제과점에서도 이번엔 진짜 내 몫으로 사겠다고 구입한 여섯 개 들이 꿀빵이 한 꾸러미 더 있었는데, 이것도 결국 현지에서 하나도 안 먹고 집으로 가져갔다. 원조라는 수식어를 단 것과 그냥 일반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을 한 번 비교해 보라는 의도가 되었는데, 단 걸 좋아하는 내 기호에는 탑마트 제과점의 것이 좀 더 맛나게 느껴져서 아이러니했다. 결국 원조니 전통이니 하는 단어보다 어느 꿀빵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지는 여느 음식들이 그렇듯 자기 취향에 따라 갈릴 듯 하다.
전시 물품은 바뀐 게 없다지만, 윤이상에 대한 정치사회적 논란을 떠나 해당 인물이 작곡을 할 때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 지를 알 수 있는 자필 악보들은 여전히 흥미로운 전시물들이었다. 출판사에 보내기 직전 오류 등을 수정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의 깔끔하게 사보된 자필보 표지라던가, '가곡' 의 목소리와 하프용 판본과 첼로와 하프를 위한 '공간 2' 의 하프 페달표 같은 건 작곡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실용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다.
자료는 그대로였지만, 이 곳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어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약간 한국어가 어눌한 여성에게 큐레이터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는데, 슬쩍 끼어들어 같이 들으면서 맞장구도 쳐주며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1층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하면서 그 여성이 현재 영국의 모 대학에서 윤이상의 피아노 3중주와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 두 곡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는 교포 학생이었고, 직원으로 보인 사람은 기념공원 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이상이라는 키워드로 전혀 면식이 없던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교포 학생은 유럽 외에 한국에서 확보할 수 있을 자료를 모으기 위해 왔다고 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 있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팀장은 공개적으로 쓰기는 아직 좀 힘든 한국 윤이상 기념 사업의 난항 같은 현실적 문제 등에 대한 정보를 주기도 했는데, 이런 기회는 책이나 여타 미디어 매체에서는 갖기 힘든 것이라 이 날 식도락 외의 경험 중에서는 음악회와 함께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또 팀장은 나와 교포 학생에게 선물로 2005 경남국제음악콩쿠르 결선 실황이 담긴 CD 세트를 하나 씩 건넸는데, 원래 계획이라면 이걸 구입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공짜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도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집에 와서 들어보니 녹음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입상자들의 치열한 경쟁 순간이 담긴 실황이고 현재까지 역대 콩쿠르 중 유일하게 외국 악단-폴란드에서 온 비드고슈치 포모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 반주한 사례라서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공원을 나와서도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거북선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항구 쪽으로 이동했다. 다음에 '게속'.
Posted by 머나먼정글